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이 "본사 화장실들을 남녀공용으로 개조하기 위해 2년째 디자인을 연구하여 완성 단계"라고 자신의 SNS에서 밝혔다. 정 부회장은 SNS를 적극 활용해 온 인물로, 공식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해 "남녀 공용으로 하면 수용 능력이 몇십% 올라가고 기다림이 대폭 준다. 다만 거부반응과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고려들이 필요하다"며 "예를 들면 차음, 환기, 온도, 여성전용 파우더룸의 확보 등"이라고 주장했다.
이 글에 설왕설래가 이어지자, 정 부회장은 "검토 중간에 합류한 어떤 미국 디자이너는 화장실이 남녀 구분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의 이야기이고 (남녀 구분된 화장실이) 남녀차별, 인종차별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며 "공간 합리화를 넘어서 (남녀공용 화장실이) 사회적 대의가 있다며 열정을 보임"이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화장실이 남녀 구분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의 이야기'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틀리지 않다. 우리나라만 해도 전통적으로 '성중립 화장실'을 사용해 왔다. 바로 '뒷간'이다. 디자인도 심플하다. 아래가 뻥 뚫린 '구멍' 하나로 모든 걸 해결했다. 실용성도 뛰어났다. 지금의 수세식 대신 '푸세식'으로, 대·소변이 떨어지는 곳에 '똥돼지'를 키우면서 다용도로 활용했다.
그러다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보건위생을 고려해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바뀌었고, 남녀 구분도 생겼다. 하지만 지금도 오래된 건물에는 화장실 '남녀 구분'이 없다. 일단 공간이 부족했고, 의식도 부족했다.
남녀 화장실의 구분이 시작된 것은, 이성(異性)이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어딘가 불편하다는 이성(理性)적 판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범죄에 활용될 우려가 높고, 남성도 여성도 불편하고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까 두려워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위생과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구나 화장실 남녀 구분이 근대에 와서라는데, 서양에서는 근대 이전까지는 '화장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화장실 남녀 구분이 남녀·인종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팩트'와 거리가 멀다. 일반 가정에서는 화장실을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하지만, 변기도 하나이므로 화장실 안에서 남녀가 마주칠 일이 없다. 무엇보다 ‘가족’이니 가능한 일이다. '화장실이 남녀 구분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의 이야기'라는 디자이너의 말 자체가, '성중립 화장실'이 전근대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현대카드의 '성중립 화장실'이 어떤 디자인을 가미했고, 이용을 불편해할 직원이나 고객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남녀가 내부에서 다른 칸을 사용하도록 설계했다면, '성중립 화장실'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내세우진 않지만 그들이 '픽토그램'으로 밝히고 있는 성중립 화장실의 '진짜 대상'인 LGBTQ이든, 같은 칸을 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성중립 화장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고 있는 정 부회장도 자신의 화장실을 기꺼이 '성중립 화장실'로 만들어 직원들과 공유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리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화장실을 함께 사용할 경우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불편들이 예상된다. 그런 불편을 호소하는 대다수 이용객들을 위한 '남녀 구분 화장실'은 남겨뒀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많은 고객들이 힘들게 벌어 힘들게 쓰는 카드 수익금과 서민들을 상대로 한 대부업으로 벌어들인 이자수익으로, 이런 '전근대적'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얼핏 시대를 앞서가고 트렌드를 이끄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뒷간' 시대로의 퇴행이다. ‘뒷간’의 현대(카드)적이고 창조적 재해석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그나마 회사명에 걸맞는 안목이다.
현대카드와 정태영 부회장은 고객과 직원들에 대한 이 같은 '갑질'을 당장 그만둬야 할 것이다. 이런 사안에 2년을 투자했다는데, 주주들의 동의를 구했는지도 의문스럽다. 이 정도면 '현대카드 불매운동'이 일어난다 해도 막을 명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