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가 한반도를 향하여 북상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실 나는 또 일본이나 중국 쪽으로 휘어가겠지, 하며 심드렁했었다. 태풍 루사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건, 텔레비전을 거의 시청하지 않는 필자의 라이프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제 비와 바람에 대해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장마철엔 정작 두어번 비가 뿌리고 말더니, 장마 이후에 장마보다 더 지독한 폭우가 쏟아지기 일쑤였으니, 태풍이 올라온다고 했을 때, 난 그저 또 지겨운 비로구나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2.
형님네 집에 놀러갔다가 그제서야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뉴스화면을 보면서,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근데 더 놀란 것은 태풍 루사가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곳이 바로 필자의 고향이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었다. 큰일이다 싶어, 전화를 하려는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고향사정부터 물었는데, 과연 사정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전화로는 어지간해서는 속사정을 이야기하시지 않는 분이신 데, 빗물과 바람에 쓰러진 벼며, 바람에 날아간 축사며, 간신히 얹혀있던 지붕이 떨어져 나간거며, 이제 막 입추의 따가운 햇살에 익어갈 감이 죄다 우수수 떨어져버렸단다. 빗물이 방안으로 쳐들어오고, 골목길의 담이 무너지고 정전사태에 촛불도 켜놓을 수 없는 상황 등등 뭐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향집은 그나마 지대가 높고 앞뒤에 바람을 막아주는 산등성이 때문에 피해가 소소한 축에 속했다. 저지대의 주민들은 방안까지 물이 차오르고, 가축들이 떠내려가고, 집안가재도구난 죄다 빗물에 젖어버리고, 먹을 식량마저도 다 젖어버려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단다. 처음엔 어찌하든지 수습을 해보려던 사람들이 마침내 두 손을 놓고 멍하니 허공만 쳐다 보더란다.
3.
이틀동안 한반도를 할퀴고 간 루사는 9월4일 현재 사망 141명, 실종 79명 등 모두 220명에 재산피해가 2조3800여억원의 기록적인 피해액수를 남기고 사라졌다. 아폴로 눈병 등 전염병도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어려울 때에 힘을 발휘하는 국민성은 이번에도 저력을 발휘했다. 여기저기서 수해복구를 위한 의연금이 적지 않게 모금되고 있고 이러한 국민의 열의에 발맞춰 정부도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수해복구에 나설 거라는 발표를 했다.
유독이 고난과 핍박의 시대를 끈끈이 버텨왔던 우리 민족이기에 가끔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천형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우리됨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조선이 건국된 이래 반만년이 지난 오늘까지 태평성대는 우리 민족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도 같다. 늘 고난과 핍박에 투쟁했으며, 또 늘 이겨왔던 우리민족.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어쩌면 이런 민족이어서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시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광했던 수많은 이 땅의 백성들이 축제기간만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 위기의 시대에도 공동체임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마치 저주처럼 불어닥치는 비바람에 떠내려가는 집을 보고서도 어쩌지 못하는 "낮은자"의 절망의 극한. 그 고난에 동참하자.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와 함께 할수록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 조금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내가 섬길 예수님이 안계시나 살펴볼 일이다.
이대훈(소설가.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