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 종교개혁의 비전과 신학사상의 재발견(1)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글들을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가 <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에 이은 '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의 두 번째 시리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있는가?: 종교개혁의 비전과 신학사상의 재발견>을 매주 월요일 새롭게 연재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있는가?: 종교개혁의 비전과 신학사상의 재발견
한국교회와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다.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정치인들과 정부 관료들, 법조계, 기업가들, 학교법인 등에서도 상상치 못하였던 범죄들이 빚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전반에 대해서 대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온 지 오래되었다.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일은, 대형교회와 유명한 목회자들이 드러낸 충격적인 부정 사건들로 인해서 기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독교 연합 기관들의 부패 스캔들로 인해서 한국기독교는 총체적 위기상태에 빠진지 오래 되었고, 거의 침몰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사회와 기독교 교계 안팎으로 표출된 문제들은 수없이 많은데, 아무런 대안 없이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평화롭게 안정된 교회는 매우 드물고, 희망을 품고 성장하는 교회는 거의 없고, 주일학교의 쇠퇴로 인해서 양적인 성장은 사라졌다. 쇠퇴하고 있으면서도 분쟁과 대립에 빠진 교회들이 악취를 뿜어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금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관행으로 시행하고 있는 바들을 정당화 하려고만 하지 말고, 예배와 행정과 재정집행 등을 완전히 바꿔야만 한다. 총체적으로 각성하고 갱신하여 완전히 새로운 교회상과 성도의 모습을 세워나가야만 한다. 한국교회를 회복하게 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대안이 되는 방안들을 찾기 위해서, 유럽의 종교개혁을 추적하여 보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분투노력은 교회에 생명력을 불러일으켰고, 세상에 빛을 발하였다. 지난 5백 년 동안 기독교 신앙체계를 다시 세워놓은 종교개혁을 되돌아보면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1. 종교개혁이 성취한 역사적 업적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은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된 이후로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적 혁명을 이루어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를 놓고서 논의가 많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주된 목적은 참된 교회를 회복하고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이요, 교회의 체계를 파괴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련과 성취의 영향으로 현대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핵심적인 본질이 밝혀졌고,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
첫째, 우리가 종교개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하고, 연구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개혁은 세상과 문화, 특히 그 안에 있는 교회를 바꿔놓은 변혁의 시대였고, 그들을 통해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에서 새로운 안목을 얻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의 뿌리와 그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종교개혁의 역사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현재까지 인류 역사 연구에 있어서, 지난 시대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저술과 토론과 논의가 집중되어지는 주제가 바로 종교개혁에 관련된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의 역사와 신학사상은 여러 지역들에서 서로 다르게 분리된 다양성이 있었고, 서로 다른 방법론을 채택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위대한 기독교 영웅들이라서 따라가려고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역시 죄로 얼룩진 오류와 실수가 많은 죄인에 불과하다. 역사 연구에서 비평적인 안목과 분석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독서가 절실히 요청된다.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나가지만, 그 배면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다. 섭리라는 보편적 진리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도 이미 사회적으로나 혹은 지리적으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부지런히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야만 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실수와 오류 속에서 발견되어지기도 한다.
둘째, 종교개혁자들의 절실했던 상황들을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목회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하고자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으려 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관행과 권위에 대해서 과연 정당한가에 의문을 던지면서, 거의 무시되어버린 성도들의 신앙적 요구에 대하여 해답을 모색하였었다.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하자.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목양적 관심으로부터 출발된 후에, 전체 교회를 재건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립하여 나갔고, 널리 확산되었다. 중세 말기에 내려오던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은 결코 소수의 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엘리트 신학자들의 학문적인 운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대학에 소속된 학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던 목회자들이었으며, 일반 성도들이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서 열심을 내어 성경을 탐구하게 되었다.
먼저 루터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자신이 가르치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도되고 있음에 탄식하였다. 그의 목회적 고뇌와 두려움은 중세교회의 왜곡된 가르침에 대해서 심각한 고님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루터는 빗텐베르그 대학교회의 출입문 광고판에 95개 조항을 1517년 10월 31일에 내걸었다. 그 다음 날이 만성절이었다. 루터의 심각한 고통으로 빚어진 "우발적인 사건"은 혁명적으로 비화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로 인하여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일련의 토론 사건들은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기존의 로마 교황청의 모순을 지적하고 싸우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심점이자 산파역을 했다. 당대 로마 교황청 학자들과 대립적이던 루터의 선구자적인 고뇌 속에서 실행된 하이델베르그(1518년)와 라이프찌히(1519) 논쟁들은 위대한 역사를 형성하는 나침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루터가 시련을 당하는 토론들과 논쟁들은 결국 성경을 재발견하게 되었음을 인식케 하는 사건들이었다. 1521년,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의 루터의 진술들은 더 이상 종교개혁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데 결정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한 루터는 최초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루터에 대해서는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현재 독일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엄청난 저술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가 한 말이나, 그가 쓴 글이나, 그의 사상에 대해서 독일 내에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어지고 있다. 아데나워 수상이나 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셋째, 유럽의 종교개혁은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전파하므로써,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제공하였다. 단순히 어떤 교리적인 싸움에 집중한 것이 아니다. 루터가 주장한 칭의론과 같이, 구원론 논쟁을 계속해 나갔지만, 어려운 학문적 만족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부적으로만 갱신하기 위해서 진리의 다툼을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당시 국왕들과 제후들과 귀족들과 성도들이 함께 어우려져서 복음의 권위를 사회에 반영시키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의 중심은 지속적으로 제공되어진 신학적 지도력이 핵심에 들어있었다. 대부분은 각 지역에서 활약한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이 제시한 바, "신학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야만 그 시대의 정치적 흐름과 사회적 정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 역사는 사람들이 주도하여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면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였으며, 이들의 관점을 하여야만 유럽 지성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판별해 낼 수 있다. 굳이 종교개혁 기념 5백주년이 아니라 하더라도, 항상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종교개혁의 신학사상들을 연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접근방법들이 나와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최근에 16세기 지성사 (intellectual history)와 사회사 (social history)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확산되어졌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주도하게 되었는가, 왜 그렇게 생각했었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가를 규정하는데 이들 가설들이 기존의 연구들에 도전하면서 다소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사상들이 끼친 영향과 사회주의 혁명과의 관련성에 주목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독일대표적인 사회자학자 스트라우스는 대중들과 공동체의 신념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 신학자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비전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오즈먼트 교수는 「도시들 속에서의 종교개혁」의 결론 부분에서, "첫 번째 개신교 종교개혁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정신적인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유산으로 남겨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윌리엄 바우스마는 칼빈주의가 남긴 유산이 지금 현대 사회에 활용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칼빈주의는,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간에, 자본주의와 근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혁명적인 정신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사회적 행동주의와 세속화를 위하여,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경험주의를 위하여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것에 주목하였다.
최근의 종교개혁 연구들에 대해서 참고할 부분들은 활용해야 하겠지만, 신앙심이 없는 메마른 지성주의와 왜곡된 가설에 빠져서 그저 논쟁적인 역사 연구에 그치고 마는 주장들은 면밀하게 가려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