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 종교개혁의 비전과 신학사상의 재발견(4)
나. 인간의 자유의지 논쟁: 루터와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루터가 성취한 중요한 신학적인 공헌들이 수없이 많은 가운데, 그 중에 하나는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나타났다. 루터가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남긴 것은 박해와 대립 가운데서 그가 생애의 절대위기와 고통 속에 빠져있을 때에 나온 것들이다. 루터의 고통은 종교개혁이 전진으로 나가게 만들었고, 그런 중에 남긴 글들은 절정기에 해당하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1517년 95개 조문을 빗텐베르그 대학교회의 광고판에 내걸었던 이후로, 1521년 보름스 의회에 나가기까지 종교개혁자와의 열띤 토론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개혁사상의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 수도사이자 신부였던 루터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통해서 자신이 새롭게 주장하는 것들로 인해서 여러 가지 논증과 토론을 하여야 했는데, 대부분은 엄청난 핍박을 당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엄청난 박해와 협박 가운데서도 그는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지적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사상은 당대 사람들의 심령 속에서 매우 깊은 공감을 불어넣었고, 사상적으로 구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루터의 논제들과 문서들과 토론 주제들 속에는 중세 말기 신학과의 차별성이 확실히 드러나는 바, 성경적인 교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루터는 계속해서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 1519년 라이프찌히에서 토론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옹호하였다. 루터는 자칫 잘못되었으면 자신이 반역자로 몰려서 끝이 나버렸을 것이었는데,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점을 변론했다. 루터는 자신이 개혁자임을 변호하는 장문의 회고록을 죽기 일 년 전, 1545년에 자신의 라틴어 전집 서문에 남겨놓았다. 그는 1519년에 일어났던 일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고뇌했던 바를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나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구절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열심을 방해했던 것은 (로마서 1:17절)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첫 부분에서다. 나는 그 구절을 싫어했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라서 의를 높이시고, 불의한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했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수도사로서 별로 비난받을 일이란 별로 없도록 살아왔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여전히 죄인이라고 판단하여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살아왔었다. 내가 나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실 나는 그분을 싫어했었다. ... 그래서 나는 그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했다. 마침내 밤낮으로 하나님의 의가 그 속에 나타났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구절에 대해서 명상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의인이란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의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구절의 의미이다. 이것을 알게 되자, 즉각적으로 내가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치 내가 천국의 문이 열려서 내가 그 속에 들어갔구나 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성경의 전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빛을 갖게 되었다. ... 그리고 한 때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구절,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사랑하게 되었고, 성경에서 가장 달콤한 구절로 극찬하게 되었으며, 바울의 글 속에 있는 그 구절이 나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칭의론을 깨우친 루터는 그 누구 앞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 참된 기독교 신앙에 관련된 논쟁이 널리 확산되던 중에, 1520년에 이르러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세 편의 중요한 글을 발표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담겨있는 이들 문서들은 "교회의 바빌론 유수", "기독교인의 자유"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호소" 등이다. 루터는 당대 수많은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 성직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점차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고, 이들 명문들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되는 논쟁에 이어서 루터의 명성을 높이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유의지에 관하여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 에라스무스는 당대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던 인문주의 학자였기에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516년에 신약성경을 강해할 때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사본을 사용하였었다.
하지만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성경해석에 담긴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에라스무스가 제롬이나 오리겐에게 심취해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1517년 3월 1일, 요하네스 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에라스무스를 읽고 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그를 싫어한다. ... 나는 그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총이 충분하다는 것으로 더 나아가지 않음에 대해서 걱정한다... 그는 인간사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더 의존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걱정하였다.
1519년부터 1524년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루터가 애정을 갖고 에라스무스에게 동지가 되어 줄 것과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들이 발견된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추구하던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발적인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1519년부터 1524년 사이 독일 각처에서는 루터와의 토론이 쟁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학문적인 논쟁에 대해서 학자를 옹호하자는 입장이었다. 종교개혁과는 멀리 떨어져서 있던 기독교 휴머니즘의 대표자 주자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글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표명하지도 않았었다. 1522년 초,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주장을 공격한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524년 봄,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만일 루터의 주장들에 대해서 에라스무스가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루터도 그에 대해서 조용히 입을 다물 것이라고 제안했다.
1524년 9월,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을 발표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고민하던 인간의 본성 문제를 거론하면서,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심취한 당대 최고 지성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러나 루터는 타락한 인간의 부패에 관하여 극복하는 방법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 뿐이라고만 강조하였으며,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한다는 일방적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며, 이런 것은 교리주의이기 때문에 치명적 약점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신학방법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고 에라스무스는 공격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초대 교부들이 주장했던 자유와 은총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에라스무스는 과연 어떤 사람의 성경해석이 가장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논문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에라스무스는 모든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예정론은 성경 안에 담긴 가르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하심이 사건들의 원인이 된다는 믿음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가 기초가 되기 때문에 회개, 세례, 회심 등의 교리들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은총이란 단순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가까이 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사용하도록 지지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것을 택할 수도 있도록 되어졌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525년 12월,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De servo arbitrio)에서 에라스무스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루터의 반론은 에라스무스의 글보다 무려 네 배나 더 되는 긴 논문이 되었다. 루터는 모든 인류는 타락함으로서 인간의 이성이 손상을 입은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당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정죄 외에는 다른 운명이 없으며,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공로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고 폭로했다.
"만약 그리스도가 그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든 인류가 잃어버림을 당했다고 고백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혹은 사람의 가장 쓸모없는 부분을 위한 구속주였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성모독이자 벌 받을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란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휴머니즘, 즉 기독교 인문주의 철학자였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지만, 그들의 이성이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손상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결코 기독신자의 삶에서 인간의 공로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루터의 반박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었고,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악된 인간은 결국 은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강조하는 이성적인 개혁이란 전혀 쓸모가 없다고 반박했다.
1520년 12월에 펴낸 주장"(Assertio)에서,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정죄선언에 맞서서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네가 지켜야 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선포된 계명에 해서, 사람이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놓고서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사람이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는 것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루터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없다면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되며, 무법적인 상황이 되고 말 것이라고 강변했다.
루터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죄라고 반박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인간 스스로 선택하거나 노력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있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단지 율법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것은 모두 다 헛된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에 해당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여야만 구원이 주어진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그 어떤 의지라도 결국 죄의 영향에 의해서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루터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적인 주권에 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멸망당할 세상의 권주로서 사탄이 방해하고 있기에, 그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실 때에는, 의지를 포함하여 전체 총체적 인격을 다 포함하여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유케 하신다.
루터가 "의지의 노예됨"에서 자주 인용한 에스겔 18장 23절,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결정을 좌우당하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유하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그가 구속하기로 작정한 바에 따라서, 자유로이 용서를 베푸시고, 은혜를 하사하신다. 하나님의 자유하심은 아무런 구원받을 자격이 없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 어떤 사람도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악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단순히 사람의 심령을 단독적으로 변화케 하여 선한 목적을 향해 가도록 돌이키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작품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에라스무스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에라스무스는 그 어느 때나, 어느 글에서나 결코 어거스틴을 칭송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아담의 원죄와 그 직접적 유전을 강조한 어거스틴과는 달리, 에라스무스는 「엔키리디온」 (Enchiridion, 기독교 군사의 교본, 1518년)에서 오리겐의 인간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간에게는 창조성과 존엄성이 있음에 더 무게를 두면서, 인간의 이성적 활동과 교육을 통해서 주어지는 지식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가 전형적인 인문주의적 낙관론을 피력한 것으로, 보편적인 교육과 사회적인 개선을 진행하면 전쟁을 포기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이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사상의 근원적인 뿌리였던가를 들여다 보자. 에라스무스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 대한 오리겐의 해설을 받아들였다. 헬라사상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오리겐이 인간의 세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육체만 철저하게 타락했고, 영은 여전히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영을 강조하면서 휴머니즘적인 낙관주의를 장려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반으로 오리겐의 해석을 활용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적 기독교를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지식적으로만 확장된 중세말기의 또 다른 변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시대에 어거스틴의 글을 읽었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원죄와 부패한 본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이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오고 있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에서 마틴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격돌하게 되었다.
루터의 반격에 깊이 상처를 받은 에라스무스는 1526년 6월에 「자유의지 옹호」(Hyperaspistes diatribae)에 이어서, 제 2차 반론을 1527년 9월에 출판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연이은 공격들은 다소 난해하기도 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지성사회에서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을 모두 다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양편으로부터 불신을 받아서 비극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양쪽 모두의 비판으로 완전히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