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 프란치스코> vs <루터> (上)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기독교 관련 영화들이 연속으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10월 12일에는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 <성 프란치스코(L'ami - François d'Assise et ses frères)>가 개봉하고, 한 주 뒤인 10월 18일에는 <루터(Luther)>가 개봉한다.
영화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교회가 칭송하는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를 건립한 이후의 사건들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 <루터>는 개신교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위대한 신학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가톨릭 성직자로 임명된 직후부터 종교개혁 발발을 거쳐 독일어 성서를 출간하는 시점까지의 행적을 그려 낸 작품이다. 사실 국내 개봉은 올해가 처음이지만, 이 영화는 14년 전인 2003년 독일과 미국의 영화사가 합작으로 제작한 영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의 작품을 다시 소환해서 개봉하는 것이다.
<루터>가 연초가 아닌 10월 말에 개봉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시(市)에 위치한 모든 성인(聖人)들의 교회(Allerheiligenkirche, All Saints' Church) 정문에 95개조 반박문(die 95 Thesen, the 95 Theses)을 처음으로 게시한 날이 10월 말, 정확히 말해 10월 31일이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개봉일은 이 시기를 맞춰 정해진 것이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의 국내 개봉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의아한 측면이 있다. 16세기 가톨릭교회 입장에서 종교개혁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불성설이다. 과거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계기는 될 수 있어도, 흔쾌한 마음으로 기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영화 개봉 시기가 묘하게 겹치는 데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하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날이 10월 3일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매년 10월 4일을 성 프란치스코 축일로 기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작년 10월 4일 이탈리아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됐다. 참고로 프란치스코의 출생지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페루자(Perugia) 지방에 속한 소도시다. 프랑스어로 제작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개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 해도 <성 프란치스코>의 개봉 시점과 관련해 다른 의도가 관여돼 있다는 생각을 쉽게 떨치기 어렵다. 해외에서 개봉된 지 1년이 지난 가톨릭 성인의 영화를, 굳이 개신교 종교개혁 기념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에 국내로 수입해 와서 개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의 내용도 의미심장하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와 함께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의 아이콘으로 지목되는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수입사가 기획한 일종의 묻어가기, 그리고 맞불놓기 전략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기독교계의 시선이 종교'개혁'에 집중된 시점을 노렸다는 점에서 묻어가기의 의도가 엿보이고, 개신교계의 종교개혁 기념 분위기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은근한 불편함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맞불놓기 전략이 엿보인다. 가톨릭교회에도 루터에 못지않은 개혁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영화에 대한 가톨릭 교인들의 호응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프란치스코의 개혁: 격렬한 삶 속의 온건한 개혁
영화 두 편의 내용 및 개봉 시기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의 대결구도가 연상되기는 하지만, 사실 <성 프란치스코>와 <루터>의 동시 개봉은 양측 관객들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도미니코 데 구스만(Saint Dominic, 1170-1221)과 함께 13세기 가톨릭교회 개혁의 기치를 든 인물이고, 한 사람은 16세기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전자는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내부에서 청빈, 헌신, 전도, 선교 중심의 신앙 갱신운동을 이끌었고, 후자는 끝내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까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를 외친 인물이다.
두 편의 영화는 교회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개혁자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 관객들은 교회의 개혁과 개인의 신앙갱신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만일 금번 개봉되는 <성 프란치스코>가 프란치스코의 행적을 다룬 기존 작품들과 유사한 서사구조를 채택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프란치스코와 루터가 주도한 개혁의 성격을 비교해 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다룬 영화 역시 과거에 여러 편 제작된 바 있다. 이 작품들은 거의 다 프란치스코 개인의 회심 이야기를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의 재물 덕에 풍요 속에서 안락하게 살다가, 스무 살인 1201년 기사에 대한 동경을 갖고 이웃 도시국가 페루쟈와의 전쟁에 참여한다.
첫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포로로 잡힌 그는, 집안에서 그의 몸값을 지불하기까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어둡고 음습하며 위생이라곤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장소에 갇혀 고생한 때문인지, 프란치스코는 석방된 후 집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포로생활과 병으로 죽음에 가깝게 다가간 후 세속의 삶에 환멸을 느낀 그는 앞길을 고민하다, 이상(異象) 가운데 소명을 받고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을 처분해 문둥병자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가업을 팽개치고 거지나 다름없는 봉사의 삶을 사는 모습에 크게 분노한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협박과 강압이 통하지 않자, 프란치스코의 상속권 취소 소송을 제기한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와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부친과 절연하고 상속권을 흔쾌히 포기한다.
이후 그는 은둔하는 수도자의 옷을 입고 아무 소유도 갖지 않은 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시작했고, 그의 삶에 감화된 이들이 모여들어 '작은형제회(fratres minores, 오늘날 프란치스코회의 시초)'를 설립한다. 사제 서품도 받지 않은 채 세속화된 성직자들과 다른 길을 걷는 프란치스코의 행적은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자정과 목회 방식 변화를 원하던 교황 이노센트 3세(Pope Innocent III, 1161-1216)에 의해, 프란치스코회는 교황청의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기존의 프란치스코 영화는 모두 프란치스코가 회심을 통해 부유한 상인의 삶을 버리고 전도자로 헌신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서사가 제공하는 감동은 크지만, 프란치스코의 사역이 교회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아직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또 개인적으로도 직접 감상하지 못한 작품이지만, 해외 언론의 간략한 시놉시스 소개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번에 개봉되는 <성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 개인의 회심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프란치스코의 일대기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를 배제하고, 프란치스코와 그 동역자들이 설립한 작은형제회가 교황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달픈 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성인으로서의 프란치스코가 아니라, 개혁을 위해 고뇌하는 한 사람의 사역자로서의 프란치스코를 그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연출의 주된 의도는 현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의 노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 현 교황(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Jorge Mario Bergoglio)은 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교황명(名)으로 채택했다.
그는 역사상 두 번째 비유럽인(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이며, 주교, 추기경 시절부터 교회 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의 각을 세워 온 인물로, 오늘날 가톨릭교회 개혁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적을 보면, 가톨릭교회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인물을 어떤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더하여, <성 프란치스코>의 연출 방식은 개신교계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분위기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이 중점적으로 조명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루터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루터에 못지 않은, 루터보다 온건하고 고상한 개혁자가 가톨릭교회 역사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런 인물의 이상을 현 교황이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루터의 개혁: 평온한 삶 속의 격렬한 개혁
2003년작 <루터>의 경우, <성 프란치스코>의 제작 및 연출 방식에서 보이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의도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제작이나 개봉 시점상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려는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영화의 서사구조 자체는 역사적 고증에 상당히 충실하다. 그리고 특정 시점에 편중됨 없이 종교개혁과 연관된 루터의 생애 전반을 고르게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루터는 프란치스코에 비해 훨씬 격렬한 삶의 여정을 거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개인적인 삶의 모습만 따진다면, 프란치스코가 훨씬 험난한 삶을 살았다. 프란치스코는 평생 무일푼으로 걸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시리아와 이집트 선교를 나서 온갖 고생 끝에 이집트 술탄 알카밀(살라딘의 조카)을 만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가 이집트에 도착한 시기가 한창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시기였음을 고려한다면, 이 선교 여행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반면 루터는 보름스(Worms) 회의에서 이단 판정을 받아 화형당할 위기에 처한 적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선제후 작센 공(公)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보호 하에 비교적 평온한 생애를 보냈다. 독일어 성경 번역과 다수의 신학저서 집필에 힘쓰며 평생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에 있어서는 프란치스코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 루터라는 인물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대부분 전투적인 개혁가의 모습이다. 이는 아마도 루터가 일으킨 개혁운동의 역사적 파장이 워낙 격정적이고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종교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간의 첨예한 교의적, 감정적, 물리적 갈등도 루터라는 인물의 전투적 이미지를 굳히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루터>는 바로 이 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루터의 삶을 묘사한다. 영화는 과격하리만치 강인한 개혁자로서의 루터 이전에, 구원을 갈망하는 한 사람의 신자로서 루터를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 루터는 자신이 유발한 거대한 역사적 격랑에 고뇌하고, 종교개혁 발발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 및 농민혁명 희생자가 발생한 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구원을 향한 믿음 때문에 개혁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삶으로만 봐서는 프란치스코의 삶이 루터보다 훨씬 고생스럽고 치열한데, 그들이 일으킨 개혁의 파장은 루터 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가톨릭교회 기득권 세력을 비판했던 것은 아니다. 프란치스코나 루터 모두 원래는 가톨릭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을 꿈꿨지만, 한 사람의 사역은 원래 의도대로 진행됐고, 다른 한 사람의 사역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두 편의 영화를 관람할 때는 이 질문을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사람이 일으킨 교회 개혁의 차이는 프란치스코나 루터 개인의 성격이나 역량이 달라서라기보다, 두 사람의 믿음과 신학이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당시 가톨릭교회 내부의 사정과 개혁 움직임에 대한 대응방식도 차이를 만들어 낸 요소였고, 유럽의 전체적 사회 분위기도 차이를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지만,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13세기와 16세기의 교회 개혁이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데는, 프란치스코와 루터의 신학적 차이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통으로의 회귀: 어거스틴 전통과 사도적 전승(tradicio apostolico)
<성 프란치스코>에 프란치스코의 사상과 신학이 어느 정도까지 깊게 반영될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교회사적으로 프란치스코의 위상은 개인적인 삶과 간증보다 그가 남긴 신학적 전통에 의해 유지되는 부분이 더 크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동시대의 교회 개혁자인 도미니코 데 구스만(도미니코회 창시자)과 달리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최신 학문으로 각광받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는 무관한 신학을 추구했는데, 기본 골자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거두인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따랐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초기 기독교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이 남긴 말,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를 신앙의 기초 격언으로 삼았다. 물리적인 세상의 경험들로부터 지식을 얻어내는 이성의 논리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그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는 사람의 육체적 감각을 넘어 영혼에 직접 수여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있다고 가르쳤고, 이런 신적인 영감(divine inspiration)의 체험 없이는 절대 온전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프란치스코는 깊이 있는 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처음 소명을 받던 순간부터 이상(異象)과 신비체험을 통해 인도를 받았다.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적도 없었다. 따라서 몇몇 실천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직접 이해하고 해석할 만한 지식도, 권한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권위 있는 해석자의 위명을 힘입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해석자로 어거스틴을 지정했다.
그에게는 영감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스스로의 신앙을 가장 온전하게 대변해 주는 신조나 다름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신학과 사역의 지향점,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복귀해야 할 회귀점이 바로 어거스틴의 신학이라고 굳게 믿었다. 프란치스코의 사상은 이후 프란치스코회의 성장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지탱하는 대표 지류들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어거스틴의 신학적 업적이야 두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것이지만, 사도들과 제자들이 남긴 사도적 전승(tradicio apostolico), 즉 신약성서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프란치스코회는 청빈, 정절, 헌신 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 있어 탁월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반적으로 성령의 영감을 힙입은 신자들 개개인의 직접적인 성경 해석보다 가톨릭 교회의 성경 해석에 더 큰 권위를 두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이단 판정을 피하고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개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와 루터의 가정환경은 비슷한 면이 있다. 두 사람 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루터는 당대 최고 수준의 엘리트로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프란치스코와 큰 차이를 보인다. 루터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법학박사 과정을 밟다가 뜻한 바 있어 신학으로 전공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절연 직전까지 가는 갈등을 겪었는데, 이 부분은 프란치스코와 비슷하다.
루터는 당대 철학 과정의 기초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두루 공부했고, 신학적으로는 당시 한창 유행했던 스콜라 신학의 유명론(nominalism)을 깊게 공부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이 섭렵한 철학적-신학적 지식이 구원을 얻는 데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깊게 고민하는 가운데 개혁의 단서를 얻었다. 루터가 획득한 지식, 그리고 성직자 및 학자로서의 지위가 그에게 도움이 된 바가 있다면, 헬라어, 라틴어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수여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와 달리 루터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성경해석에는 환멸을 느끼면서, 성경 자체를 읽고 해석하는 데 절대적인 소망을 두었다.
결국 루터의 신학과 사역은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담긴 사도적 전승, 즉 신약성서를 지향점 및 회귀점으로 삼고 있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그토록 격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경 해석보다 성경 자체가 가르치는 바를 중시한 루터의 개혁은, 프란치스코 때와는 달리 가톨릭교회의 권위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면죄부 판매가 종교개혁 촉발의 주된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프란치스코가 교회 개혁을 추진하던 13세기에도 헌금 면죄부는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왜 면죄부 문제를 눈감고 넘어갔을까? 왜 루터만 유독 헌금 면죄부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을까? 이는 바로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하는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권위 그 자체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루터>, 이 두 편의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면 이 점을 중요한 관람 포인트로 삼기를 바란다. 시놉시스만으로 봐서는 <성 프란치스코>에 묘사된 프란치스코의 성품과 개혁방식이 <루터>에 표현된 루터의 성품과 개혁방식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고상하며 매력적인 면모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헤아려 보면, 프란치스코는 성경의 직접적 가르침보다 어거스틴의 가르침과 가톨릭교회의 성경 해석이 가진 권위를 우선했고, 이 점이 바로 온건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교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주원인으로 작용했다.
반면 루터는 개인적 성품이나 고난의 정도에 있어 프란치스코에 뒤지는 면이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프란치스코의 개혁에 비해 거칠고 폭력적인 결과를 여럿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오직 성경'을 개인의 신앙과 교회 사역의 지향점 및 회귀점으로 삼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프란치스코의 개혁과 차별되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의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