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지난 3일 오후 2시에 수서동에 소재한 동 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제214회 연구모임을 개최했다.

이날 윤경로 교수(한성대, 본 연구소 소장)가 서구인의 '정체론적' 한국(인)상', 김태균 목사(주안교회 교육 목사)가 '중국 산동지역 한인교회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그 중 김태균 목사가 발제한 '중국산동지역 한인교회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무관심속에서 밝혀지지 않고 묻혀질 뻔한 중국 한인교회에 대한 역사적 진실들을 새롭게 밝혔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산동지역에서의 선교 활동

한국교회는 1912년 9월 2일 총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국 산동성에 선교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총회의 선교결정을 계기로 총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뿐 아니라 한인 목회자들도 중국 특별히 선교의 중심지였던 산동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중국산동지역에서 활동한 목회자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총회의 공식적인 파송에 힘입은 정식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현지인을 대상으로 선교한 선교사들이다. 반면, 산동성 현지인이 아닌 그곳으로 이주하여 있었던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한 한인 목회자들이 있었다. 중국 산동 선교에 관한 연구들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총회 회의록과 같은 문서 가운데 남겨져 있는 반면 함께 그곳에서 활동한 목회자들에 관한 내용과 한인교회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산동지역 한인목회자

당시 한인교회 활동에 깊숙히 관여했던 영등포 교회의 원로 방지일의 증언에 따르면 화북 노회장을 지낸 김두철, 천진의 김대업, 석가장 교회를 담임했던 김석찬(마산문창교회 원로목사), 청도 한인교회를 담임했던 김명집, 서주 및 상해에서 활동한 김경도(현, 진해교회 원로목사), 1932년 청도 신의신학교 교수로 활동한 홍대위(대구삼덕교회 원로목사), 등 많은 한인목회자들이 있었다. 사경회와 성경공부 등과 같은 한인 목회자들의 활동은 신앙활동들을 통해 당시의 어려웠던 한인교회 교인들에게 영적으로 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20 세기 중반 청도 한인교회의 역사

청도 한인교회의 시작

1940년-1950년대에 총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파송증을 가지고 중국에서 선교한 반면 목회자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이주하여 갔다. 그들이 중국으로 간 이유를 보면 첫째 신사참배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목회자들이 있었고 둘째 해방전 민족운동을 위해 이주한 목회자들도 있었으며 셋째,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해 떠나온 목회자와 교인들도 있었다. 청도한인교회는 신사참배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목회자 김명집을 통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가 시작되면서 이를 거부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이를 피해 중국, 만주, 상해 등 여러 곳으로 이주하여 갔다. 김명집도 1937년 신사참배를 피해 1940년 12월 2일 방지일의 초청으로 청도지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청도한인교회의 경우 김명집이 청도로 오기 전까지는 가정교회의 형태로, 방효원, 박상순, 이대영, 방지일 등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예배를 드렸다. 가정교회가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녀들의 신앙교육과 한글교육을 위해 함께 모여 아이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부녀자들이 모이게 되면서 가정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모이기 시작한 가정교회는 처음 예배드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각 가정을 돌면서 순회식으로 매주 예배가 드려졌고 모이는 수가 늘어나자 일본교회와 중국교회를 빌려 쓰기도 했다.

초기에 가정교회는 이대영, 방효원, 박상순, 홍대위, 그리고 김윤식 의사의 가족들로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김명집의 청도 정착으로 인해 한인교회가 목회자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명집의 정착으로 말미암아 교인이 증가하게 되었고 결국 청도한인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목회자들의 정착으로 말미암아 한인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러한 교회들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1941년 11월에 화북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되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1959년 6월 17일 김명집이 추방되고 청도한인교회의 공식적인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공산화와 더불어 선교의 문이 닫힘으로 한인목회자들이 목회를 그만두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당시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피난생활을 했던 중국의 한인들에게 미친 영적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인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를 통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영적인 안내자와 교인들의 삶의 인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청도 한인교회의 역할

해방 직후 청도 한인교회는 한인회(회장 이대영)를 조직하여 당시 청도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 대한 전도와 선교에 많은 노력과 힘을 쏟았다. 청도 한인 교회가 조직한 한인회는 당시 중국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에 대한 제반 업무들을 처리해 주고 이들이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감당했다. 반대로 중국이 공산화 되었을 때에는 한국으로의 귀국 또한 이 한인회에서 맡아서 주관하였다. 제1차 귀국선은 미국 상선으로서 1946년 2월에 출발하였고 2차 귀국선은 1946년 5월에 출발하여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한인들의 귀국을 포함하여 한인들과 관련된 제반 업무에 청도 한인교회가 큰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또한 청도 한인교회가 수행한 중요 사업으로서 교육사업을 들 수 있다. 청도 한인교회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인을 위한 학교가 아닌 한인을 위한 한국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청도 한인교회가 중국인보다는 한인들에 관심을 가지고 목회를 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한국학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민족 교육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개교하게 되어 중국현지에 있는 한인 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1946년 2월 한인들의 귀국으로 말미암아 귀국할 때까지 약 6개월간 시작되다가 폐교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도 한국학교는 당시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인교회의 교육기관이라는 점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청도 한인교회의 빼놓을 수 없는 사업으로 의료사업을 들 수 있다. 이는 청도 한인교회 초기의 개척인 중에 김윤식 의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윤식 의사는 홍승한 목사의 조언으로 27세의 나이로 1918년 11월 19일 박상순 선교사와 함께 래양에 도착하여 12월 4일 계림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총회의 공식적인 파송은 받지 않았지만 자비량으로 래양에서 많은 환자들과 걸인들을 무료로 치료하고 교회서적도 보급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했다. 10여년간 산동성 래양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대에 산동성 청도시에 중앙병원을 개업하면서 청도 지역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김윤식 의사는 청도 한인교회에 출석하며 봉사하였고 해방 이전에 조선으로 건너오기까지 중국 청도 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통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 청도 한인교회에 소속된 여전도회의 활동도 있었다. 특별히 박승렬 장로의 처 김선경 전도사는 평양 장대현 교회에 전도사로 있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장대현 교회를 사임하고 청도로 와서 무보수로 전도사 사역을 하던 중 화북노회에 속한 여전도회에 참석해서 또한 많은 활동들을 하였다. 이처럼 청도한인교회는 사회사업뿐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던 대표적인 한인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