어느 마음 약한 신의 부활, 드라마 <도깨비>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tvN 드라마 도깨비(上)
드라마 속 도깨비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즉 고려 중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실제 역사상으로도 도깨비 신앙이 한창 생겨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다. 시대적 고증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최근 어느 작품을 탐구할지 고민하던 중, 주변 절친한 분들로부터 특별한 요청을 받게 됐다. '드라마 <도깨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달라'고. 마침 이 작품이 최근 장안의 화제였기에, 개인적으로도 큰 관심을 두고 있던 차였다.
영화와는 다른 형식의 콘텐츠지만,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이 장르의 초월이라면 필자 역시 그 조류에 한 번쯤 편승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작품 내용을 신앙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교회 청년들 혹은 강의하던 학생들과 여러 차례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본 작품 속에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의할 주제들이 넘쳐난다는 뜻이리라.
한국의 전설과 무속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드라마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화두를 애써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이 결코 옳은 대처법은 아닐 것이다. 작년 <곡성> 개봉 당시도 주변에 기독교적인 해석의 기준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던 사실이 문득 기억난다.
비록 우리 민족의 이교적 잔재이긴 하지만, 한국의 신화, 저승사자, 도깨비 설화, 환생사상 등에 대해 한 번 정도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전통신화와 무속(巫俗)이라는 정신적 유산에 대해 개론적으로라도 숙지하고 있어야,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교회의 문화적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성경에 기록된 복음 전도자들의 심정을 떠올려 보자. 사도 바울이 아테네(Athens) 아레오파고스(Areopagus, 고대 아테네 바위언덕으로 귀족이나 의원회의를 개최하던 곳)에서 스토아 학파(Stoic school)와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을 때, 그가 과연 아테네인들의 신화와 믿음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아테네인들의 신화와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의 신화와 철학이 내포하는 신학적 약점 및 모순점을 논박하며, 예수를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려 했다. 필자도 부족하나마 바울과 같은 전도자의 심정을 본받아, 드라마 도깨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보려 한다.
이번 칼럼은 총 3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상편은 한국신화의 계보 속에서 도깨비가 점유하는 위치를 확인해 보고, 본 드라마가 도깨비 신앙과 설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반영했는지를 되짚어 본다.
중편은 드라마 속 도깨비 외의 배역들에 대한 신화적 설정과 배경을 살핀다. 특히 신과 귀신들에 대한 한국 무속 고유의 사상들을 함께 고찰한다.
하편은 이 드라마가 한국형 대체종교(a substitute religion)의 본격적 출발점일 가능성을 타진하고, 드라마 <도깨비>가 그 상업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작품들을 참고하고 오마주(hommage)했는지, 그 구체적 브리콜라주(bricolage) 방식을 분석한다. 그리고 미국의 대체종교 등장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런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하는지 숙고해 본다.
도깨비의 신화적 족보: '위대하고 찬란하神 도깨비'
국내에서 한국형 신화 및 귀신 콘텐츠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바다. 멀게는 한국형 납량 귀신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영화 <월하의 공동묘지(1967)>로부터 드라마 <전설의 고향(1977-1989)>, 장르소설 <퇴마록(1992-2001)>, 영화 <은행나무침대(1996)>, <여고괴담"(1998)>, '막장' 스토리로 유명한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왕꽃선녀님(2004-2005)> 등이 있다.
가까이는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2010-2012)>,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2015)>, 영화 <곡성(2016)>까지,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한국형 신화 및 기담(奇談) 관련 작품들이 주기적으로 출현했다. 얼마 전 종결된 드라마 <도깨비>는 이런 작품들의 계보를 잇는 가운데, 그 대중적 성공의 폭을 이전보다 훨씬 증폭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현상은 한국 문화 콘텐츠의 다양성과 경쟁력을 높인다는 측면으로 보면, 고무적인 일이다. 위에 나열한 작품들은 <일리어드(Iliad)>와 <오디세이아(Odysseia)>로 대표되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아더왕의 전설(The Legend of King Arthur)>,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해리포터(Harry Potter)> 등에서 발견되는 북유럽 켈트(Celtic) 및 게르만(German) 신화들처럼 국제적 인지도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못지 않은 인지도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도깨비>와 같은 작품들이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신화와 무속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를 기반으로, 도깨비 신앙과 설화를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 고유의 정신적 문화유산인 한국 신화의 세계관 속에서 도깨비라는 존재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통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는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첫째는 환인(桓因)계열 신들의 계보이다. 우주의 혼돈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천신(天神) 환인을 주신으로 숭상하는 환인계 신화는 주로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그리고 계은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에 의해 집대성됐다.
이 중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통상 그 집필의도 및 내용에 진정성이 결여된 위서(僞書)로 분류돼 왔고, 조선상고사는 심하게 편향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문헌 모두 역사적 신빙성이나 사료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이 문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한민족의 전통 구전신화들을 보존?계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속에 기록된 내용들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환인계 창세 신화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시조신(始祖神) 환인은 최초로 스스로 존재한 신으로서 다른 모든 신들의 근원이 됐는데, 그 가운데 자신과 영격(靈格)이 동등한 신이자 아들인 환웅(桓雄)에게 명해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게 하였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천지인 삼재(三才)를 세상의 근본으로 두었다.
그 후 환인은 지상으로 강림해 환국(桓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치며, 그들의 수명을 정해주고, 자연 만물이 이치에 맞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환인으로부터 생겨난 하위신들이 환인의 치세를 도왔다. 환국 중심지는 신시(神市)라고 불렸으며, 환국 전체의 영토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 리였다(굳이 따져보자면 오늘날 중국 영토 전체와 몽고, 한반도를 모두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환인은 이 땅에서 3,301년 동안 환국을 다스린 뒤 승천했고, 뒤이어 아들 환웅이 천부인(天符印)을 갖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천부인이란 우주와 하늘의 이치와 권위를 상징하는 세 가지 신물(神物)로, 방울, 거울, 칼을 가리킨다. 환웅 역시 신시(神市)라는 수도를 건립했는데, 이 신시는 그가 강림한 백두산 신단수가 있는 곳이었다. 환웅은 신시를 중심으로 1,56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 시대 후기 환웅의 하위신이자 신하 중 하나였던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환웅 시대의 환국 영토 전체를 회복했다고 한다.
환웅이 다스리던 백두산 신단수 근처에는 곰족과 호랑이족이 서로 이웃해 살고 있었는데, 환웅은 곰족의 여인 중 하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환검(桓儉, 단군왕검)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곰과 호랑이가 삼칠일(三七日, 21일) 동안 어두운 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견디라는 명을 받은 이야기가 바로 이 환검의 탄생에 얽힌 신화이다.
환검은 환웅의 승천 후 뒤이어 밝은 임금, 곧 단군이 되어 조선(朝鮮, 여기서는 고조선을 말함)을 건국했으니, 그가 곧 한민족의 건국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부여(扶餘)를 건국한 해모수(解慕漱),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한 해모수의 아들 주몽(朱蒙), 백제(百濟)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까지 한민족 대부분의 건국신화가 모두 이 환인계 신화에 속해있다. 참고로 신라(新羅) 건국신화인 박혁거세(朴赫居世) 신화는 환인계 신화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신라 고유의 전승으로 볼 수 있다.
환인계 신화의 결정적 특징이라면 명백한 다신교(多神敎) 신화로서,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동기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군왕들을 신의 자손으로 신격화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 전통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 중 두 번째는 옥황상제(玉皇上帝)계 신들의 계보이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무속 신들의 계보는 대부분 이 옥황상제계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환인계 신화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 동기에 충실한 현세중심적 특성을 보이는 반면, 옥황상제계 신화는 도교와 불교 전통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한민족 고유의 내세관을 중점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옥황상제계 신화는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다채로운 내용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구전자가 접신하는 신의 계보나 구전 지역에 따라 신들의 족보 속에 표시된 구체적 위계의 편차가 크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옥황상제를 천신들 중 최고신으로 숭배하며, 옥황상제의 후손인 바리공주를 무조신(巫祖神), 즉 무속인들의 조상이 되는 신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리공주에 얽힌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나라에 옥황상제의 후손인 오구대왕이라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이을 왕자를 얻기 원했는데, 태어나는 아이가 모두 딸이었다. 7번째 딸이 태어나자 대노한 그는, 아이를 궁궐 뒤뜰에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낮에 새들이 날아와 아이를 보호하고 밤에 들짐승이 아이에게 젖을 먹여 살리니, 왕이 다시 명하여 아이를 옥함에 넣어 바다에 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왕이 아이를 '바리공주(혹자는 바리데기라고도 부름)'라 불렀으니, '버려진 아이'라는 뜻이다. 아이는 바다에 떠다니다 외딴 어촌의 늙은 부부에게 발견됐다. 부부는 아이가 없던 차라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길렀다.
15년이 지나, 오구대왕과 왕비가 중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천의 약수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처방을 받고, 여섯 딸들에게 약수를 떠와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모두 힘든 일이 싫다고 거절했다.
크게 낙담한 오구대왕과 왕비는 죽기 전에 일곱째 딸을 보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신하들을 시켜 바리공주를 찾았다. 바리공주는 왕과 왕비를 보고 슬퍼하며 서천의 약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이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저승마저 지나, 바리공주는 서천(西天)의 약수와 서천꽃밭의 숨살이(圖息)꽃, 뼈살이(圖骨)꽃, 살살이(圖肉)꽃을 얻어 오구대왕의 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 오구대왕과 왕비는 이미 죽어 상여에 실려가는 길이었다.
바리공주는 숨살이, 뼈살이, 살살이꽃의 효험을 기억하고는 왕과 왕비의 입에 약수를, 품에 꽃을 안겨주니 둘이 다시 살아났다. 왕과 왕비가 궁궐에 돌아오니 여섯 딸들이 유산을 더 차지하려 싸우다 왕과 왕비가 살아난 것을 보고 놀라 도망했다. 바리공주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조신이 되었다.
옥황상제계 신화는 바리공주 외에도 저승을 다스리는 십대왕(十大王)에 관련된 이야기, 사라도령, 원강아미, 할락궁이 등과 관련된 서천꽃밭 꽃감관 이야기, 그리고 저승사자가 된 사람 강임에 대한 이야기 등 다채로운 내용을 담은 다신교적 신화들을 포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 옥황상제계 신화는 도교적이고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하늘과 저승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내세지향적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특징을 보인다.
자, 그렇다면 도깨비는 한국의 대표적인 신들의 계보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도깨비는 지금까지 설명한 두 가지 계보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따져본다면 간혹 옥황상제계 신화의 맥락에서 일부 하급신 혹은 잡귀 수준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대상이 명확하게 도깨비를 지목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결론적으로 도깨비 신앙이나 설화는 한반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작된 신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환인계 신화는 주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알타이(Altai)족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옥황상제계 신화는 주로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도교 및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도깨비 신앙은 한반도 외부의 신화와 별 관계가 없는, 한민족 고유의 독창적 유산이라 볼 수 있다. 일부 도깨비 신앙 및 설화 연구자들 가운데, 한국의 도깨비를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서 유래한 역신 독각귀(獨脚鬼, 외다리 귀신)나 일본의 오니(鬼, おに)와 엮어 설명하려는 분들도 있었으나, 명백한 사료적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특히 일본 오니의 모습(하나 혹은 두 개의 뿔, 철못이 박힌 방망이, 날카로운 송곳니, 빨갛고 파란 피부색 등)은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가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를 대변하는데, 이런 이미지는 한국 전통의 도깨비 모습(장대한 체구, 벽안, 온 몸에 가득한 털)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일본 오니의 모습이 한국 도깨비의 이미지로 굳어진 것은 주로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도깨비 신앙마저 일본의 귀신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모방해온 것이라는 인식을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게 새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즉 고대 일본 야마토 정권(大和政權)이 4-6세기경 한반도 남부의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대부분을 200년 이상 지배했고, 한국의 고대문화 형성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혹자는 도깨비를 치우천왕 및 귀면(鬼面)문양과 연관지어 설명했고, 이런 시도가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의 응원기 문양과 얽혀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전통적 도깨비 신앙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귀면와(鬼面瓦)나 귀면문양이 파사(破邪)의 효력을 가졌다는 믿음은 원래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한국 전통의 도깨비 신앙은 오히려 도깨비를 심술궂고 영악한, 그래서 역병과 같은 재앙을 가져오기도 하는 신으로 묘사한다. 혹 도깨비가 인간에게 이로운 경우라 해도, 파사의 효력보다는 풍요와 재물을 얻게 해 주는 재신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면와에 대한 믿음은 본래 치우천왕과도 별 관계가 없고, 도깨비와는 더더욱 직접적 관계가 없다.
다시 도깨비의 신화적 위상에 대한 문제로 돌아와 보자. 분명한 사실은 도깨비 신앙이 알타이족 신화, 도교, 유교, 불교 사상, 혹은 일본의 신토(神道) 사상과도 별 관련 없이, 한반도 내에서 자생한 정신적 유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 왜 도깨비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한국 신들의 계보를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을까? 바로 드라마 내용 속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삼신(三神)할매, 저승사자, 그리고 귀신(鬼神)에 대한 해설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본편에서는 도깨비에 대한 해설에 집중하기로 한다.
역사적인 문헌 속의 도깨비: "돗가비 請하야 복알비러 목숨길오져 하다가..."
한국의 신화들 속에서 도깨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언제인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신라 시대 처용이 지었고 이후 고려시대에 8구체 향가로 발전된 처용가(處容歌)가 지목된다.
서라벌 밝은 달 아래 (東京明期月良)
밤이 늦도록 놀다가 (夜入伊遊行如可)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入良沙寢矣見昆)
다리가 넷이구나. (脚烏伊四是良羅)
둘은 내 아내 것인데 (二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누구 것인가? (二兮隱誰支下焉古)
본래 내 것이었는데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설화에 의하면 처용은 원래 용의 아들로, 신라 헌강왕(憲康王)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역신(疫神)이 와서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 처용이 춤추며 부른 노래가 '처용가'이다. 처용의 노래를 들은 역신은 처용이 자기를 발견하고도 아무 해를 끼치지 않고 춤추며 노래만 부른 관대함에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누구든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두면 그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갔다.
일단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도깨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이후 명백하게 지목되는 도깨비의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처용가를 보면 옛 신라인들이 돌림병을 역신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역신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가솔들이 돌림병에 걸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용가의 역신 신앙과 마찬가지로, 도깨비를 역신으로 믿는 신앙은 조선시대 이래 전남 진도와 전북 순창 지역에서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처용가의 역신은 남의 아내를 탐할 정도로 호색하는 신으로 나오는데, 조선시대 이래 도깨비 설화들 중 여성 혹은 과부와 관계된 설화들은 모두 도깨비를 호색한으로 그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처용가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도깨비 신앙에 대한 기록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처용가와 달리 '도깨비'라는 호칭이 분명하게 발견되는 최초의 문헌은 조선 세종조 당시 집필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도깨비(돗가비)를 청하여 복을 빌어 목숨을 길게 하려 하다가 결국 얻지 못하니..."
한국 민간신앙과 도깨비 신앙의 전문가인 김종대 교수의 해설에 의하면, <석보상절>의 돗가비란 '돗'과 '아비'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 볼 수 있다. '돗'이란 '불'이나 '씨앗, 종자'라는 뜻으로, '아비'란 '장성한 성인남자'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돗가비'라는 말은 불이나 씨앗처럼 생산력이나 풍요함 등을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성인남성을 의미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위에 인용된 <석보상절> 구절을 살펴보면, 도깨비 신앙이 왕실에서 편찬하는 문서에 기록될 만큼 조선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고, 도깨비를 믿는 목적이 주로 무병장수의 복을 얻는 데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민중이 본 도깨비는 오늘날 어린이용 전래동화에서 볼 수 있는 장난스럽고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라, 역병 방지와 무병장수에 관련된 경외와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깨비의 능력: "생사를 오가는 순간이 오면 염원을 담아 간절히 빌어"
도깨비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앙과 대중화된 도깨비 설화들은 내용상 어느 정도 뚜렷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깨비 신앙이나 설화에서는 도깨비에 대한 다음의 가지 특징들이 부각된다.
1. 메밀묵, 팥시루떡, 돼지고기, 술을 좋아한다.
2. 성격이 괴팍하고 영악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반면, 간혹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어리숙하고 친절한 모습도 보인다.
3. 사람과 친하고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4. 간혹 크게 될 사람을 만나는 경우 그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기도 한다.
5. 특히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이다.
6. 불로 변하고 불을 다스릴 수 있다.
7. 재물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다.
8. 외딴 산속이나 해안지역, 혹은 바다에 자주 출몰한다.
9. 말의 피를 대단히 무서워한다.
드라마 도깨비의 인물설정은 비교적 한국의 전래 도깨비 신앙 및 설화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도깨비 김신(공유 분)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을 처음 이어주는 매개물로 메밀꽃이 선택된 점은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특성을 연상시킨다. 사실 메밀과 도깨비의 연결관계는 도깨비가 한반도 고유의 문화유산이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이다. 메밀은 약 6세기경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통일삼국시대 및 고려시대까지 조와 함께 한국 민중의 주식이었다.
도깨비가 메밀로 된 음식을 좋아한다는 속설은 메밀이 조선조 이전 한민족 평민 및 하층민들의 주식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알타이족 신화가 부여 및 고구려 건국 당시인 주전 1세기경에 한반도 쪽으로 들어온 것, 그리고 도교와 불교가 4-5세기경 한반도에 들어온 것을 고려한다면, 환인계 신화나 옥황상제계 신화는 메밀이 전파되기 전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고, 도깨비 신화는 메밀이 전파된 6세기로부터도 한참 뒤에 한반도 내부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메밀 외에도 드라마는 도깨비 신화의 여러 설정들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드라마 속 김신은 식사 때마다 스테이크를 즐겨 먹는데, 이것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도깨비 신화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신의 까칠하면서도 어리숙하고 특히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성격은, 신화 속 도깨비의 괴팍함과 어리숙함, 호색적 성격을 대변한다.
김신이 프랑스 파리에 입양된 한국인 아이를 돕는 장면,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돕고 세상을 떠난 장면에서는 크게 될 인물의 미래를 보는 도깨비 전설을 떠올릴 수 있다. 김신과 저승사자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자존심 싸움과 코메디적 상황들은 장난치는 것과 내기, 특히 씨름을 좋아하는 도깨비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김신은 몸을 불로 변화시킬 수 있고, 불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이는 도깨비가 자주 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도깨비불 전설이나 경험담을 반영한다. 김신은 캐나다에 대형 호텔을 소유한 거부인데, 이는 도깨비를 재신(財神)이나 풍어신(豊魚神)으로 믿는 일부 농촌과 어촌의 도깨비 신앙에 따른 설정이다.
김신이 지은탁을 돕기 위해 그녀를 괴롭히는 이모네 가족을 혼내주는 방법(훔친 금괴를 얻게 하여 경찰서에 잡혀간다)도 사람들을 벌주기 위해 돈을 뿌리고 달아난 도깨비 설화에서 추려낸 것으로 보인다. 김신이 처음 도깨비가 된 후 바다를 건너 캐나다로 갈 때 폭풍을 불러온 것, 그리고 김신과 지은탁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바닷가라는 점은 도깨비가 자주 바다의 신으로 숭상된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김신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저승사자가 말의 피로 글씨를 쓴 수건을 화장실 앞에 두었을 때 김신이 두려워 떠는 모습도 설화에 충실한 설정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한국 고유의 전통적 신앙의 대상인 도깨비를 고전적 통설에 맞게 그려냈는데, 이는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아련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유한 정신적 유산을 되살려내 시청자로 하여금 큰 공감대와 즐거움을 얻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로써 전설 속에 묻혀져 있던 도깨비는 미디어라는 신식 문물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신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한국 전통의 신을 되살려 일으키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