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부터 요한까지… 네 개의 복음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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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욱 목사의 북토크 11] 복음서 전승사

복음서 전승의 기원
비르거 게할더슨 | 배용덕 역 | 솔로몬 | 130쪽 | 절판

주 예수의 복음
마이클 F. 버드 | 신지철 역 | 새물결플러스 | 684쪽 | 33,000원

복음서 비평은 오래된 논쟁입니다. 현대적 비평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시작된 논쟁입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마르시온의 경우, 신약 성경에서 구약적 뉘앙스를 풍기는 모든 본문을 삭제합니다. 또한 일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개작하여 자신만의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외경의 경우 기존 성경을 마음대로 가져와 자신의 의도대로 개작하거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예수를 서술하는 기이한 형태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교회 안에서 정경으로서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몇 가지로 정하게 됩니다.

①사도성 또는 사도 저작 원리 ②신약의 규칙 ③성경의 자증 ④성경의 내적 증거 ⑤교회의 의견 일치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은 변증을 위한 목적 때문에 후대에 생겨난 것으로, 교회 안에서는 이미 사도들의 편지가 정경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초기 교부인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는 이미 신약 정경의 목록을 거의 비슷하게 언급합니다. 이것은 2, 3세기 교회 안에 이미 어느 정도 정경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던 4세기 교부인 암부로시우스는 외경에 속하는 '토빗'을 설교 본문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록 정경화가 이루어져 있지만, 특별히 이단성이 확연한 외경이 아닌 이상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정경화의 역사는 '신약의 정경론'을 따로 살펴야 합니다. 정경론은 초대교회의 역사와 맞물려 있고, 이단과 교회의 핍박으로 인한 성경 소실과 회람 문서로서의 성경의 의미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정경론이 아닌, 성경이 기록되고 성경으로 자리잡게 되는 복음서의 정경의 문제를 살필 것입니다.

한 권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비르거 게할드슨의 <복음서 전승의 기원(솔로몬)>, 다른 한 권은 올해(2017년) 번역 출간된 <주 예수의 복음(새물결 플러스)>을 살펴볼 것입니다.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비르거 게할드슨(Birger Gerhardsson)은 스웨덴 루드대학 신학교수이며, 구술 전승에 관련된 저명한 학자입니다.

<주 예수의 복음>을 쓴 마이클 F. 버드(Michael F. Bird)는 매우 젊은 학자(1974년생)임에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미래가 촉망되는 학자입니다. 그는 멜버른 소재 리들리대학 신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신약학과 성서신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학자입니다.

이 책은 2015년 'Christianity Today's Book Awards' 상을 받을 만큼,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책입니다. 부제는 '초기 교회는 예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했는가'인데,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권 속에서 복음서가 어떻게 기록되고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교차 읽기를 통해 정리할 것입니다.

1. 복음서의 탄생

현재 신약 복음서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기록으로 만들어진 네 권이 있습니다. 앞선 세 권, 마태-마가-누가 복음은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됐다 하여 '공관복음'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서술 방식에 있어 비슷한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 복음서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과 비교했을 때 세 권은 동일한 범주에 넣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공관'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집중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요한복음이 해석에 가깝다면,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보존, 그리고 해석이 가미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의 경우 서술 방식에 있어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공생애 후기에 들어가는 성전 청결 사건이 초반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 비해 유난히 설교가 많고,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세기 후반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와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정경론적 관점에서, 신약의 완성까지는 몇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복음서의 경우, 먼저 예수님의 생애가 존재합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합니다. 절대적 확정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마가와 마태 등이 사도들의 권위 아래 예수의 생애를 헬라어로 기록합니다. 누가도 잠시 후에 참여하게 됩니다. 대체로 마가복음은 60-75년 사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기록됐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경우는 조금 더 늦은 70-90년 사이로 추정합니다. 마태복음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로마와 그 외 여러 지역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기록됐다고 봅니다.

누가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붓을 든 자가 많다'는 표현을 통해 당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와 생애, 기적 사건들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수많은 복음서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말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교부 문헌 속에서 네 복음서 외에 다른 복음서의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서들이 기록된 초기부터 네 복음서 외에는 교회 안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기록된 복음서는 '회람 서신'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일반 서신서뿐 아니라 신약의 대부분의 문서들은 회람을 목적으로 쓴 것들입니다. 한 기록물을 다른 지역 교회에서 보기 위해 손으로 필사하게 됩니다. 여기서 다양한 사본들이 존재하게 되고, 동일한 본문이라 다른 단어로의 잘못된 기록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일부를 삭제하거나 증보하여 개작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마가복음의 끝 부분은 고대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본이 갖는 권위와 어느 것이 좀 더 원본에 가까운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문제는 사본 차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인데, 그것은 '복음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입니다.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구전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입니다. 마이클 F. 버드는 1장에서 "구전 복음에서 기록 복음으로의 움직임은 점진적이며 불가피한 일(69쪽)"이라고 단언합니다. 즉 초기에는 사람들의 '입'에 복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의 '증언'과 같은 사도들의 증언들입니다. 처음 복음서가 기록된 당시 사람들은 문서가 아닌 구전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단편적인 글로 남기게 됩니다. 이것을 마가가 최초로 수집하여 최종적인 예수의 생애 전반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연구는 필연적으로 구전과 문서 비평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구전이 아닌 처음부터 복음서는 문자로 완성된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문서로 완성된 복음서나 구술 형태로 전해오는 복음서가 큰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전승 과정 속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구술은 언제든지 변형이 가능하지만, 문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승 과정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2. 복음서의 전승

-예수 전승과 역사적 예수

복음서를 먼저 논하기 전에, 우리는 쇠퇴했지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논쟁을 잠깐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두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케리그마)입니다. 역사적 예수 논쟁은 초대교회 후기 이후 정형화된 교리의 예수가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조명합니다.

역사적 예수 논쟁은 중세와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등으로 인해 심각하게 교리화된 기독교를 새롭게 보려는 반동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교리보다 삶을 강조했던 초대교회로의 회귀(回歸)입니다. 버드는 이것을 '예수 전승(76쪽)'으로 명명합니다.

예수 전승은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실제적 예수 이야기(생애)와 해석(케리그마, 교리)이 가미된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논쟁은 '역사 속에서 살았던 예수'를 조명함으로써,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배경, 문화적이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팔레스타인 등을 찾아갑니다. 비록 결론을 '정치적 예수'로 왜곡시키기는 했지만, 역사적 예수 논쟁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야기와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석, 그리고 전승의 의미들입니다.

버드는 리처드 보컴을 인용하여 초대교회는 "부활하고 승천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재는 바로 이 과거 역사 속에서 유래한 결과(80쪽)"로 인정했다고 말합니다. 즉 케리그마는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로부터 왔으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기독의 창시자로서 절대 또는 최종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도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던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 속에 예수 전승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갈 4:6),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법(고전 9:21)'으로 명하는 것 등입니다. 예수 전승의 초대교회 전반의 문제와 연결돼 있으며, 이단을 대적하고, 삶의 모범을 정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으로서도 작용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역사적 예수와 그가 전한 가르침(설교, 케리그마)이 어우러진 '복음'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 뷔쉬코그가 말한 것처럼 "케리그마, 곧 현존하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과거의 예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76쪽)"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담론의 결과, 예수님의 삶과 교리가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임을 압니다. 복음서 기록, 즉 예수 전승의 보존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복음서는 곧 '예수 자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숭배 사상이 아닌 복음서의 내용이 예수의 권위와 성도의 모범된 삶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전승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남기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기억하는 일은 초기 교회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그 기억을 보존하는 수단을 갖추고 있었다(버드, 146쪽)."

"바울 당시의 초기 기독교는 그 나름대로의 전승-많은 전승들을 포함하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 전승을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중에게 전해 주었으며, 회중들이 그 전승을 받고 또한 그들이 후에 그 전승을 가지고(보관하고) 오래 지탱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바울 당시의 초대 교회에서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며 프로그램에 입각한 전달이 존재하였다(게할드슨, 41쪽)."

-전승의 방법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렇게 모아진 예수 전승들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형태로 전승됩니다. 하나는 구술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입니다. 버드는 예리하게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제자들의 문서에서 "예수의 말씀은 구전과 기록 전승이 결합돼 있다(170쪽)"고 말합니다.

즉 기록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이 있고, 아직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구술로 흩어져 전해오는 전승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게할드슨은 복음서의 전승을 유대인들의 토라 구두 전승에서 가져옵니다. 토라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전승하기 위한 몇 가지의 장치가 있습니다.

①암기: 문자의 역사는 오래 됐지만, 실제로 보편화된 것은 불과 두 세기도 되지 않습니다. 한 나라에서 문맹률이 80% 이하로 떨어진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이전에는 모두 암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말한 것을 세밀하게 듣고, 입으로 되뇌면서 그것을 암기합니다. 게할드슨은 암기를 "정보를 존속시키는 명백한 대중적인 수단(26쪽)"이라고 바르게 지적합니다.

②본문과 주석: 즉 풀어쓰는 방식입니다. 먼저 본문을 배우고, 그 다음은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석, 주석, 또는 주해입니다.

③반복: 고대 로마 사람들은 "반복이 지식의 어머니(28쪽)"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암기한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되뇌면,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이해됩니다. 어려운 한 권의 책도 백 번을 읽으면 뜻이 자동으로 통한다는 '독서백편 의자현'이란 명구도 있습니다.

④암송: 암기는 단지 외우는 것이지만, 암송(recitation)은 운율을 넣어 노래하듯 암기하는 방식입니다. 즉 입으로 암기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묵상(하가다)과 닮아 있습니다.

⑤기록: 쓰기는 또 다른 기억법입니다.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쓰면서 오감으로 암기하는 것은 대단히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성경의 서기관(소페르)들은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들은 율법 교사들로 불렸습니다. 필사(筆寫)는 문학에서도 어느 한 작가의 문체와 사상을 익하는데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필사를 통해 또 다른 배움과 암기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총명한 마이클 F. 버드는 이 지점에서 기억을 개인적 전승이 아닌 집단적 기억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는 제임스 던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회적 기억 안에서의 예수(199쪽)"로 명명합니다. 즉 한 사람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 전체가 기억합니다. 한 집단의 동일한 기억은 동일한 해석입니다.

전승의 공간 즉 예수와 복음서 사이에 있는 간격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200쪽)"이고 표현합니다. 기억된 예수는 말로 설명되고 공유되고 전파됩니다. 말은 다시 삶을 통해 재현되고, 몸에 새기게 됩니다. 크로산 같은 학자는 암기에 의한 구술 전승에 실수가 있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창(唱)의 예를 들어보면, 구술 전승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이어집니다. 구술 전승의 탁월함으로 인해 초기 복음서들이 기록문서보다는 구술 전승에 더 의존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구술과 기록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왜 네 복음서인가를 살펴봅시다.

3. 왜 네 복음서인가?

네 복음서는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작 시기도 다르고, 독자들도 다릅니다. 학자들은 일정 지역에서 어느 복음서가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로마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복음서였고, 마태복음은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지역 기독교 유대인들에게 권위 있는 복음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에도 마태복음이 필사되어 회람되고, 요한복음도 필사되어 회람됩니다. 그럼 교회는 어느 복음서에 비중을 둘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도마복음과 같은 이단적 복음서를 배격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레니우스나 유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네 복음서를 지지했지만, "마태복음을 압도적으로 선호(549쪽)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안에서는 마태복음이 절대적 지지를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복음서도 동등한 위치에 올라갔고, 결국 네 복음서가 한 권으로 엮어지게 됩니다. 마이클 F. 버드는 사복음서의 출현 이유를 '교회의 세계적인 네트워크(579쪽)'로 말미암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신학 관점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여행하며 다른 신앙공동체가 사용하던 저서들을 공유하고 필사함으로써, 또한 그 저서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고안한 문서 형태 안에 수록함으로써 마침내 사복음서 모음집이 생겨나게 되었다(580쪽)."

'왜 네 복음서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단지 네 명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했고,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초대교회 안에 회람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넷'이라는 숫자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 '사복음서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라(583쪽)'고 했습니다.

이레니우스의 주장에는 영적 해석이라는 독특함이 있으나, 과학적 서술은 아니었습니다. 버드는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변증, 교훈, 사회적 합법화, 예배 및 복음 전파가 혼합(507쪽)'돼 있다고 하고, 널리 유포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저자의 책들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네 복음서가 가지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먼저 기억에 대한 열정입니다. 공동체의 기억은 해석이며, 관점입니다. 교회의 집단 기억은 신앙고백입니다. 동일한 기억은 동일한 신앙고백입니다. 기억에 대한 열정은 예수님에 대한 열열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 요소가 많지만, 절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사건 진술 방식에서도 각 복음서마다 생략되거나 해설이 첨부되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의 복음서를 기꺼이 용납했고, 수용했습니다.
 
4. 나가면서

우리는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먼저는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역사적 사실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구술 전승의 과정은 집단적 기억을 통한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확실한 증언에 의한 것이며, 사도적 권위를 가진 제자들의 수고 때문이었습니다. 전승 과정은 기억이 공유되고 축적됨으로 큰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기록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또한 이것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습니다.

저는 복음서 전승 과정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먼저 성경을 한 사람이 읽고 모두가 듣는 낭독 형태로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끔 통독 수련회 등에서 사용되는 방법인데, 작은 소그룹을 통해 시험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마다 동일한 암송 구절을 만들어, 집단 기억을 통한 그 교회만의 신앙고백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른 한 가지는 어떤 교회에서 신년이 되면 가끔 하는 방법인데, 구역이나 그룹별로 성경을 나누어 필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 필사를 통해, 성경이 갖는 독특한 맛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복음서 전승사를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이번처럼 감동적으로 읽은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마이클 버드의 책이 적지 않은 도움을 줬습니다.

아직 읽어야 할 책들이 적지 않지만, 먼저 성경을 읽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이야 말로 기독교에게 가장 소중하고 기본이 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정현욱 목사
서평가,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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