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출신 문화평론가인 에릭 메탁사스(Eric Metaxas)가 최근 “고고학자들, 실로암 못 발견… 요한복음의 정확성 확인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메탁사스는 이 글에서 “수 년 동안 일부 학자들은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면서 “하지만 실로암 못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고 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유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실로암 못이 언급된다. 소경은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은 후에 앞을 보게 되었다.
5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못을 이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못이 실로암 못이라는 사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약 10여 년 전이었다. 다른 많은 유적 발견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성전산 인근의 하수구 수리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인 로니 리흐(Ronny Reich)와 엘리 슈크론(Eli Shukron)이 두 개의 고대 돌계단을 발견했다.
성서고고학평론(Biblical Archaeology Review)에 따르면, 추가 발굴을 통해서 이 유적이 예수께서 사셨던 제2성전 시대의 기념비적인 실로암 못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발굴을 통해 기혼 샘에서 시작해 히스기야 수로로 들어 온 물을 모아 두었던 곳을 찾아냈다. 이 못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68.58m 정도의 크기였다. 직사각형의 못은 크게 3개 층으로 이뤄졌고, 각 층에는 5개의 작은 계단이 있었다.
발굴이 진척되면서 이 못이 앞선 시대에 사용된 못 위에 건설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나아가, 앞선 시대의 못에서는 주전 1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의 동전까지 발견됐다. 비잔틴 시대의 못이 신약 시대의 실로암 못과는 약간 다른 위치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발굴로 인해 역사적 정확성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다. 성서고고학평론은 실로암 못의 기원은 예수 시대부터 최소 7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실로암 못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공을 막기 위한 히스기야 왕의 대비책 중 일부였다. 역대하 32장 30절에는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을 연결시켜 주는 수로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수로를 역대하에서 언급돼 있는 수로와 연계시키는 것을 주저해 왔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리흐와 슈크론의 추가 발굴은, 히스기야왕이 건설했다고 하는 역대하 32장의 기록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터널의 한쪽에 있는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에 따르면, 당시 양쪽에서 수로를 팠다고 기록돼 있다. 한쪽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수로를 파 중간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수로 건설로 남유다가 앗수르의 침공에 견딜 수 있는 중요한 식수원을 얻게 됐다.
특히 실로암 못의 발굴은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학자들의 신뢰를 높였다. 메탁사스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반유대주의를 야기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유대인(The Jews)’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메탁사스는 또 실로암 못 발굴이, 성경을 믿을 수 없다는 학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여전히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요한복음 9장의 소경처럼, 실로암 못가에 가 볼 필요가 있다”고 하며 글을 마쳤다.
기사제공=미주 재경일보(http://www.jkn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