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의 배은망덕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 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눅 15:12)
이 그림은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받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을 풀이하기 위해 먼저 본문에 나오는 가족에 대하여 약간의 보충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한 어진 아버지 밑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잘 따라 주었으나 작은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 뜻을 거역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시로 외박을 하기 일쑤였으며 외박횟수가 잦을수록 집을 떠나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그에게는 집보다는 세상이 근사하게 보였다. 그는 가정을 위하여 땀흘리고 또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 오히려 '자유'라고 하는 것, 사실상 '죄짓는 자유'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다. 어느 날 아들은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아예 집밖으로 뛰쳐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빈손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흥비를 마련해야 정욕의 허사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여 유산을 앞당겨 받기로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유산은 받는 것은 불법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유산이란 부모가 운명할 때 물려주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미리 달라고 독촉한다. 아버지의 안색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표정이 침통하다. 그 표정에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못난 아들이지만 그래도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기른 아들인데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주기는커녕 이제는 재산까지 내놓으라고 떼를 쓰니 아버지의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우리는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유산은 아버지가 주는 것이므로 아버지가 서명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아들이 펜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대필을 해주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면 아들은 그만치 효성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효자라면 아버지 곁을 떠날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서명하는 이유로 두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첫째 경우를 생각해보면, 강제로 유산을 물려받기 위하여 펜을 빼앗아 조급하게 서명을 하였을 수 있다. 이 아들은 정욕의 세력 앞에 굴복을 당하여 생활이 완전히 문란해지고 무질서해지게 되었다. 모든 감정들이 난폭한 충동과 더불어 그 한계를 지나쳐 버린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위협하여 재산을 강탈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평소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 돈이 없다면 온갖 불량한 행태까지 부렸던 패륜아가 아닌가? 아버지는 유산을 달라는 아들의 요구를 며칠 전에 듣고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나누어주기로 결심하였다. 도대체 그의 마음을 돌이킬 방책이 없었기에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였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불러 재산을 물려주려는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펜을 빼앗아 자신이 서명을 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일분 일초라도 집을 떠나고 싶은 육욕의 본성이 노골적으로 출현하는 순간이다.
둘째 경우는 아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에 서명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은 자식으로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은 유산을 챙겨 떠남으로써 부자의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아들은 신분 포기각서나 다름없는 서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그가 누려왔던 권리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쉽사리 포기한 자식으로서의 권리는 과연 무엇인가?
사실 아버지의 은혜는 이슬처럼 침묵속에서 주어졌다. 자식이란 아버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땅에 태어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누린 그간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가뭄의 소낙비처럼 달콤하며 뜨거운 햇살을 피하는 축복의 구름처럼 시원하며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였다. 그 분의 은혜는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영구적이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 입을 것, 누릴 것 등이 풍부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 자기에게 베풀어졌는지 알지 못하였던 것같다. 자기가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하였다. 단지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렸던 특권, 다시 말해 자신이 일해서 얻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공짜로 얻은 특권의 의미를 불행히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특별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가 광야의 올빼미같고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같이 고독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시 뒤면 엄습할 엄청난 재난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들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거나 다름없다. 물론 그가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였다는 말은 없다. 표면적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드나 그가 저지른 행동에는 분명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유산을 받으려고 작정했을 때 그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판단하거나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이용할 궁리밖에는 없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여준 태도였다.
그림 우측에는 그를 먼 이국 땅으로 태우고 갈 말이 대기해 있다. 이것은 아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묶는 줄을 끊고 대신에 육욕의 줄에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아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법에 더 이상 매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죄짓는 자유’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행히도 아직은 아버지의 집 안에 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아버지에게서 떠나 있으나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에 마음에서는 기쁨을, 눈에서는 빛을, 삶에서는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부성애가 지겨웠던 걸까?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성록(안동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