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부패한 인간은 칭의에 기여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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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가 자신의 저서를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경섭 목사가 자신의 저서를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1-1226),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1642-1727) 같은 이들이 자연에 주목한 자연탐미주의자들이었다면,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9-11세기)와 르네상스(Renaissance, 14-16세기) 는 인간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주목한 인간 탐미주의(Aestheticism)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생래적인(natural) 것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으로 통칭됩니다. 그 중 인간 내면의 덕성과 아름다움에 주목한 르네상스(Renaissance)는, 존재하는 모든 것 중 인간을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이전에는 금기시됐던 인간 탐미가 건축, 미술, 문학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가수 안치환이 불러 유행했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르네상스풍의 노랫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이 노랫말이 성경적 근거를 가질 수 있었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여타의 창조물과는 달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극찬하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인간은 하늘, 땅, 동물, 식물 등 그 어떤 피조물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아름다움이 예찬되고 있으니 성경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 예찬은 역사의 고비 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a hero)의 출현을 고대하게 했고, 이에 편승하여 예외 없이 정치권력을 입은 독재자, 혹은 자칭 메시아가 등장했습니다. 계시록에 예언된 그리스도 재림 직전 출현할 인간 우상(계13:15)도 같은 맥락입니다. 종말론자들의 단골 주제인 666(계13:18)은, 그들이 풀이하듯 과학과 미신이 조합된 -사람 몸에 컴퓨터칩을 내장하는- 숫자 놀음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매력적이고 완벽한 모습의 인간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수 6, 셋이 합해진 완전수 666이니(계13:18), 가장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매력적인 외모에 언변과 정치력을 갖추고 예술, 문학 등 다방면의 식견을 겸비한 만능 엔터테이너(an entertainer)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자지러집니다.

666으로 인(印)을 맞는다는 말 역시, 거듭난 성도가 성령으로 인쳐지듯이(계 7:3; 9:4), 구원 택정을 받지 못한 자들이 인간 우상의 영향력아래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이 히틀러에 광분하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연예 스타들에게 홀릭(holic)되는 것도 일종의 인(印)맞음 현상입니다.

낙관론적인 인간관은 극단적으로는 인간 우상화를, 소소하게는 유보적 칭의론 같은 신인협력론(synergism)을 출현시켰습니다. 사실 알미니안을 비롯해 모든 유사 신인협력설은 인간 능력을 맹신하는 낙관론적인 인간관에 기초합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는 개혁주의는 인간우상화 놀음이나 신인협력설 같은 것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적 부패한 인간의 의(義)를 낡아지는 옷처럼 여기기에, 그런 저급한 인간 의(義)로는 칭의를 도모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가 아무리 고결한 인품과 능력을 가졌더라도, 과도한 신뢰와 칭송을 드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도토리 키 재듯 다 거기서 거기의 전적 부패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그려내는 인간관은 비관론 일색입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시 116:11)"."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라(막 7:21-2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예수님이 동시대인들로부터 과도한 존경을 받아 낸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독설한 것도, 그들이 경건과 교양으로 겉만 번지르하게 자신들을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포장 속에, 썩은 시체로 가득한 무덤 같은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빛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실상을 목도하면, 자기 의를 신뢰하는 자긍심 따위는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율법을 봐도, 그것을 행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다는 자긍심이 생기기보다는 정죄를 받고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도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자가 반드시 거치게 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절망적인 실상을 보기 전에는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자기의 진면목을 보기 전에는 열심히 자기 의를 세우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는 말씀은, 바울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조우하고(행 9:3) 자기 실상을 본 후에는, 모든 율법적인 노력을 포기하고(빌 3:4-8)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진면목을 보게 된 사람은, 더불어 하나님의 의의 영광에 대해서도 눈이 열립니다. 몽학선생 율법에 이끌려 그리스도께 오니(갈 3:24),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3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평생에 그것을 탐구 주제로 삼았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반면 자기의 추악한 실상을 못 보는 사람은 덩달아 하나님의 의(義)의 영광도 못보니, -하나님의 의의 영광도 모르니(롬10:32)- 감히 자기 의(義)로 칭의를 도모하려는 무모한 망상을 갖게 됩니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또 한 부류는 이성(理性)을 탐미하는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입니다. 그들은 타고난 예지력(叡智力)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자들로서, 이성주의의 첨탑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중세 로마천주교는 이것을  그들의 신학 원리로 채택했고, 개신교신학에도 주욱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일부 개신교회 안에 스며있는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합리주의 누룩이 그 소산물입니다.

스콜라 철학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 BC384-BC322)로 대변되는, 헬라의 로고스 철학(λόγος, 요 1:1)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하나님을 아는 계시로 칭송했고, 유일무이의 하나님 계시인 성자 로고스(λόγος, 요 1:1)의 절대성을 폐기했습니다.

나아가 성자 로고스의 인격성 역시 부정되고, 한낱 인간 이성(reason) 혹은 우주의 비인격적 원리로 전락됐습니다. 성자 로고스가 부인되니 당연히 성자로부터 나오는 성령도 부정되므로, 성령이 성경의 저자임도 부인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성령 영감의(Holy Spirit-breathed) 책이 아닌 인간 영감(inspiration of man)의 저작물로 간주될 뿐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의 도움 없이 인간 지성으로도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의 책이 되고, 기독교 역시 이성(理性)의 종교로 전락됩니다.

그들에게 이성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 이성의 수준으로 전락됩니다. 철학자들이 '이성(理性)으로 신의 영역을 넘보려 했던 자들'로 불려진 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플라톤(Plato, BC427-BC347)의 이데아(Idea)는 너무나 완벽해서 천국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고, 철학자들이 명상으로 획득한 초월적 경험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체험과 혼동될 만큼 유사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으며 성자로까지 추앙받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마저도 플라톤철학을 통해 회심을 경험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과연 이성주의(rationalism)의 덫에 걸리지 않을 자가 얼마이겠는가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오늘날 건전한 신학과 교리를 표방하는 진영까지도 이성주의 올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들이 비록 종교다원주의, 자유주의, 신비주의, 이원론 같은 굵직굵직한 올무들은 피했지만, 곳곳에 매설된 소소한 이성주의의 덫에서는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일부 개혁교회 안에 침투한 주지주의(intellectualism), 폐쇄적 성령론, 기도경시 사조 등은 이성주의의 폐해로 보입니다. 이즈음 루터가 이성을 음녀(淫女)라고 한 말에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이는 이성(理性)의 매력이 음녀의 그것처럼 너무도 강렬하여,-삼손에게 들릴라가 그랬듯이-일단 그것의 유혹에 한번 휘둘리면 빠져나올 자가 없다는 점에서입니다. 또 하나는 음녀에게 휘둘리면 패가망신하듯이 이성주의에 매몰되면, 중세 기독교가 이성에 휘둘려 1000년을 잃어버렸듯이, 엄청난 파국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입니다.

루터가 이성을 음녀라고 한 것을 두고, 지나치게 이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에 농락당했던 끔찍한 과거의 반추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할 때 이해할 만합니다. 이 점에서 루터는 극적인 반전이 없었던 칼빈과 대조되며, 칼빈이 이성에 대해 루터보다 관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이성(理性)에 천착하는 특별한 이유는, 이성이 신앙의 향도요(a guide),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분수령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요 17:3), 멸망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살후 1:8-9).

사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불택자는 영적 무지아래 있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니다(엡 4:18).",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막 4:12)"

이성의 무지와 왜곡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중생이고 구원이고, 그 일을 성령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칼빈도 중생을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물과 성령으로)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5)",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0, 13)."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사, 이성을 덮고 있은 무지의 구름을 걷어내어 복음의 영광을 보게하시고, 계속하여 성도들을 이성의 편견과 왜곡에서 보호하시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에서 성령의 도움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성령을 신앙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도 지당합니다.

"당신은 성경에 있는 말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는가?- 성경 안에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성경으로 더불어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로 인해서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고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킬 수 없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로 납득을 하게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뿐이다."

우리는 성령이 배제된 이성 중심의 신앙이 오류에 빠졌던 역사적인 경험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오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며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 없이 말씀만 찾다가 주지주의에 빠지고, 성령 없는 열심으로 광신주의에 빠지고, 성령없는 명민한 신앙만 자랑하다가 이성주의에 빠지고, 성령없이 신비만 좇다가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빛을 조우하고(행 9:3-6) 성령충만을 받은 이후부터였습니다(행 9:17). 루터가 율법주의 신앙에서 벗어난 것도 어거스틴 수도원 종탑에서 복음을 통해 하늘이 열리는 은혜를 체험한 후부터입니다. 천재 수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이성주의 신앙에서 깨어난 것도 1654년 11월23일 밤 10시 30분 경부터 12시 30분 경 까지의 불체험이 있은 후였습니다.

"섬광.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나를 그로부터 떠나지 말게 하소서."

파스칼은 이 경험 후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여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들과 같은 극적인 체험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외없이 누구나 나름의 방식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올바른 신앙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신인협력설을 부르짖는 로마 천주교, 칭의 유보자들은 르네상스적인 낙관주의 인간론과, 성령이 배제된 스콜라 이성주의의 합작물 쯤으로 보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010-9704-8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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