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난 시대에 인권을 말할 때, 상당히 소극적인 방법으로 '인권'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갇혔다든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든가, 고문이나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인권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즉 인권이 침해당했을 때 그것을 지켜내는 개념으로 인권을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침해의 사례가 줄어들면 인권이 잘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권이 침해당했을 때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아주 지극히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인권지킴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 자체뿐만이 아니고 그가 속해있는 주변환경, 양식, 그의 노동,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가 갖추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인간의 창조가 완료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인권을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 안에서 돈권은 있는데 인권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맘몬, 돈의 힘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인권이라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인권, 즉 사람으로서 꼭 누려야 할 권리라면 인간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의 권리일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물론 먹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먹는 권리가 확립되어 있습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주머니에 먹거리와 바꿀 돈이 없다면 그림의 떡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그의 생의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먹을 권리,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의 원리이지만 돈의 권리 아래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법은 다릅니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된다"(신명기 23,24-25)
남에 밭에 들어가 낫으로 베어 나오거나 그릇에 담아오면 절도에 해당하지만 배고픈 사람이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곡식에 대하여 아주 혁명적인 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그것과 함께 배고픈 사람은 어느 밭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려는 목적이면 가능하다는 권리, 즉 이 세상의 곡식은 배고픈 사람, 그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혁명적 발상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의 권리를 생각할 때, 그것을 사회적으로 소유한 사람의 권리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원칙이지요. 그러나 이런 소유권의 개념, 이것은 이차적인 권리이고 사회적인 권리이지만 인간이 물질에 대해 가지는 "필요!" 이것은 보다 일차적이고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소유의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가지는 필요에 따라 모든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필요라는 것은 보다 일차적인 동기이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그것보다 먼저 앞서서 내가 무엇 때문에 소유하려고 하는가하는 '본래적 필요'에 대한 면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단지 음식뿐만 아니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권리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이고 인간이 살만한 쾌적한 환경, 자기실현의 과정으로서의 노동의 장, 그의 공동체, 종교적 신앙 등이 보장되는 것이 모두 총체적으로 인권의 요소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내용입니다.
지나간 시대가 소극적 의미에서의 인권지킴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이런 적극적인 의미의 인권지킴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배고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권리는 물론이고, 그 다음 시급한 것이 주거권일 것입니다. 사랑스런 가정을 꾸려 갈 수 있는 공간, 먹고, 잠자고,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인간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비닐하우스 촌을 비롯해서 주소지조차 주어지지 않아 모든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는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 인간적인 모욕과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근본은 한줌의 내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먹는 조건조차 충족하기 매우 힘든 빈민으로서는 거액에 이르는 부동산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주거권은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면서도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주거권"이란 이름조차도 생소한 이름일 뿐입니다.
이제는 인권에 대하여 어떤 침해를 입었을 때 방어하는 수단으로만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제반의 권리들, 생존권, 주거권, 환경권등 적극적인 의미에서 말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총체성이 복구되지 않고 동떨어진 인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인권을 이렇게 구체적인 인간의 권리, 의식주....등등의 권리로서 이해할 때 지극히 인권이 물화되기 쉽습니다. 인권을 말할 때, 그것을 마땅히 누릴 수 있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이 필요하고 기본 요소가 되지만 그것 자체가 완결구조이거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들을 넘치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이 보장되고 인권이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권이란 우리 주변에 함께 기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요 사람의 가슴에 필요한 것들을 서로 헤아리고 충족해주고 노력해 가는 과정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는 목표들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 인권이고, 그런 목표를 함께 찾아가는 감격이 인권이고, 그런 목표가 우리의 현실과 너무 아득하게 느껴질 때 함께 우는 것이 인권이며, 우리 앞을 가로막는 큰 적 앞에서 또는 맞서 대항하고, 또는 부딪혀 절망하는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는 따듯함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인권입니다. 그러기에 인권은 물질적인 것은 아니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함께 가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김경호 목사(강남향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