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조리돌림
작금의 시대는 누군가 지적하듯 1인의 소통이 가능해지고 활발해진 시대입니다.
여러 순기능들과 장점들이 많지만, 반대로 많은 단점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폭로의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연약하고 힘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범죄와 결부된 희생의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논외로 하고 싶습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적 결함이나 치부를 공적인 장소로 이동시켜 쉽게 공론화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조롱하는 이른바 ‘조리돌림’이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지침을 제시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된 개인이 직접 권면하고, 이를 듣지 않을 땐 두 세 사람이 함께, 그래도 듣지 않을 땐 교회에 알리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장로나 목회자라면, 앞선 두 단계와 더불어, 노회 절차를 밟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분노에 휩싸이면, 성경은 무시되고 개인 감정이 신이 됩니다. 그것이 정의와 공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도 그 안은 이미 불타는 미움, 자신의 아픔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공론화시켜 이곳저곳에 공유함으로 잘못을 저지른 지체를 매장시켜 버립니다.
분노는 그 사람을 온통 집어삼켜 버려서 어떤 이성적·합리적 사고보다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됩니다.
평소 입버릇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했던 말은 이런 상황에서 전혀 적용점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셨지만, 침 뱉음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죄인으로 몰려 채찍질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셨지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구주께서 나를 위해 친히 당하신 고난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무익한지 아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의 주인이 자신이라 여기는 악함이 ‘조리돌림’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김성욱
크리스찬북뉴스 명예편집위원
바른길교회 안수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