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 프란치스코 vs 루터(中)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상부성당 내벽에는 중세 이탈리아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그린 프레스코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만을 간추려 묘사한 이 벽화들은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의 순례객과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오토는 벽화를 그리기 위해 프란치스코의 공식전기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Legenda Maior)>를 참조했다. 이 전기는 후대 프란치스코회 총장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13세기 중반 동년배 파리 대학 동문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것으로 유명한 천재 신학자였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지오토의 벽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오상(五傷, stigmata)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장례식>을 들 수 있다. 이 두 편의 벽화는 프란치스코의 생애 마지막에 나타났던 신비한 현상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애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이탈리아의 라 베르나(La Verna) 산의 동굴에서 혼자 고행하며 기도하던 중 특별한 이상(異象)을 목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란치스코 사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는 엘리아 수사(Elias of Cortona, 1180-1253)의 기록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산에서 기도 중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자신의 앞으로 내려오시는 장면을 목격한다. 프란치스코가 본 그리스도는 여섯 날개 달린 스랍(seraphim) 천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이상을 목도한 후, 프란치스코의 몸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생긴 다섯 개의 상처(십자가에 못박인 두 손, 두 발의 상처와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가 실제로 생겨났다는 것이 엘리아의 진술이다.
가톨릭 전통에는 다양한 신비체험이 존재하지만,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흔(聖痕)이 직접 몸에 새겨진 경우는 프란치스코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록으로 인해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교회가 기리는 성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기록과 전승 내에서 프란치스코는 자주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는 칭호를 받는다.
금번 개봉한 영화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fratres minores) 지도자 프란치스코를 '제2의 그리스도'로 믿는 가톨릭 교회의 정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의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교회 신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온건하면서도 극히 겸손한 개혁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의 프란치스코는 숱한 고난과 고뇌로 점철된 삶을 감내하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일치된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로 규정된다.
제2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단순히 호칭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마치 성체성사 때 피와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The 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의 오상도 실제 물질적인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풀이되고 있다.
영화 <성 프란치스코>가 가톨릭 신앙의 이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흠잡을 데 없다.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라 그런지 영화의 연출, 대사, 인물표현 방식, 그리고 분위기가 지극히 가톨릭적이다. 미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제작한 영화였다면 가톨릭 신앙의 근본정서를 이렇게까지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와 비슷한 예로 불교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을 들 수 있다. 과연 이 영화가 한국에서 제작되지 않았다면, 그 속에 담겨 있는 특유의 선불교적 정서와 사상을 그토록 가슴에 스며들게 전달할 수 있었을까? 종교는 다르지만, <성 프란치스코>라는 영화 역시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진수를 표현하는 데 이 영화가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바가 있다. 개신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톨릭 교회는 사람의 신격화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 사이의 간과하기 어려운 본질적 차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교회 신앙의 정서가 여전히 서구 철학 및 인간 이해의 가장 근원적인 동기, 즉 자기 신격화(self-deification)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이 자기신격화 욕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복음과 청빈: 두 벌 옷이나 지팡이도 갖지 말며...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 프란치스코는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유년 및 청소년기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가업을 이어받을 예정이었으므로,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인구의 태반이 문맹이었던 12-13세기에 라틴어를 구사하고 상황에 맞게 적절한 화법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신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은 라틴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일, 혹은 화술을 배우고 장사의 기술을 익히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과업이었다. 신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최고 교육과정 과목들(신학, 법학, 의학)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과목으로, 대학의 학생들 중 가장 전도유망한 학생들이 몰려 있는 학문이었다.
12-13세기 당시 성경을 비교적 자율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은 주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성직자들이었다. 일반 교구 성직자들은 대부분 수도원이나 교회의 하부 교육기관에서 교의 교육을 받았다.
이들도 설교를 통해 성경에 대한 이해를 일정 부분 전달할 수 있었으나,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이들에 비한다면 그 한계가 명확했다. 이들 전문 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면 로마 교황청에서 그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심사하고, 심사에 통과한 교리를 다시 수도원이나 하부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식으로 교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제 교육을 받지 못했던 프란치스코는 성경과 교의 교육이라는 면에서 보면 흔한 교구 성직자보다 전문성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사역 방식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본격적인 사역 시작 직전이었던 1208년 2월 24일, 성 맛디아 축일에 아시시 지역의 교구 사제로부터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 대한 설교를 듣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마 10:9-12)."
이 설교에 큰 감동을 얻은 프란치스코는 이후 평생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무보수로 병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며, 어디에서든 화평을 구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았다. 옷은 낡고 거친 수사복 단 한 벌만 갖고, 먹을 것은 타인이 주는 바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는 이런 사역 방식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라고 여겼다. 프란치스코회 가입과 탈퇴는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일단 프란치스코의 신앙의 길을 따르기로 한 상태에서는 그가 정한 사역 방식을 지켜야만 했다.
자신의 사역 방식에 공감하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프란치스코는 이단 논쟁을 피하기 위해 필히 작은형제회 회칙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1209년 그는 <삶의 방식(Forma Vitae)>이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회칙을 작성해 로마 교황청에 인가를 신청했다.
◈복음과 회칙: 온전한 복음과 부분적인 복음
영화 <성 프란치스코>의 서사는 바로 이 회칙을 작성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교황청의 첫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은 교회의 현실을 부정하는 허황된 이상으로 여겨졌다.
사실 이 회칙의 원본은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프란치스코회 회칙은 그보다 약 12년 후인 1221년에 새로 작성된 <인준받지 않은 회칙>(Regula Non Bullata), 그리고 1221년의 회칙을 법적인 문서로 가다듬은 1223년의 회칙(Solet Annuere)이다.
가톨릭 수도회 회칙이란, 개신교로 말하자면 특정 교단의 신앙고백 혹은 교리문답에 교회 정체(Church polity) 원리를 합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해당 수도회에 소속된 이들의 신앙과 사역과 삶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1209년의 회칙 작성 과정에 픽션의 요소를 가미해 서사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성 프란치스코는 이론의 깊이는 얕으나, 그 실천에 있어서는 거의 편집증이라 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지도자다. 작은형제회의 첫 회원이자 프란치스코의 친구였던 엘리아는 프란치스코의 신앙에 깊이 감화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사역 방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우려와 회의감을 표시한다.
엘리아가 간언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기 수월하도록 회칙을 변경할 것, 둘째는 '전적' 빈곤이라는 원칙을 '어느 정도의' 청빈으로 수정해 달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사역, 특히 병자와 빈자를 돌보는 사역이 수도회 전체의 전적 무소유 원칙 때문에 별 진전이 없었던 까닭에 엘리아는 간곡한 태도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이 둘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프란치스코회 내부에서 프란치스코의 방침을 충실하게 따르려는 수사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사역 방식을 원하는 엘리아 측 수사들 간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분열 앞에서도,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프란치스코의 태도는 의연하기만 하다.
교황청은 세 가지 부분에서 회칙 수정을 요구한다. 첫째 수사들의 무조건적 가난 요구를 삭제할 것, 둘째 적이나 범죄자가 도움을 구할지라도 환영하고 받아주라는 권고를 삭제할 것, 셋째 수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문구를 삭제하고 교회의 권위를 따르라는 것으로 권고 내용을 수정할 것.
프란치스코는 이 세 가지를 회칙의 핵심으로 보고 수정을 거부하나, 엘리아는 프란치스코의 건강이 악화된 틈을 타 일방적으로 회칙을 수정한 뒤 교황청에 인준을 신청한다. 결국 교황청의 1차 인가는 얻어냈지만, 프란치스코와 엘리아 두 사람의 신뢰는 흔들리게 된다. 서로 감정적으로 반목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사역의 주도권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 같은 것도 전혀 관여돼 있지 않았지만, 사역의 순수한 초심과 효율성에 대한 입장 차이로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프란치스코의 사망 직전까지 만나지 못하게 된다.
영화의 서사는 이 과정에 허구적 요소를 첨가한다. 프란치스코 전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회칙의 수정을 두고 수사들 간에 일부 견해차가 있었던 정황은 포착되지만, 영화에서 제시한 정도의 구체적 정황이 알려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1209년 작성된 회칙은 원문이 소실된 상태라 어떤 내용이 논란이 되고 수정이 되었는지 알기가 어렵다.
교황청의 세 가지 수정 요구라든가, 엘리아가 프란치스코의 의도에 상관없이 수정을 가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허구에 가깝다. 실제 역사에서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프란치스코가 처음 제출한 회칙이 과도하게 이상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프란치스코가 교회를 지키고 일으켜 세우는 꿈을 꾼 후 구두로나마 제출된 회칙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영화가 이처럼 회칙 작성과 관련된 갈등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데는, 프란치스코를 성인 이전에 한 사람의 확고한 교회 개혁자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프란치스코의 단호함을 복음에 대한 순전한 열정으로 규정한다.
◈복음과 유전(遺傳): 온전한 복음과 부분적인 복음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프란치스코 개인의 열정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철학과 신학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는, 혹은 교황의 전횡으로 어그러진 당시 가톨릭 교회의 성경해석에 비해, 프란치스코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재리와 세속의 영예에 눈독을 들이던 당대 수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에 비한다면, 프란치스코의 복음 이해와 실천의 가치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숭고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프란치스코의 친구이자 측근인 엘리아가 지적한 것처럼,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극빈의 사역 방식은 현실에서 하나의 회(會)를 온전하게 이끌어 가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사후에도 이에 대한 논란이 해소되지 않아,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코회 총장을 맡을 당시에는 프란치스코회가 둘로 분열되고 만다. 보나벤투라는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대학 강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코회 분열 사건만 없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못지 않은 신학적 업적을 남겼으리라는 것이 중세 교회사가들의 중론이다.
이처럼 사역의 현실성 여부도 문제지만, 프란치스코의 복음 이해와 사역 방식이 참으로 복음의 원뜻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프란치스코의 사역 방식을 결정한 성구, 즉 마태복음 10장의 명령을 직접 받았던 사도들조차 평생 그 명령만을 붙들고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두 벌 옷도, 아무 소유도 갖지 말고 전도에 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십자가의 죽음을 기점으로 갱신된 듯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 더 이상 사도들의 삶에서 이 명령은 지배적인 효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흔히 오해하고 있는 바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초대교회 및 2-3세기 초기 기독교회는 물질적으로 빈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넘칠 지경이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교회에는 빈궁한 자도 많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재력을 갖춘 지주나 자산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소유를 전부 교회에 헌신했고, 사도들은 이 헌금을 전도 활동을 유지하고 교회 내 극빈자들을 먹이고 돌보는 데 사용했다.
헌금, 즉 교회가 소유한 재산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7인을 안수해서 공궤를 맡는 일에 투입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위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일곱을" 택하여 안수하고 공궤를 맡게 했다(행 6:1-6).
오늘날로 치면 헌금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역과 구제를 집행하는 일을 총괄하는 인력, 즉 재정을 맡는 집사나 장로를 7명이나 두었다는 말과 같다. 지혜로운 자 일곱 사람이 합심해서 돌아봐야 할 정도로 헌금의 관리 및 집행 규모가 컸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록은 기독교회가 본격적으로 핍박받기 이전의 일을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에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빈궁했을까? 시기별, 지역별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복음에 감화된 지주나 재력가는 어느 시기나 존재했고, 이들 중 다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마 19:23)"는 말씀을 유념하며 재산의 전체 혹은 대부분을 헌신했다.
이 풍성한 소유를 바탕으로 초기 기독교회는 사역과 구제 활동을 이어갔다. 2-3세기의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회는 유일하게 대규모로 자선을 베푸는 기관이었다. 이 점을 알고 있던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는 259년경 비어버린 제국 국고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핍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 일은 교회의 소유를 노리고 기획된 박해가 존재했을 정도로 교회의 재정 상태가 양호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대형 예배당을 세우는 데 급급하거나 일부 그릇된 목회자들의 치부를 위해 헌금이 전용되는 일이 없었기에 교회 재정이 풍부했다는 사실이 묻힌 것 뿐이다. 핍박받던 시기의 초기 기독교회는 사역과 구제를 위해 충실하게 헌금을 집행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치스코의 성경 이해는 깊거나 넓은 편이 아니었다. 여러 설교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경 말씀을 전달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성경 전체를 깊게 탐독하고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기독교 수도회면서 성경 한 권도 없었느냐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프란치스코회 전체가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고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리 의아한 일도 아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Gutenberg)의 활판인쇄술이 나오기 전까지 성경은 전부 고급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필사본이었고, 따라서 당시 성경 한 권의 가격은 오늘날 한화 가치로 대략 5-10억원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된다.
결국 프란치스코의 헌신적 열정과는 별개로, 여러가지 사정이 겹친 탓에 그의 사역은 불완전한 복음 이해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고행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까지 관여된 까닭에, 프란치스코의 사상은 복음의 원뜻과는 멀어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개인의 물욕을 경계해야 함은 당연하나, 온전한 사역의 수행을 위해 헌금을 보관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는 것까지 가로막은 처사는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나 부당한 일이었다. 전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몸의 고난은 필연적인 일이나, 굳이 자발적으로 의료적 혜택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죽여가면서까지 고행에 집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결국 빈약한 성경 이해로 인해 프란치스코의 신앙과 회칙은 온전한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다른 하나의 "장로의 유전(마 15:2)"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복음과 신격화: 신격화의 프레임에 갇혀 버린 위대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 신앙의 정서는 프란치스코의 삶을 이상적 신앙인의 삶으로 떠받들어 칭송한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서구 특유의 자기신격화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저명한 서양 고대 및 중세사상 연구자인 앤드루 라우스(Andrew Louth)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라우스는 그의 저서 <기독교 신비 전통의 기원(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에서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의 주된 기원 중 하나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을 통해 기독교 신학에 유입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신플라톤주의는 끝없는 철학적 사유와 영감 획득에 대한 희구, 그리고 육체의 욕구를 부인하는 철저한 금욕적 생활을 강조한다. 그 궁극적 목표가 사람 스스로의 힘에 의한 자기 신격화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의 언어를 빌어 새롭게 해명했고, 이로써 중세 가톨릭 신학의 주된 흐름을 결정했다. 물론 어거스틴은 자기신격화라는 동기를 철저히 배제하려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중세 초반의 기독교 신학은 사람의 신격화를 거부하는 입장을 거듭 표명해 왔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 및 성직자 계층이 직면하거나 자초했던 여러 교회사적 위기 상황들은 시시때때로 이 신격화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슬림들과의 전쟁을 위해, 교회의 허물을 덮기 위해,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그 외 갖가지 이유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자주 성직자 및 성인들의 신비체험을 내세워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프란치스코의 성흔, 즉 오상 체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칭송은 바로 이런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체험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체험을 기반으로 그를 '제2의 그리스도'로 칭하는 처사는 신비사상을 통해 전해져 오는 서구 고유의 신격화 욕구를 표출한 것에 다름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루터는 극렬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가톨릭 교회가 자행해 오던 성인 시성(諡聖, canonization), 성인 유골 및 유물 숭배 사상, 그리고 성상 숭배의 행태는 루터의 가톨릭 교회 비판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루터 역시 프란치스코를 존경했고, 한때 그를 교회 개혁의 모범으로 삼기도 했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는 프란치스코 식의 개혁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개혁이 빈약한 성경적 근거를 기반으로 수행되었다는 점에 대한 성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프란치스코를 신격화하는 가톨릭 교회의 행태에 염증을 느껴서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영화다. 영화의 표현 방식 또한 예술적이다. 특히 고독하고 삭막한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한 영상미가 눈을 사로잡는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고난 가득한 삶을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동시에 세속과 사람에 구애받지 않는 프란치스코 특유의 신학적 영성을 표현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정신, 즉 온전하고 전체적인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개신교 종교개혁 정신의 입장으로 볼 때, 이 영화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신비사상과 종교적 신격화 욕구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써 영화 <성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의 삶이 담아내고 있던 인간적 위대함조차 희석시키고 있는 듯하다. 청빈의 삶에 대한 그의 순전한 열정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위대함이 신격화라는 종교적 사고의 틀에 붙잡혀 갇히게 되고 만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