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단순 모험기 아닌 고난 통과하는 ‘고백록’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기독교 고전 다시 읽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서구 문화는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미 문학이나 고전에는 기독교와 신앙의 흔적을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석 같은 그 이야기들을, 숨은 그림을 찾듯 정현욱 목사님과 함께 캐내어 봅시다. -편집자 주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찾은 이야기
대니얼 디포(홍종락 역) | 생명의말씀사 | 312쪽 | 12,000원

책을 읽다 보면 한 문장 때문에 전율할 때가 있다. 전에 고(故)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이란 책을 읽다가 그런 문장을 발견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직접 꺼내 보지 않으면 기억도 흐릿하다. 그런데도 이 문장 하나만은 마음에 새겨져 있고,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았다. 고난과 상처가 아프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은 깨달음 때문이다. 운명적 만남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와의 만남도 비슷하다. 작년 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우선순위에 밀려 마음에 담아두었던 고전 소설을 찾아 독서계획표를 작성했다. 많은 문학 작품이 있지만, 아무래도 영미문학을 비껴나갈 수는 없어 보였다. 넘쳐나는 셰익스피어를 뛰어넘어 잘 알려져 있지만 읽히지 않는 책을 선별해 내기 시작했다. C. S.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서도 고전 읽기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오던 터에,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시기적절한 선택이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 전개될 영미문학 고전들을 섭렵할 작정이었다. 처음은 그렇게 순박하고 단순했다. 극동방송에서 소개할 책을 찾는 데도 도움을 받으려는 작은 소원도 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읽어가면서 낯선 어색함이 흘렀다.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의 복이나 아버지의 복을 구하지도 않고, 결과를 따져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집을 떠나 첫번째 항해에 나섰다.’ 17세기 영국이라는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이란 직설적인 표현에 당황했다. 불투명한 정보로부터 전해 들은 ‘로빈슨 크루소’와 직접 읽는 ‘로빈슨 크루소’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홍종락 선생이 번역하고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를 구입해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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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요크 시 태생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가엾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1719)’이다. 대개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에 대해, 파선하여 표류하다 무인도에 도착하여 살아가는 ‘생존기’ 쯤으로 이해한다. 어린 시절 보았던, 어린이용 편집된 동화나 만화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나 저자인 다니엘 디포는 책을 전혀 다른 의도에서 저술했다. 다니엘 디포가 살았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은 과학과 기계 문명이 빠르게 발달하던 시대였고, 영국의 영향이 점점 강대해지기 시작한 때다.

디포는 166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장로교도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뉴잉턴 그린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했다. 공부보다 상업에 흥미를 갖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채 18세부터 장사를 시작한다. 영국의 혹독한 겨울에 따뜻한 양털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신앙을 거의 잃다시피 하고, 부와 명예를 좇는다. 그러다 독재자 제임스 2세를 타도하는 몬머스 반란군에 가담하다 목숨만 부지하고 겨우 살아난다. 다시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고, 1688년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와 친분을 쌓아 정치적으로도 성공한다. 그러나 다시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닌다.

근면한 디포는 다시 벽돌 사업에 돈을 대면서 큰 돈을 번다.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시사 문제를 다루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도 함께 이루어 낸다. 당대 정치 현안들에 큰 영향을 끼쳤고 국교 외에 어떤 종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고교회파’를 비난하는 <비국교도를 다루는 가장 손쉬운 방법(1702)>을 통해 비국교도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1704년에는 정치 신문을 창간하면서 기자로 활동하고, 스파이 팸플릿 작가 등으로 정치에 발을 디딘다. 결국 권력자들의 미움을 산 그는 악명으로 명성이 높은 뉴게이트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번성하던 사업도 풍비박산 나고, 가족들도 굶어 죽을 정도의 빈곤 상태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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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마치 항해하는 배와 같다. 순탄하고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시간도 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파선(破船)하여 죽음에 직면하기도 한다. 성공과 실패, 전진과 후퇴를 경험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의 여정을 고독한 무인도에 표류하는 존재로 오롯이 담아냈다. 환갑을 일 년 남겨둔 1719년, 그 유명한 <로빈스 크루소>를 발표하여 일약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첫 소설이자 최고의 작품이 되어,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와 더불어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작품이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소설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인 양 소개하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셀커크’라는 선원이 배가 파선하여 무인도에서 5년 동안 살다가 구조된 사건이 있었다. 큰 화제가 되어 영국인들의 입에 올랐다. 다니엘 디포는 셀커크 사건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작품화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나타나지만, 당시 영국은 왕의 권위를 벗어나려는 중산층의 움직임이 점점 드세게 일어나는 시점이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고,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통해 자신들의 시민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많아졌다.

디포가 설정한 무인도는 사람이 없는 섬의 개념을 넘어선다. 국가의 간섭이 일체 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국가이다. 영국에 청교도운동 실패 후 분리파 청교도는 메인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건너갔고, 온건파 다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시민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신세계를 꿈꾸었고, 왕이 아닌 시민이 다스리는 민주국가를 만들기 원했다. 시민정신을 주도한 종교는 비국교도들이었으며, 그 핵심에는 칼빈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형성된 장로교회가 있었다. 다니엘 디포는 장로교도로서, 시민정신을 주도한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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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간과한 사실은,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의 경험을 통해 깊은 신앙으로 나아갔던 점이다. 국가에 위탁된 신앙이 아닌, 경험과 스스로의 힘으로도 깊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로빈슨 크루소는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1659년에 마무리됐던 에스파냐 무적함대 격파 사건과,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신대륙에 대한 희망과 무역 발달, 노예제도에 대한 신앙 양심의 문제 등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 항해술의 발달이 혁명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소설 곳곳에 ‘위도 몇 도’ 라는 문장들이 발견된다. 선장과 함께 해도를 조사하여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를 15일 정도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진로를 바꾸는 이야기도 나온다. 세계일주가 보편화되고 아프리카와 신대륙 등을 오가며 노예와 상품을 사고 파는 이야기가 시대 배경을 장식한다.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지향했던 시민사상이 깊이 스며 있다.

영국 국교와 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걸리버 여행기’는 금서(禁書)로 지정되었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금서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작품은 은연 중에 국교와 사제 중심의 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타자의 간섭이나 도움 없이도 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독립적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그린다. 평민과 귀족의 신분차별을 타파(打破)하고, 스스로의 노동으로 부와 물질을 축적하는 중상주의를 옹호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더 이상 무인도에서 살아남은 생존(survival) 게임이 아니다. 시대를 혁명적 사고로 해석하고 새롭게 정립하려 했던 혁명가의 이야기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신앙 고백록으로 읽어야 한다.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디포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낸 문장을 옮겨 본다(홍종락 선생이 번역한 생명의말씀사 판에서 인용하였다).

▲정현욱 목사.
▲정현욱 목사.

“나는 모든 선원이 가는 길로 갔다. 술이 나왔고 마시고 취했다. 그리고 하룻밤의 방탕함과 함께 전날의 모든 회개와 결심도 잊어 버렸다.”(41쪽)

“가끔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자들을 왜 이런 식으로 철저히 망가뜨리실까 의문이 들었다. 하나님은 왜 이렇듯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고 우울한 신세로 만드셔서 감사하기 어렵게 하시는 걸까?”(75쪽)

“그날 하루, 이 외로운 처지에서도 사람과 교제하고 세상 모든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겸허하게 진심으로 감사했다.”(101쪽)

“사악하고 완고했던 과거의 생활 때문에 난파된 후 한동안은 끔찍한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님이 나를 참으로 관대하게 대해 주셨고, 나이 불법에 비할 때 한없이 가벼운 벌을 내리셨고, 쓸 것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108쪽)

/정현욱 목사(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로고스서원 연구원, 부산극동방송 ‘책과 음악의 행복한 만남(매주 목)’ 진행, 부산반석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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