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장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맥(잣대)에 의한 번역:
‘나의 형제들아 너희들에게 가서 적용하기 위하여 나의 마음 안에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많은 발자국들을 내가 쌓아 올렸다는 것을 너희들로 내가 거부당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오직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짐을 지고 사역을 하는 백성들 안에서처럼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인 너희들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증거를 나의 나눔에서 그(증거)가 스스로 숨겨두어 막은 것이니라’
한글 번역 중에 ‘여러 번’,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다른’,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는 번역상 오류다. 하나님의 잣대에 의하여 번역을 하지 않고 현상적인 문자적 개념으로 번역을 하였기 때문에, 번역상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의 생명을 배워서 길들이는 형제들아’라고 전제하고 있다. 기독교에 생명의 개념이 올바르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목숨을 생명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부활을 목숨이 부활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어찌하여 기독교 안에 이러한 불행한 일이 존재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핵심이 십자가에서 죽고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인데, 이 개념이 올바르고 확실하게 세워지지 않은 기독교라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생명으로 부활되는 개념이 불확실하다면, 구원에 대한 개념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방 종교에도 똑같이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문자대로 해석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도 현상적인 것으로, 생명의 부활도 현상적인 것으로, 구원도 현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왕국도 현상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용들은 영적인 일들인데, 현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을 잘못하게 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혼돈 속에서 믿음 없는 행위들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한다.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어두움인 무지가 가득 차 있다. 인간의 목숨은 혈과 육으로 유한한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의 잣대인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첫째 시기, 둘째 시기, 셋째 시기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배움으로 넷째 시기, 다섯째 시기, 여섯째 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 넘겨받아서, 하나로 동침을 하여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반복을 거듭해가면서 적용시켜 나가고 익혀감으로 깨트려 죽일 때 생명으로 부활을 하게 된다.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의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은 수식어를 쓰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배워서 무지를 죽여 나가는 것이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끼리도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혈과 육으로 태어난 형제·자매라는 개념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의 한 피, 한 몸, 자궁은 어디를 말하는가? 하나님의 잣대인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가 자궁이다. 이 자궁에서 한 피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한 몸을 이루어 간다. 사도 바울은 “나는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마음땅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해서 죽이고 생명의 부활을 한 발자취들을 쌓아올린 자인데, 이것을 너희들에게 적용시켜 주기 위해 너희들에게 가고자 하였다는 것을 너희들이 부정을 하거나 모르고 있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어두움인 무지를 고난을 통해 죽이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인 하나님의 잣대의 짐을 지고 어두움인 무지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죽여서 생명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과 같이 너희들에게도 죽고 부활하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데 이르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내가 가고자 하였으나, 죽고 생명의 부활을 한 발자국들의 증거가 숨겨져서 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굉장히 겸손한 말이다. 자신을 증거로 나타내 보여 주고 싶지만, 보여주고 난 다음에 자신이 교만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왜 믿는가? 물론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어떻게 받으며, 천국은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대답이 먼저 나와야 한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어두움인 무지의 마음땅을 갈아엎어서 본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계몽하고 죽여서, 생명의 부활을 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받아서 완성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개념이 세워지지 않고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행위는 하나님의 잣대가 아니고 사람의 잣대다.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아니고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다. 목숨이 죽고 목숨이 부활되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인 무지가 죽어야 생명으로 부활된다.
서균석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교회(통합) 담임목사 은퇴
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문의: 010-3728-0245
홈페이지: http://www.koreahebr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