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칼럼] 코메니우스의 역사관과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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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박사.

▲정일웅 박사.

(4) 코메니우스의 역사관

코메니우스의 역사관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7세기에도 지속된다고 인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의 초두에 인간의 타락으로 구원 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은 구원의 역사를 비구원의 역사로 변질시킨다. 거기서 코메니우스는 인류의 원죄로 인하여 죄의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가인은 그의 형제 아벨을 살해하며, 사냥꾼인 니므롯은 동물을 죽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항하여 전쟁을 이끌게 된다. 이러한 타락은 이전보다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살인적인 전쟁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바로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니므롯과 그의 폭력적인 정신의 종말을 미래적으로 더욱 희망하게 된다. 역시 바벨탑의 건설은 죄 타락의 원형을 모사하는 일에 협력한 사건으로 보았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역사를 비구원적인 행위의 연속으로 보았는데, 구체적으로는 모든 종교들에서, 그리고 정치적인 시도들에서 나타나며, 또한 학교들에서 바벨탑의 건설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종교들은 잘못된 탑들을 건설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유대교는 메시아의 기대와 함께, 가톨릭교회는 교황제도와 함께, 터키인들은 무함마드와 함께, 잘못된 복음주의자들은 거짓 그리스도로 자신들의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구약은 타락한 인간 역사의 이야기이며,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은 비구원의 역사에 그 어떤 종지부가 찍힌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락에서 회개와 되돌아옴에 대한 계속적인 부르심의 상호작용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기독교 안에서의 다툼들은 사람들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서 떠나 자신들을 땅 위의 스승으로 내세우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이처럼 부정적인 것들이 긍정적인 것들을 압도하는 상태로 발전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그들 안에 지탱된 그리스도의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에게는 사랑의 계명이 결핍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는 신적인 구원과 악마적인 비구원 양자 간의 대립적 경향을 드러내는 거울의 모습으로 보았다. 즉 독일 프로테스탄트의 역사가 보여 주는 것처럼, 선한 것을 목표했던 개혁과 종교개혁은 역설적으로 악한 것으로 기울어진 그 당시 교회의 모습에서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알려졌으나 복음의 실제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가장 부정적인 돌변한 모습이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시대에 우리는 다른 악에 빠지게 되었는데, 책들에 대하여는 책으로 변호하며, 신앙고백들에 대하여는 신앙고백으로 변호하였다. 거기서 많은 악한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일 수 있다. 그것은 싸움과 분쟁과 분파와 종파와 전쟁과 국가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쟁의 불씨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러한 타락의 시대에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경고를 주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로운 사상가들(Dissidenten)이여, 너희들의 빈번한 분쟁은 자신들을 해치게 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독일이 무엇이 루터적이며 또는 칼빈적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진지하고 열렬하게 진리를 알리기 위하여 기독교적이며 사도적이며 복음적으로 하나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것이다".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경고에서 30년 종교전쟁의 근원이 어디에 있었던지를 이해하게 된다.

종교개혁에 대한 코메니우스의 이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교회가 진리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부패하거나 진리가 왜곡될 때에 물론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교회의 근원적인 상태를 회복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보충적인 교회를 만들어 냈으며, 그 때문에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대한 개관들에서 더 많은 혼란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자신이 속한 형제연합교회를 탄생하게 한 후스의 종교개혁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시도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후스의 개혁도 그 핵심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교회의 원천적인 모습을 회복하기에는 모두가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지 않았고, 스스로 단편적인 입장을 대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새로운 편당을 만드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후스는 삶의 일상성에 대하여, 루터는 칭의론에 대하여, 칼빈은 주의 만찬과 의식(Ritus)에 대하여 강조함으로 분파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치니안은 기독교의 근본을 스스로 찢어내고 근본에서 멀어진 것을 제시함으로 문제가 되었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뜻을 관철시키는 일에 폭력을 사용하게 된 것을, 코메니우스는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하였다. 심지어 종교개혁의 뜻과 달리 생각한 자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추방하며, 죽음에 처하게 한 일을 모두 폭군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결과적으로 코메니우스의 역사 이해는 종교개혁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적인 종교개혁은 부분적인 개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눈 먼 자를 치유하심의 첫 번째 행위(막8:22-24)로 비교하여 이해하였고, 이제 실천되어야 하는 진정한 개혁은 눈 먼 자에게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게 하는 일(막8:25-26)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두 번째 행위에 상응하는 완전한 개혁을 전망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개혁은 교회만의 개혁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근본 질서를 지탱하는 세 가지 영역 '교회'와 '정치'와 '교육'(과학)의 개혁을 의도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맞물린 것이며, 그의 재림의 약속과도 맞물린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져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보았다. 그리고 미래의 기독교의 역사는 완전한 개혁에 가장 근접한 활동의 역사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통치와 더불어 전 세계에 빛과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일로 보았다.  

(5) 코메니우스의 종말론과 희망의 신학

코메니우스는 기독교 종말론에 철저히 의존한 종말론적인 신학자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천년왕국론과 관련하여 자신의 당대에 그리스도가 재림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했던 것은, 그러한 정황을 잘 증명해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맞물린 일로 이해하였다. 이제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범개혁론(Panorthosia)에서 서술하고 제시한 모든 인간적인 일들을 포괄하는 세계 개선의 프로그램과 깊이 관계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인 종말에 앞서 이러한 세상의 개선에 대한 희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은 한편으로는 창조론을 통하여 근거를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속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기대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환상들과 예언들을 통하여 뒷받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세상의 황혼이 다가오고 있고, 이제 저녁이 되었다… 이제 개선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새로운 아담이 세상에서 타락된 것들의 개선을 시작하시는 제 칠 천 년, 교회의 안식일, 큰 희년이 시작된다."라고 썼던 글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그는 30년 종교전쟁이 끝나는 무렵, 그 시대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로 인지하였다(1655년). 그리고 그 재림은 곧 그리스도의 통치인 천 년 동안의 역사를 말하는 것인데, 코메니우스의 희망의 신학은 강한 천년기설(Chiliasmus)의 기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저편으로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하였다. 특별히 평화의 왕국으로서 벌써 세상의 종말 전에 도래하는 천년왕국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대주의적인 천년왕국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참된 천년왕국은 기독교적 소망의 핵심에 속한 것인데, 그 희망은 현세적인 역사를 떠나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 역사 내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사이를 구분하였다. 물론 역사적 발전들의 결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사물들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평화(平和)와 의(義) 가운데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지평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코메니우스는 루터의 "두-왕국-이론"과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사회의 변형을 향한 활동, 봉사, 희생과 같은 결코 끝나지 않는 일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의 천년왕국의 도래에서 다시 코메니우스가 강조한 신적인 행위와 인간 협동의 특징적인 연결이 요구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구원론에서 뿐만 아니라, 역시 종말론과의 관계에서, 특히 인간이 세상을 개선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욱 분명히 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의 새로운 일을 약속하였다. 새로운 언약을,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창조를,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였다. 요약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팔을 끼고, 모든 일을 단념하도록 충고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와 함께 말해보자! 선한 용기를 갖게 되도록 하라". 여기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천년왕국론'(Chiliasmus)이 얼마나 '세상을 개선하는 일'(Emendatio)과 연관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세상의 개선과 회복에 관한 입장은 본질적으로 성경적이며, 특별히 구약의 종말론적인 언약에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이해와 관련하여 그의 생애에 항상 동반되었던 세 사람의 예언자들과의 관계를 가진다. 첫 번째 인물이 1625년 코메니우스의 망명 초기에 알게 되었던 크리스토퍼 코터(Christoph Kotter)이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예언에 초기에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심취하였고, 그의 신학적이며 정치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코터 외에도 역시 리사의 망명생활에서 포니아토브스카(Christina Poniatows- ka:1610-1644)라는 소녀 예언가를 알게 되었고, 후에 코메니우스보다는 4년 선배인 드라빅(Nikolaus Drabik)이란 예언가도 있었다. 코메니우스가 이들 예언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태도는 그의 신학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부분 중의 하나다.

코메니우스는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이란 글에서 한편으로는 환상과 예언들을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예언들을 변호하는 입장을 서술하였는데, 이 부분은 그 당시 신학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의 세계에서 질문과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코메니우스가 이러한 예언가들의 말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당대의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가톨릭의 박해로 망명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의도가 깊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암시가 예언가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과 함께 종결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의 성취 외에 더 중요한 진리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의 사명과 관련하여 그 시대적인 문제들에 지성인들과 정치가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그는 '개혁'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자로서 경고와 경종을 울리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코메니우스가 그 시대적으로 인지했던 자신의 역할은 종말론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도래하는 그리스도의 전주자(Vorlaeufer)로서, 마지막 시대의 전환을 알릴 뿐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이끌어 가는 세 번째 엘리야(세례 요한)의 역할로 이해했던 것에서 쉽게 확인된다. <계속>

*크리스천투데이는 본지 편집고문인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전 총신대 총장)의 논문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저자인 정 박사의 동의를 얻어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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