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펴낸 박영식 교수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기독 출판계에서도 관련 도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 박영식 교수(서울신대)는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를 부제로 한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를 펴냈다. 평소 고통과 신정론 문제 등을 연구해 온 저자는, 책을 통해 ‘애통하는 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교회와 신학이 그들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말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본지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박 교수와 인터뷰했다.
-세월호 1주기입니다. ‘섣불리 위로하기보다 함께 아파하라’고 하셨지만, 유가족들에게 먼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위로’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사실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께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못해 죄송하고 미안할 뿐입니다. 잊진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도 죄송하네요. 그래요.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 먼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도 잊지 않았습니다. 설령 눈에 안 보여도 함께하며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책 부제에 나온, ‘세월호’가 남긴 기독교 신앙의 과제는 무엇인가요.
“세월호 참사는 ‘신앙이 반드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거울’이라는 질문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보듯,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기독교 신앙이 고백해 왔던 주제들을 지금처럼 안일하게 내뱉어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 지금까지 익숙했던 주제들, 즉 섭리와 전능, 예정, 하나님, 구원, 교회와 성례전까지, 철저히 되짚어 봐야 합니다. 성서와 전통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현실이 중요한 신학의 파트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제 기독교는 ‘자폐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세상 일에 귀 막고 눈 감고 성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세상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신앙은 자폐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성서와 현실, 이 둘을 부단히 바장이면서 ‘우리 시대’의 신앙 좌표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하나님은 그날 ‘거기에’ 계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지요. 하지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날 거기 계셨다는 고백은,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되물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거기 계셨다면, 그들의 아픔에 나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은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그 곳에 우리도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 분명해지겠지요.”
-책을 쓰신 동기가 세월호와 함께 작년 ‘하나님의 뜻’ 논란이었는데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성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것도, 거룩한 삶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중에서 ‘살아라!’ 하신 창조명령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으로 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예수님도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즉, 참으로 살아 있는 삶, 의미가 충만한 삶, 생명이 충만한 삶,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떤 일에 ‘주어진 어떤 특정한 의도’로 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하는 것인지 저렇게 하는 것인지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의 뜻’으로 떠넘기려는 듯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숙명론적인 삶으로 기울어집니다.
아닙니다. ‘이것 저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볼 때 하나님의 뜻은, 찬송가에도 있듯, ‘뜻 없이 무릎 꿇거나 운명에 붙들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살아내야 하는, 쟁취하고 성취해야 하는 바로 그 생명의 삶입니다.”
-신앙인들이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릴 경우 ‘내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인들이 사업의 실패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금세 ‘인과응보의 신앙’으로 후퇴해 버립니다. 문제에 맞서기보다 금방 주눅 들곤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죄책감에 휩싸이기보다, 당당하게 고난에 맞서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모든 일을 징벌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당당하게 맞서고 따져야 합니다. 시편의 시인들처럼 말이죠.”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질문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책은 사실 기존의 신앙 이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의문은 세월호와 함께 우리 모두가 던지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보다 철저하게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루터나 칼빈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에게 우리 시대의 질문을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이 더 이상 우리 시대엔 적실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신앙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들이 대답하지 못했던 그 질문을 우리가 끌어안고 우리 자신이 대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신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시대의 질문과 함께 질문하고, 그 질문을 통해 과거의 신학사를 하나의 문제사로 읽어나가고 새로운 해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서의 신학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정론(神正論)’과 ‘예정론(豫定論)’일텐데, 이에 대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모든 주제는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정론이든 예정론이든 그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벗어던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건 신앙과 무관한 사변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시는 동시에 책임을 주셨다고 봅니다. 이 땅에 대한, 그리고 우리 이웃에 대한 책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맡기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덕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삶의 책임을 짊어질 용기를 가진다면 좋겠습니다.”
-책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21세기 오늘의 ‘전능하심’은 전통적 해석과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네. 전능을 우리는 통속적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한다’는 도깨비 방망이식 ‘만능’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성서적·신학적 의미의 ‘전능’을 이런 통속적 의미의 ‘만능’과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만능’은 기독교 신앙 이전 그리스·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와 연결돼 있다고 보입니다.
책에 서술하지 않았지만, 구약성서의 ‘엘 샤따이’를 70인역은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전능이라 번역했고, 그 의미를 만능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엘 샤따이’가 과연 오늘날 통속적 ‘만능’이냐 하는 데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우리는 ‘전능’을 ‘슈퍼맨식 초능력’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우리는 전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우선 ‘아버지’로서의 전능입니다. 나아가 이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전능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조차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무한한 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힘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전능은 ‘우리를 위해 약해질 수 있는 힘’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꼬마 아들과 놀기 위해 자신의 힘을 빼듯 말이지요. 모두가 전능을 외치며 힘과 폭력을 과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신앙을 통해 약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고 품어 주실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전능입니다.
또 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고백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원의 힘’에 대한 고백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를 건져내실 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고백과 연관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의 극복과 연관됩니다. 이런 부분들은 이미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 오래 전부터 내재해 있었습니다. 다만, 오늘날엔 강조점을 보다 명확하게 한 것이지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이에 대해 언급할 텐데요, 이러한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할 때 유의할 사항이 있을까요.
“고통의 문제를 설교할 때, 저는 가르치려는 자세보다 ‘고통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했으면 합니다. 고통을 객관적으로 논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제3자의 입장에서 말해지는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관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에 고통과 악의 원인이 무엇인지,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풀어가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신학교 강의 시간에 하는 일입니다. 강단에서는 일단 고통당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다.
감히 몇 마디 덧붙이면, 그러기 위해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제발 ‘회개하라!’,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는 것도,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논란은 신학과 설교가 제 역할을 못한 때문이라 볼 수 있을까요.
“네. 저는 설교에 신학이 부재하다는 것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학자는 아니지만, 제가 볼 때 설교의 테크닉에 집중할 것이 아닙니다. 최첨단 장비를 갖춘, 수사학적으로 깔끔한 설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학이 부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말하는 신학은 앞에서 말한 ‘질문’의 신학이며, ‘우리 시대’의 신학입니다. 고뇌하고 고민한 흔적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에게 가르치려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 스스로가 듣는 설교, 함께 고뇌하는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들은 반드시 한 달에 적어도 한 권 이상 신학서적을 읽었으면 합니다. 신앙서적이 아니라 신학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감성적 터치도 필요하지만, 신학적 방향 설정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정말 좋은 신학자, 훌륭한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데, 교회가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독일교회는 주중에 신학강좌가 많이 개설됩니다. 신학자와 설교자가 함께 성장해 갑니다. 참 부럽습니다. 신학을 통해 성서와 시대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말주변이 없어도 진솔하고 정직한 설교, 신학적으로 올곧은 설교에 사람들은 귀를 열고 마음을 엽니다.”
-유독 ‘세월호’ 이후 사회나 교회에서 이러한 논의가 무성한 까닭이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세월호는 감춰진 사건이 아니라 모두의 눈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듯 세월호 참사는 매스컴을 통해 온 국민에게 보였고, 마음에 각인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도 보았고, 서로에 대한 우정과 의리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도 보았고, 언론의 거짓도 보았습니다. 자본에 굴복당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도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지요. 우리 시대가, 우리 자신이 발가벗겨진 것입니다.
누군가 나서서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을 찾기도 어려웠지요. 교회와 신학이 해야 할 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동어반복이나 독백으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보았기 때문에, 기존의 신학은 무의미한 말이 돼 버렸지요. 우리는 새로운 언어와 행동방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2002년 월드컵을 보여주는데요. 그때 그 감격이 다시 살아나지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계속되는 질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탐욕과 거짓과 무능이 벌거벗은 채 폭로된 사건, 눈을 감을 순 있지만 잊을 순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2천 년 지난 지금도 기억하듯, 그리고 그 위험한 기억이 새로운 삶을 개방하듯, 세월호 참사도 우리 시대 신앙인들에게 그렇게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고통의 문제’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계속돼 왔습니다. 특히 지척에 있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나 인권 유린에 대해 ‘세월호’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간과할 순 없습니다. 이미 한국교회에서 이런 부분에 많은 분들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목소리만 높여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역시 ‘공감’입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 서로에 대한 불신을 허무는 일,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거나 위협하는 일에 단호히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 북한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 동포들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서적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굉장히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오늘날 세월호 참사가 이토록 사회적·정치적 이슈가 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결국 아파하는 분들을 충분히 위로하고 감싸안지 못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놀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진정 사랑할 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들 제 살 길이 급한 사회가 된 것이지요.
진정으로 눈물을 함께 흘리며 닦아주는 일이 필요한데, 정부가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회와 종교·시민단체가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저부터 회개합니다. 돌아보지 못해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유가족과 살아남은 모든 분들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