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인간이 신이 된 시대에 인간을 고발하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기독교 고전 다시 읽기 3]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1726년)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 문예출판사 | 408쪽 | 12,000원

동물원에 가면 호랑이가 재주를 부린다. 재주를 다 부린 호랑이는 관광객이 구경할 수 있도록 유리막으로 가려진 우리로 들어간다. 어린아이가 우리 곁을 지나자 호랑이가 포효하며 달려들지만, 아이는 꿈쩍도 않고 오히려 호랑이를 놀려준다.

우리가 읽은 걸리버 여행기는 우리 안의 호랑이였다. 사람들을 위해 ‘쇼’ 하는 동물원 호랑이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걸리버 여행기는 ‘이빨 빠진 호랑이’ 버전이다.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을 때,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 전혀 다른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첫 느낌부터 말해야겠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걸리버 여행기가 아니었다. 위험하고 과격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아닌, 초원에서 으르렁거리는 동물의 왕이었다. 개작되지 않는 원전 번역판은 초원에서 군림하는 야생의 호랑이었다. 은밀하게 접근하여 맹렬(猛烈)하게 공격한다. 도망가는 사슴을 거대한 앞발로 짓이겨 버린다. 비틀거리는 사슴의 목을 누르고 포효(咆哮)한다. 약간은 긴장되고, 약간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저자를 찾아가 보았다.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을 추적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았다.

스위프트는 1667년 11월 30일, 그러니까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백부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공부한다. 영국 런던으로 건너와 어머니의 먼 친척인 W. 템플 경 아래 비서 생활을 한다. 당시 W. 템플 경은 정치계의 거물이었고, 영국의 정치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고전과 역사를 배우고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정계 진출을 꿈꾼다. 도중에 아일랜드로 돌아가 사제가 되었으나,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템플 경 아래서 활동한다. 1690년대부터는 시와 문장을 배워 첫 책 ‘책들의 싸움’과 ‘통 이야기’를 쓴다. ‘통 이야기’는 훗날 스위프트의 명작이 될 ‘걸리버 여행기’의 씨앗이 된 작품이다.
 
‘통 이야기’는 가톨릭과 개신교, 영국 국교회의 싸움을 풍자한 것으로, 부친에게 상속받은 웃옷을 서로 차지하려는 세 아들의 이야기다. 이 책을 통해 인정을 받은 그는 정치계로 입문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불행히 후원자인 친척 템플 경이 사망하여 좌절되고 만다. 그 후 1713년부터는 더블린의 성 패트릭 수석사제가 되어 정치인들의 야만적 행동을 고발하는 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 소설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다.
 
스위프트의 정치적 배경을 잠깐 살펴 보자. 할아버지 토머스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도 성직자였다. 크롬웰에 의해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핍박을 당했지만, 찰스 2세를 통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 계통에서 일한다. 국교도의 영향을 받았고, 더블린에서 국교회의 사제가 된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종교와 정치적 문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끝나지 않는 전쟁을 통해 10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의미 없는 전쟁은 생명 뿐 아니라 재정적 손실을 가져온다. 일반 시민들은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엄청난 세금 세례를 감내해야 했고, 이로 인해 궁핍하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위프트는 명분도 없는 전쟁을 혐오했으며, 백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탁상공론을 일삼는 황실과 정치인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러한 황실의 어리석음과 부덕(不德)함이 소인국과 거인국의 전쟁 이야기에 스며들어 있다.

▲걸리버 여행기 삽화. ⓒ대원키즈노블 제공
▲걸리버 여행기 삽화. ⓒ대원키즈노블 제공

소인국, 거인의 눈으로 인간의 우둔함을 보다

걸리버의 첫 여행지는 소인국 릴리푸트다. 그는 그곳에서 황제의 명을 받아 적을 위해 싸우는 숨은 병기가 된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천 명의 백성들의 음식과 천을 소비한다. 걸리버는 소인국 사람들에 비해 크기는 12배였고, 몸통은 1,728배가 되었다. 그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3백 명이 동원된다. 과시하기 위해 힘에 겨운 아파트나 자가용을 굴리며 허세를 부리는 인간을 그대로 닮아 있다. 이 뿐 아니다. 이들은 구두의 뒷굽이 높은 당과 낮은 당이 있어 격렬하게 싸운다. 더 우스운 건 계란을 깰 때 얇은 쪽으로 깨라는 왕의 명령보다 두꺼운 쪽으로 깨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죽음을 불사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계란의 얇은 쪽을 깨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의 수가 반란 때마다 1만 1천명을 넘는다고 집계되어 있소. 그 논쟁에 관해 몇백 권에 달하는 책이 출판되었소이다.”

산 위에 올라가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작게 보이고 하찮아 보인다. 그토록 소중하게 보이는 것들도 높은 곳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면 길을 잃고 만다. 세세한 것에 집착하면 큰 흐름을 놓치게 되어 잘못된 길로 빠진다. 거인이 된 걸리버는 소인국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본다. 벌레와 같은 인간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과도한 지출과 허세를 부리다 파탄에 이른다. 영적으로 탁월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잊지 않았다. 현실에 성실하게 살아야함이 맞지만, 때론 높은 산에 올라 허술하고 미천한 인간의 나약함을 봐야 한다.

거인국, 소인의 눈으로 인간의 조야함을 보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까운 무당보다 먼 데 무당이 용하다’고 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사람이 없다’(눅 4:24)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조야하기 그지 없다. 두번째 여행지인 거인국 브로브딩낙에서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그들만의 미(美)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걸리버는 소인의 눈으로 그들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그들의 소리는 천둥치는 소리 같고, 그들의 피부는 반점과 죽은 깨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흉측해 보인다. 음식은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나는 그 때 영국 여인들의 하얀 피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매우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것은 그녀들이 우리와 체구가 비슷하고 확대경을 통해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즉 확대경으로 자세히 뜯어 본다면 아무리 아름답고 부드러운 피부도 거칠고 흉하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현미경으로 바라보신다. 인간의 기준으로 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벌레요 짐승’에 불과하다. 걸리버는 소인국의 때를 기억하고 그들이 자신을 보았을 때 얼마나 흉측하게 보였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역겨웠던 것은 거인들의 옷에 기어 다니는 ‘이’였다. 영국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뚜렷하게 이를 맨눈으로 보고 기겁을 한다. “그 벌레의 다리나 돼지처럼 입을 먹이에 처박은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이였는데, 너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원작 삽화.
▲원작 삽화.

거인에 비해 작은 체구를 가진 걸리버는 또다른 어려움에 봉착한다. 파리가 솔개만큼이나 크고, 쥐나 고양이가 송아지만큼이나 되었다. 거인들의 작은 장난에도 몸이 부서지고 목숨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는 정책들이 힘 없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목숨을 앗아가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걸리버는 비록 자신이 작고 미천해 보이지만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왕에게 이야기한다.

“전하께서 유럽이나 기타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시는데 …, 이성의 힘은 신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오며 저희 영국에서는 키가 큰 사람이 더 미련한 경우가 많사옵니다. 동물 중에서도 벌이나 개미가 다른 체구가 큰 동물보다 더 부지런하고 영리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를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시지만 언젠가는 저도 전하께 큰 일을 해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옵니다.”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소인국의 때를 기억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교훈을 배운다.

라퓨타의 나라,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인간의 어리석음

3부에서는 하늘에 떠 있는 라퓨타의 나라와 그 외 나라를 여행한다. 이곳에서는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 생활이 불가능한 학자들이 나온다. 그 나라 사람들은 ‘때리기꾼’을 고용하여 데리고 다닌다. 그들은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나 들어야 할 사람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염없이 생각하는 그들은 늘 불안에 휩싸여 있고, 걱정과 근심에 파묻혀 산다. 지식이 평안을 주지 못하고 ‘많이 공부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피곤하게 한다(전 12:12)’는 전도서 말씀이 생각난다. 마지막 4부에서는 말의 나라를 소개한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말의 나라를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소개한다. 그들은 ‘야후’라는, 인간처럼 생긴 동물을 부린다. 걸리버는 여기서 인간이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나가면서

▲정현욱 목사.
▲정현욱 목사.

존 메이시는 이 작품에 대해 “우리 인간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냉철한 전망과 뜨거운 분노라는 남다른 결함으로 보았으며, 우리는 무자비하게 채찍질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미워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거짓이었으며, 그 스스로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메이시가 평한 대로 이는 사람이 아닌 죄에 대한 분노였다.

이 작품은 인간을 너무 비판적 시각으로만 보았다는 비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만든다. 인간의 이성을 신처럼 떠받들던 18세기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무지 희망 없는 인간을 그려냈다.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 걸리버 여행기를 사순절을 맞아 함께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정현욱 목사(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로고스서원 연구원, 부산극동방송 ‘책과 음악의 행복한 만남(매주 목)’ 진행, 부산반석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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