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두 가지 삶의 방식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할렐루야~ 한번 신앙고백을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에게 만사형통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두 가지 삶의 방식”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 첫째 방식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방식인 것입니다. 태산같이 어려움이 다가와도 태산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로다. 태산같은 어려운 문제가 다가와도 그 태산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다가와도 자기의 지혜나 지식이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을 가지고서 문제를 대하고 해결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상 되더라 안되더라. 한다 못한다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보면 또 믿음으로 안살고 안믿는 것 같은데 또 정 안믿지도 않고 그래서 도저히 믿는지 안믿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우유부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학으로 유명한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의 가장 무서운 적은 우유부단, 의심, 두려움입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고, 우유부단 하면 다시 의심을 구체화 시켜 두려움을 더욱 크게 만듭니다. 더욱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자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두려움을 가지면 마음이 결정을 못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결정하지 못하고 중간에 서서 좌왕우왕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은 내버려 놓으면 우후죽순같이 자랍니다. 완전히 의심과 두려움에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윌리암 제임스는 “우유부단한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하지 못한 선택과 단호하지 못한 마음으로 중간 상태의 삶을 살면 갈등만 커질 뿐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예스면 예스, 노면 노 되면 된다 안되면 안된다고 말을 하고 나가면 자기도 편안하고 듣는 사람도 따라갈 수 있는데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고 된다는 말도 아니고 안된다는 말도 아니고 중간에 서서 어정쩡하게 있으면 자기도 갈 바를 모르고 따라오는 사람도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게 되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파스칼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대한 지식이 하나님이시고 가장 관심을 가져야 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찾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연구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결정적인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학문적으로만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크나 작으나 문제가 생기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믿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맡겨 놓고 난 다음에도 자꾸 간섭을 하고 맡겨 놓고 난 다음에도 도로 달라고 그러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삶의 방식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방식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서 있는 삶은 우리가 단호히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열두 정탐꾼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보낸 열두 정탐꾼에 대한 이야기를 민수기 13장 17절로 20절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그런데 열명의 정탐꾼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다 홍해를 지나고 광야를 지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놀라운 홍해 바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지는 것 보았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추운 밤에는 불기둥이 일어나서 온 천막 주위를 따뜻하게 해줬고 낮에는 뜨거운데 구름기둥이 덮어서 시원하게 해주었고 메추라기가 오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만나가 떨어지지 않느냐. 물이 바위에서 솟아 오르지 않느냐.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기적과 이사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기적과 이사를 행하는 하나님인 것을 깨달아 알고 믿으면 참 좋은데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열두 정탐꾼을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보냈는데 그 중에 열명은 전혀 사물을 볼 때 하나님의 기적을 생각하지 않고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보느냐 이것이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 사람들은 와서 보고하기를 그 땅에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 땅은 주민을 삼키는 박토더라. 아주 살기가 어려운 땅이더라. 그 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크고 견고하더라. 주민들이 얼마나 강한지 키가 크고 장대한 사람들이고 성벽은 하늘을 찌를 것 같아서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고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 거인들을 보았는데 우리가 비교하니까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세상에 우리가 그들과 비교하니 메뚜기 같더라니까 상대가 되지 않아요. 메뚜기가 여러분 보고 이리와 한판 해보자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저히 상상을 그렇게 하니 감당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처자가 올라가면 반드시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라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잘 듣습니다.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말에 쉽게 동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모조리 혼비백산 했습니다. 고함을 치고 통곡을 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우리가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진이 혼돈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소식을 전할 때 부정적인 소식을 전하느냐 긍정적인 소식을 전하느냐가 이와 같이 중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같이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매 그 백성들을 안정시키며 우리 말도 들어보라. 우리 말도... 우리가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더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들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 그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들의 돕는 자는 떠났고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가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올라가자!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다 돌멩이를 들고서 이 두 사람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 보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쉽게 귀를 기울여 듣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아냥대고 듣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 포털에 들어가면 부정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어떠한 사업이나 국가나 무슨 한일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말을 많이 적어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읽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적어 놓으면 자기 선전한다고 합니다. 자기 잘나게 보이려고 긍정적인 말을 올렸다고 부정적인 말을 적어 놓으면 그렇겠지 그렇겠지 참말이겠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오늘날 정직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이후 죄악성이 마음 속에 들어와서 죄적인 것에 기울어지고 의로운 것에 기울어지지 않는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도 우리가 항상 주님 앞에 설 때 말씀으로 서야지 환경과 감각으로 서면 절대로 승리로운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서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만이 우리에게 참을 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짓이 많습니다. 거의 전부가 거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살아온 전통과 습관과 경험을 통해서 만물을 바라보면 잘못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의 결국에는 안된다 할 수 없다 못한다 나는 패배자라고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 위에 서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입으로 말하면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보고 말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마리아와 마르다

둘째로, 우리가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저 건너편에 예수님이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틀을 더 거하다가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는 곳에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와 보시니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해서 집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예수님께 뛰어와서 엎드려서 울면서 하는 말이 주님, 나흘 전에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도 대답을 안하고 아주 침통하게 보기에 겁이 났습니다. 말을 잘못했나 보다. 지금이라도 주님이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입니다. 실제는 안믿었어요. 그 말에 예수님이 대답했습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 부활의 날에 다시 살줄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이 그 말을 고쳤습니다. 내가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아멘 안했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예!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습니다.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감각적인 인간지식에 서 있어서 죽어서 나흘된 오라버니가 살겠다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을 하는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인간지식과 경험으로 거기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감각적인 삶의 갈등에서 헤매는 마르다와 마리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으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경험이나 감각이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하자니 견딜 수가 없고 안믿는다고 말하자니 주님 앞에 미안하고 그래서 중간 상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자꾸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동문서답을 하는 것입니다. 나흘전에 오셨으면 우리 오라버니가 안 죽었을 것입니다. 오라버니가 오늘 살리라. 예~ 부활의 날에 살 줄 믿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은 그리스도인 것을 믿습니다. 동문서답을 하고 예스와 노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스스로는 갈등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와는 다른 것이 많잖아요. 예를 들면 지구가 평평하게 보이지요? 여러분 눈으로 보아서 지구가 둥근 것 본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세요. 저는 70년이 넘게 살아도 지구가 둥근 것 한번도 못봤습니다. 지도책에는 봤지. 우리 사람의 눈으로는 지구가 평평하게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집을 떠나서 멀리 가지 마라.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영원히 죽는다. 지구가 평평하니까 어느 곳에 가서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육받은 사람치고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구는 우리가 보기에는 평평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둥급니다. 눈에 보는 것 하고 실상하고는 틀립니다. 또한 밤낮을 봅시다. 우리는 해가 떴다. 해가 진다. 그렇게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해가 왜 떠요? 해가 왜 져요? 해는 가만히 항성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혹성인 우리 지구가 해 주위를 돌므로 아침이 되고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뜬다 해가 진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해는 안뜨고 안집니다. 지구가 해 주위를 뜨고 지도록 돌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실과 실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다 현실인 것입니다. 현실은 거짓된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실상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참말입니다. 내 눈에 보는 것과 틀려도 하나님 말씀이 참말입니다. 내 귀에 들은 것과 틀려도 하나님 말씀은 참말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과 틀려도 하나님 말씀은 참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참말이고 그 외에는 다 거짓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말하고 그대로 행하면 두고보면 그것이 다 아름다운 결말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병들어 아프잖아요. 내 경험으로 내 느낌으로 병들어 아픕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현재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거짓말입니까? 나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우리가 느끼고 괴로워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럼 실상은 뭐냐. 저가 나았다는 것이 실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니까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실상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면 저것 완전히 미쳤다. 예수를 믿더니만 안보이고 못느끼고 못 체험한 것을 실제로 믿으니까 미쳤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가 끝장에 이깁니까? 실상이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 배후에 안 보이는 실상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거짓말 자꾸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거짓말 하는 것 아닙니다. 그 배후에 실상은 귀신이 붙잡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꾸 거짓말 하는 사람 마귀가 그를 붙잡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자꾸 도둑질 하는 사람 자기가 도둑질 하는 줄 아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그 마음 속에 도둑질하는 귀신이 들려 있어서 귀신에게 잡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거짓말도 안하게 되고 도둑질도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과 실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안믿는 사람들은 다 현실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체험하는 것 현실을 쫓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발전하지 못하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현실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실상을 보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믿는 사람보고 하나님 뭐라고 말합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내가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와서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상은 창조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 나라와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것 우연히 일어나고 있고 환경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는 우주를 창조하고 역사를 주장하는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 보이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못삽니다. 하나님께 잘보이면 아무리 어렵고 척박한 곳에 들어가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현실의 감각적인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실상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그러면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따라 살아야지 거짓을 따라 살면 발전하지 않습니다.

3. 예수님의 단호한 요구

오늘 셋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단호히 요구한 것은 실상인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으라.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천치같이 보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비웃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 실상이기 때문에 말씀을 믿으라.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로 44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실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돌을 옮겨 놓으라.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는 죽은 자의 눈인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현실이 죽은 자가 나흘이 되면 냄새가 나는데요. 현실입니다. 마르다에게는 그것 참말이지요. 죽어서 나흘이 되니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을 가지고서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참 결정하기 힘듭니다.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께서 실상을 믿으라고 하니 우리가 그렇게 하기가 힘들잖아요.

오늘 예수 믿어도 현실을 따라 믿고 실상인 하나님 말씀의 기적을 안 믿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예수 믿는다고 해도 현실을 따라서 다 생각하고 해석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순복음교회 교인들은 현실보다도 실상을 믿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할 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주님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는가 그것을 찾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 뭐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깨달아 알고 믿고 나가면 말씀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현실의 절망에 허덕이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현실이 처참한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으려고 해도 못믿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고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불쌍했어요. 우리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면 절단입니다. 예수님이 믿으라. 안믿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믿자니 경험이 없고 안믿자니 문제가 해결안되고...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중간에 서서 이러쿵 저러쿵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좋아서 웃어야 되실 것인데 슬퍼서 우시는 것은 우리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본주의적인 믿음이냐, 인본주의적인 감각이냐를 두고 예수님하고 마르다하고 이제는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보시고 돌을 옮겨 놓아라. 옮겨 놓아라. 믿음으로 옮겨 놓아라. 실상을 따라 옮겨 놓아라.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니 못 옮겨 놓겠습니다. 현실이 이런데 현실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변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와가지고서 마르다야, 네가 옳다. 예수님 돌았어. 돌았어.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돌문을 옮겨 놓으라는 것은 정신 이상자다. 네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교육받고 올바른 사람이다. 옮겨 놓지 말아라. 옳겨 놓지 말아라. 그러니 예수님과 마르다가 밀고 당기고 씨름이 붙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이 여러분과 씨름할 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보고 믿으라. 주님 못 믿겠습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그래도 사람들이 다 비웃고 내 마음도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가 의심을 가진 것을 주님께서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다 실상을 받아들이려면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의심을 택하지 말고 믿음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 안 생기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 말씀하는데 여러분이 마음에 받아들이고 아멘! 믿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또 안 믿습니다. 안 아멘 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중인격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강요를 하는 것은 의심을 선택하지 말고 믿음을 선택하라. 현실을 선택하지 말고 실상을 선택하라. 그렇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기에 마르다를 보고 벽력같이 화를 냈습니까?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을 안보는 것이 아니냐.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을 해주셔도 현실을 바라보고 실상을 믿지 아니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오라버니는 영영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인생에 마르다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 나사로가 많이 있지요? 여러분의 나사로,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우리로써 도저히 취급할 수 없는 문제 현실을 보면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포기하지 말고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아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현실에 희망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절망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돼요. 믿음으로 행해야 돼요.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만한 보증이 어디 있습니까? 천지가 무너져도 예수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구요.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게 주장했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 속에 의심이 항상 따랐습니다. 영혼을 믿음에 비유한다면 영혼의 집인 육체는 의심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항상 있고 그 속에 영혼이 있고 분리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처럼 항상 의심이 있고 그 안에 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르다말고 영혼을 따르는 것처럼 의심을 따르지 말고 믿음을 따르면 여러분 믿는 자인 것입니다. 의심을 따르면 안 믿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께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거든 의심을 택하지 말고 믿음을 택하고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하면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해야 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보는 것처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 믿고 의인된 우리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환경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실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좋은 하나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믿음의 삶에는 의심과의 씨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과 씨름을 해야 돼요. 씨름을 하고 의심을 따라 뒤로 물러가느냐. 믿음을 따라 앞으로 나가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완전한 믿음이란 실제로 없습니다. 오직 어느 편을 택하여 그것을 꿈꾸고 믿고 시인하며 나가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것을 택해서 안 되는 것을 꿈꾸고 불신앙하고 안된다. 못한다. 못산다고 하면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여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또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과 실상 두 사이에 끼어서 삽니다. 현실은 매일같이 접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감각과 우리의 지성과 이성과 경험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인 것입니다.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가 도저히 인간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안 보이는 데 하나님 계시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안 봤으니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이 참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현실은 우리가 못보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그것을 믿으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우리가 상속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은 현실은 죽었다. 장사지냈으니 이제는 영혼이 사라졌다. 실상은 뭐라고 말합니까? 천국 아니면 지옥 중 한곳으로 갔다.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으면 지옥으로 갔다. 실상은 그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여러분 인생을 사는데 느낌으로 살지 마십시오. 인간의 지식으로 살지 마십시오. 감각에 의지해서 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말한다고 따라가지 마십시오. 말씀이 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고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거짓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이 지어졌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바 된 것입니다. 말씀은 안보이지만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병낫는다는 것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것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 실상입니다. 안보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실상이요 믿으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현실에만 따라 삽니다. 현재 주어진 현실 밖에 없고 더 앞으로 향상하고 발전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실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실상이 옷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그것이 옷입고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실상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뗍니다. 성찬은 여러분이 볼 때 이것은 빵조각이고 이것은 포도즙이구나. 그것은 실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용이지요. 실상은 뭡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다. 이를 먹고 마시므로 죄사함을 받는다. 이를 먹고 마시므로 성령 받는다. 이를 먹고 마시므로 저주에서 해방되고 이를 먹고 마시므로 병에서 고침받고 이를 먹고 마시므로 천국 시민이 된다. 그것을 아는 것은 실상입니다. 실상을 알고 성찬을 대해야 의미가 있지 이것 빵조각이고 이것은 포도즙이다. 그냥 빵조각 꾹꾹 씹어 먹고 포도즙이라고 쑥 마시고 좀 더 먹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무 발전도 없고 변화도 안 다가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 내용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면 실상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실상을 잡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항상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고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 기도 드리겠습니다.

/ 2011. 8. 7. 성찬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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