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장로교만도 수 백개의 교단이 난장판처럼 즐비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교단들이 소유하고 있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몇 개의 신문사들과 초교파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몇 개의 신문사들과 방송사들 가운데, 진정으로 기독인의 바른 양심을 비추어 주고, 건강한 기독인의 의식을 일깨워 주는 언론사들은 얼마나 있을까?
아직까지도 교단소유의 신문사들은 과거 군부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교단의 사건이나 행사를 보도하고 소속 교단의 치적을 부풀려 과시하는 보도관행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지면구성은 읽고 싶은 생각을 처음부터 제거하게 만드는 어려운 틀로 짜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반 기독인들의 삶과 괴리된 교리적인 가르침을 지면에 다루고 있어 정작 읽어야 될 기독교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인터넷 통신망이 도서지방과 산간지방까지 조밀한 그물망처럼 안간 곳이 없을 정도로 넓게 펴져 있어 전세계 언론들로부터 '통신강국'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인터넷이 생활화된 우리 나라에서 조차 유독 기독언론사들의 홈페이지는 성도들로부터 외면 당하기에 딱 알맞게 운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기게 된 원인은 기독언론사들의 재정 상태가 매우 약하고, 기독언론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턱없이 부족하여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구조적인 원인만이 일련의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볼 수만은 없다. 성도들에게 '돈주고 교계 신문을 사서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문이 가져다 주는 정보가 성도들의 일반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기관의 소식지 수준쯤으로 전락한 기독저널리즘의 공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자의 사명은 사실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다수의 교계신문들은 사실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교계에서 발생한 부끄러운 일들을 보도하기를 겁내지 않고 심층적으로 취재하여 일반 성도들에게 알려서 일반성도들이 그 사건을 교훈을 삼아 교회가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의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를 제시해주는 언론사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공격받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교회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나, 정보가 이미 경쟁력이 된 현시점에서 숨길 수 있는 비밀이나 치부가 얼마나 될 것인가? 불신자들도 교회에서 어떤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교회 다니는 성도들만이 교회가 잘못 행하고 있는 일들을 불신자들 보다 더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교계신문에서는 그런 기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교계기자들에게 교회의 치부만을 들어내어 심층적으로 취재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발로 뛰고 취재하며 자료들을 철저히 분석하여 성도들에게 알려 달라는 것이다. 교계신문이 일부 대형교회의 소식지거나 목사들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편집방향으로 신문을 찍어낸다면,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교계신문이 설자리는 더욱 좁아 질 것이다. 어쩌면, 교계신문은 '신문'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어 낼 날이 올 수도 있음을 직감으로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생활화된 지금도 활자로 인쇄된 오프라인 신문을 찾지 않는 판국에 일반 성도들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신문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면, 필자의 직감이 틀리다고 반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온전한 성도라면 교회에서 설교말씀을 통해서나 소그룹 또는 개인 성경공부를 통해 깨달은 교훈들을 실생활에서 적용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세상에서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할 때 그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다 말해 줄 수 없는 난해하고 처신하기 어려운 점들이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이런 난점들을 누가 해결 해 줄 것인가? 교회가 실생활에 잘 맞아떨어지는 선이 분명하고 굵은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잘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계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교계신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온전히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자리와 그런 곳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 달라는 것이다.
교계언론기자의 또 다른 사명은 교계지도자와 성도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일반언론의 기자들이 국민의 알권릴 충족해주고 국민들에게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며 사건의 진의를 밝혀 줌으로써 국민들과 정부사이에 가교를 만들어 주듯이 교계언론 기자들도 교계 지도자와 일반성도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계 언론들은 교계 지도자들의 활동과 치적을 치하하는 기사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 있는 지면도 잡다한 소식들로 할애해 버리고 만다. 교계언론 대부분이 일주일에 한번 발행하고 있는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일반 성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건전한 교계여론을 형성할 만한 논제를 제시하는 배려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런 원인 하나만으로도 교계언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좁고, 메말라 있는지 분석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의 방식대로 앞으로도 걸어간다면, 그 어느 누구도 교계언론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루속히 독자들을 배려하고 신문을 직접 구입해서 읽는 독자들을 중심으로 교계언론이 변화되어야만 지금의 명맥을 그나마 유지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계언론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구습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일반 성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사를 써 달라는 것과 소수의 교계지도자들만을 위한 신문이 아닌 진정한 기독여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독자중심의 신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일반성도들의 참여의 폭이 넓으면 그만큼 독자층도 자연히 확대 될 것이고, 건전한 여론문화도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앙일간지들이 독자들에게 할애하고 있는 지면만큼이라도 일반성도들에게 할애 해 준다면, 교계언론사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훨씬 덜어 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단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우리 나라 굴지의 교단들은 과감한 재정투입과 함께 일반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정보를 발로 뛰며 취재할 기자들을 더욱 확충할 뿐만 아니라, 자기소신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도록 편집권을 일반 평기자들에게 많은 부분 이임해야 할 것이다. 교계언론사들이 진정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얼마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며 독자중심의 기사와 지면을 만들어 가느냐와 달려 있는 것이다.
주성진(기윤실 문화소비자운동본부 정책간사 / gidohasey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