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7] 영화 ‘곡성’과 미놀타 카메라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인류학의 위대한 역작 ‘The Golden Bough(황금가지)’를 남긴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 Frazer)에 따르면, 주술의 원리는 세 가지다. 유사법칙(Law of Similarity)·접촉법칙(Law of Contact)·감염법칙(Law of Contagion)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는 'that like produces like', 즉 '유사는 유사를 산출한다'는 법칙이다. 그는 이 책의 셋째 장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PERHAPS the most familiar application of the principle that like produces like is the attempt which has been made by many peoples in many ages to injure or destroy an enemy by injuring or destroying an image of him, in the belief that, just as the image suffers, so does the man, and that when it perishes he must die."
("유사가 유사를 산출한다"는 이 법칙에 대해, 여러 시대 여러 사람들에 의한 가장 친숙한 적용은 아마 다음과 같은 시도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미지가 고통스러워하면 똑같이 그 이미지의 주인공도 고통스러워하고, 그 이미지가 끔찍하게 파괴되었을 때 그도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어떤 원수의 이미지를 파괴하거나 부상 입힘으로써 바로 그 원수를 파괴시키거나 부상 입히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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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곡성>은 '日 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주요 역사의 자리(setting in history)에 함께 서 왔던 종교의 자리(setting in religion)를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플롯의 유사성: 부활은 '영'인가, '살과 뼈'인가?
영화의 주제는 일본과의 역사 관계, 그리고 그것에 관한 역사 인식을 드러내려 의도하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전개는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플롯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아닌 무속의 틀 속에서 기독교 주제를 전개시키고 있다. 시작을 아예 이렇게 한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39.
'죽음과 부활' 자체보다 이를 대하는 사람의 반응에 집중하는 이 영화 속에서, 곡성이라는 도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처럼 온통 놀라고 무서워하는 상황에 빠져 있다. 예수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접하고서 그를 '영'으로 생각한 까닭에 두려움에 빠졌다면, 이 영화에서는 살인 그 자체보다 살인(죽음)의 배후가 '영'인지 '살과 뼈'인지 의혹의 문제로 두려움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부활 사건은 '영(귀신)'인가? 아니면 '살과 뼈(역사)'인가?
살인 사건은 '귀신(영)'인가? 아니면 '살과 뼈(역사)'인가?
(2) 죽음의 유사성: 살인은 '주술'의 효능인가, '버섯'의 효능인가?
마을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살해의 동기들이 모호하다. 그것은 '(독)버섯'의 효능인가, 아니면 어떤 '주술'인가?
종구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경찰임에도, 주술과 과학적 탐문 사이를 우왕좌왕하다 유사한 패턴으로 계속되는 살인 사건으로 인해 과학적 근거에서 주술적 근거로 넘어가고 만다. 영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모든 살인 사건에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한 가정이 몰살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직전에는 항상 주술(굿)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
(3) 주술의 유사성: '죽이는 굿'인가, '살리는 굿'인가?
마침내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내 딸(종구의 딸 효진)에게까지 주술이 미치고 만 것'이다. 그것은 필경 외지인(일본인)과의 접촉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확신을 했을 때 종구뿐 아니라 마을 전체는 유사법칙·접촉법칙·감염법칙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된다.
외지인과 접촉한 사람-특히 여성-은 하나 같이 피부병을 드러낸다. 모두 성(性)적 접촉이었던 것 같은 암시 속에 어떤 부녀자는 성폭행으로, 술집 여성은 자유로운 관계로, 심지어 초등학생 딸에게까지 치마 속 하체에서부터 피부병 발진이 시작되고 있다.
모든 피해자는 동시에 가해자(살인자)가 되고 마는 이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세 가지 방도가 있다. 첫째 의술, 둘째 무속, 셋째 종교다.
당연히 의술은 이 강력한 주술을 억제할 힘이 없고, 가톨릭의 사제를 찾아가지만 이 이성의 종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실제적 영의 문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제상을 반영한다. 이제 이들이 기댈 곳은 무속뿐이다.
무능한 사제보다 백 번 든든한 박수무당 일광은 이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해 혼신을 다해 1000만 원 짜리 '살굿'을 벌이지만, 정작 영화의 구조는 그가 대체 피해자에게 우호적인 무속인인지 아니면 악마의 하수인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뜨린다.
일본에서 온 그 외지인이 다른 장소에서 벌이는 굿과 동시에 벌어지는 이 굿판에서, 일광이 쏜 살(煞)이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구조를 띠기 때문이다.
(4) 존재의 유사성: 사람이 악마인가, 악마가 사람인가?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각 존재들의 진정한 존재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악마인지 천사인지 구별하기도 어렵고, 우호적 존재인지 해를 끼치는 존재인지조차 파악이 어렵다.
이미 정체가 드러나다시피 한 외지인은 죽은 자를 주술로 깨우는 악한 무당 같은데, 이내 절벽에서 떨어져서는 흐느껴 우는 자아를 엿보인다. 그에게 양심이 있던가? 그런가 하면 영화의 시작부터 종구의 동선을 좇아다니는 무명이라는 이 문제의 여인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알 수 없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악신인지 수호신인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박수무당 일광 역시 원래부터 악한 박수였는지, 살이 그만 꺾여 외지인의 하수인이 되고 만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와 외지인이 둘 다 카메라를 들고 뭔가를 찍는다는 사실과 수많은 희생자 사진을 수집한다는 유사성은, 이 영화에 담긴 기호 해석의 중요한 키(key)다.
(5) 의심의 유사성: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감독이 프롤로그 본문을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프롤로그가 담긴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는 독특한 본문이 삽입돼 있다. 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책은 네 권인데, 바로 이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즉 이 본문은 사실 빠져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 삽입된 이유는 단 하나,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그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적으로 베드로는 수제자임에도 선생님의 죽음과 부활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의 확실한 반증인 셈이다.
베드로와 같이 우직하지만 '의심'에 찬 종구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동시간대에 또 다른 '의심'에 찬 상황 하나가 더 복선으로 등장한다.
딸 효진과 가족의 죽음을 막으러 가야 하는 아빠 종구가 의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악의 화신의 부활을 확인하러 간 가톨릭 부제 양이삼 역시 자신의 의심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구를 가지 못하게 붙드는 '무명'이라는 여인의 등장은, 마치 그나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자리를 지켰던 여인(들)을 대변한다. 이 테마의 원전인 성경 속에서 (무덤을 지켰던) 여인들이 무덤의 돌문을 누가 열어 줄까 걱정했다면(여자는 힘이 없으니까, 막 16:1-4), 이 영화에서 '무명'은 (흉가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흉가를 지키는 두 군졸(경찰)에게 계속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있다.
무명은 종구에게 가족을 지키려면 닭이 세 번 울기까지는 '믿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그녀가 귀신이라며 현혹되지 말라는 박수무당 일광의 말로 인해-특히 그녀의 피부색을 보고서-무명에 대한 '의심' 쪽으로 기울고 만다. 베드로처럼.
같은 시각 부제 양이삼은 악마의 부활을 확인하러 간다. "너의 정체를 밝히라!"고 호통칠 권세도 없는 이 가톨릭 부제는, 고작 "네가 악마가 아니라고 말해 달라 (그러면 돌아갈게)"고 청원한다.
그의 청을 거절한 이 부활한 악마(일본인)는 "너는 이미 (나를) 악마라고 믿고 있다"면서, 급기야 그의 의심(혹은 믿음)이 토대가 된 듯 악마로 변신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표징인 손의 못 자국을 보이며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까지 말한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믿음이라는 자체에 확신이 없는 이 가톨릭 부제 양이삼은 '도마'였던 셈이다.
이 힘만 세고 머리가 안 돌아가는 베드로 종구의 의심과, 소심하고 사내답지 못한 도마 양이삼의 의심이 표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6) 기획된 유사성: 두 개의 대본
이 영화는 기품 있는 기호로 강하게 인코딩된 보기 드문 수작이지만, 사실 나는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서 이 영화에 대한 감흥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인터뷰는 사실상 또 하나의 방대한 대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몽타주'라기보다 '기획'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통상 몽타주 작성자는 범인을 찾은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즉 몽타주 작가는 해석자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인데, 기획에 입각한 듯 또 하나의 스크립트를 제공한다면 그 영화는 몽타주가 아니라 퀴즈놀이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예컨대, 그의 긴 인터뷰 지문 중 다음과 같은 관객과의 대화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관객: 수미상관 구조가 궁금하다. 초반에 등장한 금어초가 후반부에 종구의 집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금어초가 (무명이) 다른 사람을 지켜주려 한 것인지?
나홍진: 타이틀이 뜨기 전 종구는 금어초를 보고 둥지 모양 무언가와 제사를 지낸 흔적들을 보는데, 이것은 두 번째 굿을 할 때 효진이가 누워 있던 방의 구조와 아주 유사한 미술이다. 즉 이 사건이 효진이의 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범상한 관객이 감독과의 인터뷰에 참여할 리는 없지만, '금어초'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일반 관객이 우리 주변에 몇이나 될까(싱싱할 때는 금붕어 같다고 하여 '금어초'로 불리는 이 꽃을, 영화 초반의 미끼 끼우는 장면과 유비시킨 모양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독은 사진에 대한 질문에는 의외로 짤막한 답변으로 종결하고 만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 기호인 까닭일까?
신주처럼 제단에 놓였던 수많은 사진과 반복되는 사진 캡처 장면에 비해, 다음의 답변은 지나치게 짤막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 외지인이 태웠다고 한 사진을 일광이 다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의미인지?
나홍진: 외지인과 일광이 한패라는 부분을 보여 주는 요소였다.
(7) 카메라의 유사성: 미놀타 하이매틱 S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메라는 미놀타 하이매틱 S 시리즈다.
일본에서 온 외지인이 '작업'하는 데도 쓰이며, 악마의 하수인이 된 박수무당 일광도 같은 기종을 소지하고 있다. 물론 사진들도 같거나 유사하게 희생자 사진들 일색이다.
뭘 찍으려던 것일까. 구식 기종인 걸로 봐서 PPL 광고는 아닌 것 같은데, 관객들이 무심히 지나칠까 봐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클로즈업하고 있다. 아래 카메라와 같은 기종이다.
둘 다 같은 기종의 카메라지만 하나는 일본산 미놀타 정품이고, 다른 하나는 삼성에서 만든 제품이다. 이는 1979년 삼성이 일본 기업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처음 탄생시킨 카메라 기종이었던 것이다(출처: 삼성이 걸어온 길).
이 영화의 카메라들(이 영화를 찍은 카메라 포함)이 갖는 의미는 우선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역사 인식을 표지한다. 특히 영화에서 배역을 차지하는 이 미놀타 카메라는 디지털이 아닌 파노라마 필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을 텐데, 아마 일본 카메라로 찍은 역사를 지적하는 것 같다. 한국인 일광이 같은 카메라로 찍는 것은 유사한 역사 의식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하나의 표지는 이 영화를 찍은 파인더에 담긴 역사 인식이다. 그것은 자본 또는 기업에 대한 다소 편중된 의식 같기도 한데, 물론 이 영화가 니콘 렌즈로 제작되었는지, 다른 어떤 서구 제품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이 영화를 찍을 만한 다른 어떤 민족 기업의 광학제품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호를 주고 있지 않다.
(8) 감독에게 투사된 유사성
따라서 이 영화를 제작한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유추하건대, 이 영화에서 외지인 혹은 악마로서 비교적 비중 있게 출연하고 있는 쿠니무라 준은 꽤 기획된 배우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실존 인물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이름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 다른 한 사람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쿠니무라 준(Jun Kunimura, 1955-)이다. 60년 정도의 시대 차가 있지만, 두 사람이 각각 68세, 60세에 찍은 사진이다.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두 사람은 이름의 음가도 비슷하다.
이 영화 속 외지인의 실존 인물로 해석되는 무라야마 지준은, 서론에 언급한 프레이저(James G. Frazer)의 노작에 버금갈 만한 역작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남겼다. 우리 한국인의 민속 내지 민속신앙에 대한 방대한 자료다. <조선의 의복>,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조선의 풍속>,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유사 종교>등 1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이 자료들은 그가 조선총독부의 촉탁에 의해 한국에 와서 약 2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집대성한 것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제는 당시 식민지 한국을 대상으로 정치·행정뿐 아니라 종교에 관한 특별 정책도 가지고 있었는데, 평양대부흥운동(1907년)이 일어난 지 약 8년 뒤 제정된 '포교규정(1915)'에 따르면 종교인 및 종교시설은 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은 불교나 기독교 등 고등종교뿐 아니라 유사종교 즉 민속신앙에 대해서도 적용됐다.
그러나 고등종교는 통제가 용이했던 반면, 무속과 같은 민속신앙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조선총독부에 자료로 제공된 것이 바로 이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자료집이었다.
새끼줄이 걸린 이 사진은 영화 속에서 마지막 희생자 집을 걸어 들어가면서 잡은 앵글 속 대문과 유사하다.
우리 선조들의 발바닥까지 찍어간 작가로서, 그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을까(절벽 아래서 떨어져 흐느끼는 영상 속 그의 자아가 그런 기대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진작가의 카메라에는 이런 것도 잡혔다.
장승으로는 보통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정도가 알려져 있으나, 이 작가는 이미 다양한 장승을 찍어 놓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영화 속에서 박수무당 일광이 일본인들이 하는 식으로 정(釘)을 박은 대상은, 아마 이 여성 장승 상원당장군(上元唐將軍)이었을 것이다. 도교식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서는 여인 '무명'으로 유사(Similarity)시킨 셈이다.
다시 말해, 유약하기만 한 우리나라를 지켜온 건 군인/남정네들 같지만, 실상 그 남정네들이 목숨을 연명한 것은 부녀자, 접대부, 그리고 우리의 어린 딸들, 이들 힘없는 여성들이 온몸을 내던진 덕택이라는 사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현존하는 이 시대 우리나라 종교들-특히 기독교-에게 던지는 물음, 곧 "누가 예수의 부활의 자리를 지켰는가?" 또는 "과연 누가 이단인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민속신앙 속 여인 '무명'으로 대변되는(유사법칙) 우리의 딸, 효진이 이렇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에필로그
다음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감독에게 날리는 '살'(질의)이자, 마지막 해석이다.
'유사는 유사를 산출한다'(that like produces like).
즉 감독은 지금 자신이 유사의 주술(Magic of Similarity)에 걸려 있거나, 아니면 이 영화를 통해 기독교를 향해 유사의 주술을 걸어 온 셈이다.
쿠니무라 준(Jun Kunimura, 1955- )이라는 배우가 기획된 배우였다면 후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어쩌다 캐스팅하고 보니 ’그‘였다면,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별점(5개 만점): ★★★★
한 줄 평: 기독교에 살(煞)을 날린 영화!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