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자의 넘어짐은, 지옥행 아닌 은혜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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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완전한 성화만이 칭의의 증거는 아닙니다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칭의받은 성도라도 루터의 말대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에,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란 없습니다. 만일 성화가 완전하다면, 이는 이미 영화의 단계로 진입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웨슬리의 완전주의(John Wesley's Doctrine of Entire Sanctification)'는 너무 나갔습니다. 단, 루터의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론(論)을, "하나님의 판결과 인간의 실제 상태에 대한 역설적인 신학적, 경험적 공존의 성격 규정이며, 그리스도인 내부의 인간론적 갈등의 규정"이라고 해석한 것은 적절합니다. 이 '하나님의 판결과 인간의 실제 상태에 대한 역설적인 신학적, 경험적 공존'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부침(浮沈)을 경험시킬 것입니다.

실제로 지상에서 실패 없는 완전한 성화를 보여준 개인이나 교회는 없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지칭되는 초대교회를 비롯해, 성경에 등장하는 아시아 일곱 교회를 보더라도 완전한 그리스도인 상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성경 밖 교회사 역시 험준한 고비마다 순교자들과 영웅들을 배출시켰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성화 공동체를 이루려는 다양한 실험들 역시 말 그대로 하나의 실험으로 끝났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꿈꾸었던 신앙의 이상향, '언덕위의 도성(shining city upon a hill)'이 그러했고, 16세기 재세례파(Anabaptist)의 천년왕국 역시 그랬습니다. 성화의 실패는 개인의 경험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경험이기도 했고, 그 원인 역시 구성원 개개인의 불완전함 탓도 있으며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반드시 개인의 성화가 교회공동체의 성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온전함과 교회 공동체의 온전함이 별개임을 보여줍니다.

개인은 온전하지만 그 온전한 개인이 교회 공동체라는 구조 속에 유입될 때 반목, 파당, 다툼, 범죄 등에 연루됩니다. 베드로의 외식(갈 2:12-13), 전도문제로 인한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다툼(행 15:37-39), 고린도교회 안의 파당(고전 1:12)과 은사(고전 12-13장)와 간음(고전 5:1) 문제, 헬라파 유대인들의 구제 누락으로 생긴 원망(행 6:1), 애찬에서의 마찰(고전 11:21) 등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서 섞여 사는 이족(異族)의 영향을 받아 온백성이 원망과 불평의 죄에 연루되고(민 11:4), 가나안 정탐꾼의 부정적 보고에 이스라엘 전체가 불신앙의 늪에 빠진 것(민 13-14장) 등은, 개개인의 불완전함과는 별개의 공동체 구조에서 생겨난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 점에 있어, 공동체의 문제는 구성원 개개인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복음주의자들과 개개인이 아무리 완전해도 공동체의 구조악이 사람들을 괴물로 만든다는 사회복음주의자들 간의 해묵은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데, 성경은 둘 다 인정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가라지들과 미성숙한 교회 구성원들이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다양한 성향의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의 온전함을 명령하는(마 5:4) 동시에, 공동체의 선을 위해 힘쓸 것을 요청합니다. 성경이 서로 오래참고 용서하고 용납하며(엡 4:2, 골 3:13),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면한 것도(롬 12:3) 공동체에서의 처신의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지금껏 장황하게 이 문제에 천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변수들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칼빈(John Calvin)이 완전한 교회를 도모하려던 재세례파 교도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지상의 교회가 가진 이런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 "교회는 완전한 성화 공동체보다는 성숙한 성화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 말도 이런 한계의 자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완전한 상태에는 이를 수 없으나 성숙한 상태에는 이를 수 있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는 사랑, 그리고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은 고집 센 아니나 말썽많은 일꾼도 참을성 있게 대한다."

또 성화의 내용에 있어서도 신학과 사상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곧잘 성화를 도덕적 완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은 성화를 신앙적 윤리로 말합니다. 신앙적 윤리라 함은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의 윤리를 뜻합니다. 칭의가 윤리적 의의 승인이 아니듯이, 칭의의 열매인 성화 역시 보편적인 윤리 구현이 아닙니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말대로, 성화는 그리스도 신앙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존 오웬은 성화를 자기 이성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인 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성화에 이르는 유일한 뿌리'이라고 강변했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성화는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성화는 보편적인 윤리의 구현이 아니라 죄로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던 자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태초의 원죄가 인간 사이의 윤리적 범과가 아닌 하나님께 대한 죄,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창 2:17)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던 죄였기에(창 3:5), 칭의와 성화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주이고, 윤리는 거기에 복속됩니다. 칭의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성경은 천명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루터 역시 성화를 죄인이 의롭게 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했지만  그것을 윤리적 경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갈망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의 윤리적인 범과가 반드시 성화(칭의)의 부재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 5:1). 사소하게는 '외식'(갈 2:12-14)이나 '사람을 속이는 죄'(창 27:36-37)에서 시작하여, 크게는 '시부와의 통간(창 38:18)', '계모와의 통간(고전 5:1)', '간음과 살인(삼하 11:4, 17)' 같은 극악한 윤리적 범법까지도 성화(칭의)부재의 확증으로 삼지 아니했습니다.

또한 개개인의 윤리규범 차이가 성화를 일률적인 잣대로 가늠하기 어렵게 합니다. 예컨대 엄격한 교육을 받아 염치, 양보, 이타심이 몸에 밴 사람은 갓 회심한 초신자라도 상당한 수준의 성화를 이룬 것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질 수 있습니다. 반면 식인종이 인육을 먹지 않고, 일부다처가가 일부일처제로 돌아서는 것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성화이지만, 다른 윤리덕목이 추가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성화의 부재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각 사람의 성장 배경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 행위만을 보고 일률적으로 성화를 평가할 수 없음이 명백해지며, 이런 난점들이 성화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더욱 어렵게 합니다.

이어서 성화의 승패가 칭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칭의받은 성도의 투쟁 영역은 성화의 카테고리 안으로 제한되고 칭의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성화의 싸움은 법적으로(외면적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자가, 그 선언적 의(義)를 실제적(내면의) 의(義)로 구현해내려는 투쟁입니다. 예컨대 의롭다 함 받은 자의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와의 싸움이고(벧전 2:11),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약함'에 대한 투쟁입니다(마 26:41).

그러므로 아무리 성화가 탁월하다 해도, 그것이 칭의에 영향을 미쳐 칭의를 보완시키거나 완전케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칭의는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더 이상의 추가나 보충이 필요 없습니다. 동시에 성도가 일시적으로 성화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해서, 그 일시적 패배가 소급하여 칭의를 손상시키거나 무효화 할 수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성화가 칭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가 자기의 출생에 관여하려는 것과 같고, 서양 속담의 '마차를 말 앞에 두는 것(Don't put the cart before the horse)'과 같습니다.

루터의 다음의 말도 같은 관점입니다. "신앙의 열매로서의 행위들은(성화) 구원을 얻게 하지도 보장할 수도 없지만, 신앙 이후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이것은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와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대적자들이 성화가 칭의를 결정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오용하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대해 분명한 변증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5-10)".

여기서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라'는 말은 성화가 택함과 칭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화가 성도의 부르심과 택함에 대한 견고한 증거라는 뜻입니다. 이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라는 말씀이 선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또한 칭의받은 자의 일시적인 성화 실패는 칭의의 실패가 아닌 은혜의 기회가 됨을 말하고자 합니다. 성화의 성공만이 칭의를 증거하지 않고 성화의 실패도 칭의의 증거가 됩니다. 때론 그 실패가 너무 커서 교회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타인을 실족시키기까지도 하지만(창 9:21-25),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됩니다.

이는 성화의 실패까지도 그의 칭의를 견고케 하는데 소용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성화의 일시적인 실패에도 칭의의 실패는 없다는 칭의의 궁극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화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절감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므로 그의 구원(칭의)을 굳게 합니다. 다음의 바울의 고백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넘어짐의 은혜(When Godly People Do Ungodly Things)>라는 베스트셀러로 한국에 잘 알려진 여성 작가 베스 모어(Beth Moore)는, 자신의 숱한 넘어짐 속에서 지혜에 지혜를 배가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그 지혜란 영적 싸움의 주체가 연약한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갈 6:14).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정작 위험한 때는 그의 행위가 온전할 때입니다. 이는 그의 온전함이 자기 의에 배부르게 하여 그리스도께 전적인 신뢰를 바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뢰를 맹독으로 아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역설적 진리입니다. 자기 행위의 온전함(?) 때문에 망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적 온전함이 자기 의에 배부르게 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경청해야 할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자와 비굴한 자의 하나님이시며, 마음이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하나님은 완전하여 스스로의 의에 만족하는 것을 배교만큼이나 악하게 보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과 허물을 통해서만 자신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합니다.

자신이 완전하여 그리스도를 덜 의지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허물져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이 의인, 성자로 호칭되던 신앙의 위인들에게 실수를 허용하신 것도(롬 14:4), 자기 의(義)로 배불러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될까봐서 입니다.

의인이라 일컬어졌던 노아(창 6:9), 믿음의 조상으로 명명된 아브라함(롬 4:16), 성군으로 지칭됐던 다윗(행 13:22)은 그들의 실수를 통해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됐습니다. 비교적 허물이 적었던 욥이나 바울 같은 이들은 고난을 통해 자기 의(義)에 배부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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