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양성 독재’, 좀 적당히 하시죠!
2022 교육과정 개정 시안 속 ‘다양성’, 이념적
문화적 다양성 강제하면, 사고의 다양성 해쳐
다양성 독재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게 해야
◈서론
올해 말 통과되면 향후 7년간 시행될 2022년 교육과정 개정 시안(행정예고본) 내용은 ‘다양성’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다. 교육의 전체적인 방향을 논하는 ‘총론’ 파일을 교육부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다양’이란 키워드로 검색하면, 전체 57페이지 문서에서 47회나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검색 결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중 다양한 평가 방법, 다양한 기회 제공 등 이념적 색채가 없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 32개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15개의 이념적 색채가 강한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남는다.
각론으로 가면 더 심각하다. 도덕 교과의 성취기준에는 ‘다양한 가족(동성애 부모를 둔 가족)’ [2바01-03], ‘문화의 다양성’ [12현윤05-03], ‘의견의 불일치는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원천’ [12인윤04-01]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도덕 교과는 사회구조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영어 교과의 성취 기준에서도 다양성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문화 정체성, 언어 및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어과 교육과정 별책 14, 5면], ‘다양한 생각과 정서가 반영된 문화를 경험하고’ [34면], ‘다양한 문화와 관련된 말이나 글을 이해하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적 태도’ [35면], ‘다양한 문화와 관련된 말이나 글을 이해’ [35면] ‘우리 문화 및 타 문화의 다양한 관점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 [77면] 등의 내용이 아이들의 영어 성적을 평가하는 시험의 기준으로 설정된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다름을 존중’ [53면], ‘배려와 관용’ [53면] 등 유사 단어까지 고려하면, 다양성이라는 단어는 영어 교과과정의 목표 전반을 정의하는 핵심 주제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중·고 영어 교과서 텍스트 중 영미권 문화를 이해해야만 해석될 수 있는 지문이 그리 많은가? 영어라는 언어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영어 과목이야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영미권 국가의 언어이니 이해할 수 있다 치자. 그러면 국어 과목은 어떨까? ‘다양한 삶의 방식 이해하기’ [12독토01-04]라는 용어가 정말 국어 교과의 성취 기준에 정말 필요한 것일까? 국어 교과에도 ‘다문화’라는 단어는 전체 문서에서 20회 등장하며, 교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이라는 단어는 17회나 등장한다.
심지어 체육 과목에조차 ‘여러 가지 스포츠 형식들에 대하여 국가, 인종, 성별 등 다양한 문화의 가치를 이해하고’ [9체02-22],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도록’ [6체03-08] 등의 내용이 발견된다. 이 외에 ‘생태적 가치’ 등 정치 이념을 내포하는 단어의 수까지 고려하면, 체육 과목이 언제부터 사상과 이념을 교육하는 과목이 되었는지 놀랄 지경이다.
교과 과목 종류는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교과목이 암기력 향상만을 목표로 한다는 비판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최소한 교과서 내용만큼은 서로 달랐다. 그런데 이 정도면 교과과정 전체가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이념을 주입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는 다문화사회인가?
우리나라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이미 매우 일반화되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라고 믿는 사람의 비중은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높다.
개인 미디어에서 외국인들의 한국 음식을 체험한 후 소위 ‘반응’ 영상을 올리면 조회 수가 매우 높다. 특히 개인 미디어에 노출 빈도가 높은 젊은 세대는 다문화사회에 대한 개방성이 기성세대보다 더 높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도덕 교과 성취기준 [9도03-02]에는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일까?
과거에 비해 인종이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과거 상황과 비교하여 증가하였을 뿐, 세계적 기준을 고려하면 외국인의 국적 취득 비중은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연평균 시민권 취득자의 수는 대략 80만 명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연평균 1만 명을 조금 웃돈다. 인구 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미국은 신규 국적 취득자의 수가 우리보다 약 12배 높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외국인 주민 수는 214만 4,569명으로 전체 인구의 4퍼센트 수준이다. 이 중 대한민국 국적 취득자는 0.4퍼센트인 21만 880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 개정 교과과정은 심지어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공동체마다 언어, 음식, 놀이 등을 종합한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2바02-03]라고 가르치려 한다.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이 성취 기준은 사실상 다양성의 본질적 의미를 재정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문화의 다양성이라 함은 개인주의적 자유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각자가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다양성이다. 다원주의(pluralism)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다원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논리적 결과(corollary)일 뿐이다.
그런데 다양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위의 내용과 같이 ‘정의’해 버리면, 개인의 자유는 심각하게 억압될 수밖에 없다. 0.4퍼센트에 불과한 신규 국적 취득자의 문화를 반영하고 종합하기 위해 반만 년간 유지해 온 우리 고유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다양성을 해치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나라 국적 취득자의 비중은 같은 한자 문화권 출신 중국인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2019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65명 중 33명이 중국 출신이다(2019년 1월 22일자, 서울신문). 게다가 이들 중 다수는 우리말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교포들이며, 따라서 이들의 문화 역시 우리 고유문화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 저들의 문화가 있다면,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약 70여 년간 형성되어 온‘공산주의’ 문화뿐이다. 저 교과과정의 성취 기준은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다양성은 바람직한가?
‘다문화’라는 용어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이념이 배어 있는 학문적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다문화주의는 “민족마다 다른 다양한 문화나 언어를 단일의 문화나 언어로 동화시키지 않고 공존시켜 서로 승인·존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운동·정책을 말한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학계에서는 다문화주의가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나, 실제로 다문화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민으로 설립된 미국 역시 다문화주의 반대의미인 ‘동화주의(assimilationism)’에 기반해 이민정책을 운영한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미국 고유의 역사와 정치제도 등에 대한 간단한 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미국의 헌법적 가치에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마쳐야 한다.
다양성은 항상 바람직한가? 만일 그러하다면 아이들에게 억지로 교육해서라도 사회의 다양성 증진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인지, 우리 도덕 교과의 성취 기준에서는 ‘의견의 불일치는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알고’ [12인윤04-01]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가만. 조금 헷갈린다.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니, 의견의 불일치를 조장하자는 말인가? 발전, 창의성과 같은 단어가 들어갈 자리 아닌가? 다양성이 대체 왜? 다양성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어떤 분야 전문가가 다양성을 교과과정의 성취 기준으로 정했는지 몰라도, 최소한 조직 운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매우 다르다.
미국 명문사학인 라이스 대학 경영학 교수인 반 니펜버그(Van Knippenberg)는 2004년 연구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를 의미하는 정보/기능 다양성(informational/functional diversity)은 집단의 성과에 도움을 줄지 몰라도, 성별, 연령, 문화적 배경 등이 다른 경우를 의미하는 사회적 범주 다양성(social category diversity)은 성과를 저해할 뿐 아니라, 정보/기능 다양성의 긍정적 효과마저도 상쇄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되는 이야기이지만, 끝까지 우기는 사람들을 위해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보자.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인간은 늘 어떤 기대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이 기대를 심리학에서는 ‘인지 도식(schema)’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것은 시나리오의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당에 들어가면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를 안다. 빈 테이블 중 아무 곳이나 선택하여 앉은 후 손을 들거나 큰소리로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한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카운터로 가서 식대를 지불하고 떠난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나와 지정된 테이블로 안내한다. 큰소리로 종업원을 부르는 것은 종업원에게나 다른 손님에게나 실례이다. 식대를 계산할 때도 종업원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요청해야 하며, 계산 전에 테이블을 떠나면 무전취식자로 오해받기 쉽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공유되는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는 타인의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케 하여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준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미국 식당을 방문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한국 문화에 따라 아무 테이블이나 빈 곳을 찾아 앉으려 하면, 종업원에게 제지를 받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경험을 한 한국인은 정서적으로 위축돼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식당을 방문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미미한 정도일지 몰라도 사람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주는 것이 문화 차이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과연 갓 국적을 취득한 0.4퍼센트의 외국인을 위하여 이 심리적 불안감을 감내하고 살아야 할까? 다문화주의에 따르면 그래야만 한다.
특정 가치관의 경우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내용이라 많은 이들이 불편하더라도 사회 정의를 위해 따라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면 다문화주의는 과연 이러한 종류의 절대적 정의인가?
◈결론
2022년 교과과정에 나타난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다분히 이념적이다. 이 단어의 빈도 수를 보면 가히 다양성 ‘독재’라 할 만하다. 문화적 다양성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위의 예처럼 인간의 본성이지만, 어떤 학생의 경우 남들보다 특히 더 불편해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포괄적 성격유형인 BIG5 모형 중 다섯 번째는 개방성(openness)이다. 개방성이 낮은 사람은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개인 성격이 후천적으로 학습될 수 없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심리학자 다수가 동의한다. 개인의 선천적 성향에 따라 교육과정 내용을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는 폐기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누구는 교육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지능이 선천적으로 다르더라도 교육은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과 교육과정 [별책14] 26면에는 “학습 부진을 겪고 있거나 성장 속도가 느린 학생이 단일의 평가 방식으로 인해 학습 의욕 저하 및 이탈을 경험하지 않도록 (대안적) 평가 방안을 마련한다”고 되어 있다. 너무나도 친절한 배려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영어 대신 다양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도 좀 가져보길 바란다. 개방성이 낮아 다양성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학생에게는 획일성이라고 하는 다른 평가 기준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문화적 다양성을 강제하면, 그것은 오히려 사고의 다양성을 해친다. 누군가는 다양성을 강제하는 교육을 거부해야 다양성이 증진되지 않을까?
사실 이런 종류의 모순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미 너무 자주 경험된다. 스티븐 힉스(Stephen Hicks)라는 학자는 다양성을 부르짖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 5가지 점에서 비판하였다(의역).
첫째,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만이 진리이다. 둘째,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는 파괴적이다. 셋째, 선악의 판단 기준은 모두 주관적이다. 그러나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객관적으로 나쁜 것이다. 넷째, 과학기술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소수만 독점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다섯째, 관용은 좋고 지배는 나쁘다. 그러나 관용은 모든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모순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양성은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강제하는 순간,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신의 질서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할 때만 이룰 수 있는 상태이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개신교인이었던 그에게 신의 손이었으며, 그가 지향한 시장 질서는 신이 만든 자연적 질서였다. 그 질서는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 신적 질서 때문에 우리는 시장에서 매우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자유로운 선택 때문에 매우 다양한 분야의 산업과 직업이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사고의 다양성은 오랫동안 매우 낯선 단어였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군부독재 시절을 사는 동안 다른 생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소위 민주화가 되었다는 지금에도 우리 아이들이 다양성 독재 때문에 다른 생각을 이야기할 수 없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자녀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라면, 군부독재에 항거했던 것처럼 이제는 다양성 독재에 항거하여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고의 다양성을 억제해 온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을 맞는 현재의 세계 시장에서 이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는 특별한 잠재적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을 다양성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우리의 미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질 것은 자명하다.
이형우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