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택 목사의 인문 고전 읽기 20] 백경, 모비 딕
모비 딕
H. 멜빌 | 이가형 역 | 동서문화사 | 738쪽 | 18,000원
H. 멜빌은 뉴욕의 유복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파산하여 세상을 뜬 후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 화물선의 소년선원이 되었다. 후에는 타히티 섬과 하와이를 방랑하다가 미국 해군의 한 수병으로서 1844년 귀국했다.
그 동안의 체험은 후에 창작생활로 들어갔을 때 <오무(Omoo, 1847)>, <마디(Mardi, 1849)> 등으로 작품화됐다. 그러는 동안 포경선을 다고 고래잡이에 나섰던 항해체험도 차츰 익어갔고, 드디어 탁월한 작품의 바탕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백경(白鯨, 흰 고래)>으로도 알려진 이 소설이다.
일명 '모비 딕'이라고도 불리는 <백경>은, 이상하게도 허옇게 주름지고 툭 튀어나온 머리통을 가진 거대한 향유고래로, 바다에 신출귀몰하며 배를 침몰시키고 인명을 빼앗는 바다의 악마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당시 이와 비슷한 거대한 고래가 실재하여 선원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가진 한 젊은이를 화자로 하고, 지난 달 백경과 겨루다가 한쪽 다리를 먹혀버린 후 복수의 귀신으로 화해버린 선장 에이허브의 광기와도 같은 백경의 추적을 뼈대로 하고 있다.
첫 장에는 우선, 살다 살다 못해 자살 대신 바다에의 방랑을 시도하는 이스마엘의 심경이 서술된다. 그는 포경선 선원으로 바다에 나갈 결심을 하고 뉴베드포드로 간다. 이곳은 미국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으며, 섬사람 대부분이 청교도의 흐름을 이은 퀘이커 교도들인 동시에 용감무쌍한 포경수부이기도 하다.
그날 밤, 이스마엘은 남해 식인종 추장의 아들인 퀴퀘그와 알게 되어 기묘한 우정으로 맺어진다. 일요일 아침에는 포경자를 상대로 하는 교회에 가서, 마블 신부가 바다와 배와 고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설교를 듣는다. 두 사람이 선택한 포경선 피카드호는 크리스마스 퀘이커 교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출항한다.
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에이허브 선장은 수일 후에야 비로소 참혹한 모습으로 갑판에 나타났다. 한쪽 다리는 흰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이었다. 그는 모든 선원을 갑판에 모아놓고 항해의 참다운 목적을 말한 다음, 백경을 뒤쫓겠다는 결의를 큰소리로 외친다.
피카드호에는 선장 이하 1등 항해사 스타벅, 2등 항해사 스텁, 3등 항해사 플래스크가 뒤따르고, 그들은 각기 보트의 조장을 겸하고 있었다. 선장 직속 창잡이로서는 남몰래 배에 탄 파다라(말레이의 배화교도)와 <리어왕>에 나오는 어릿광대를 연상시키는 핏프 등, 제각기 개성을 가진 다채로운 멤버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유랑자까지 끼어 총 30명이 넘었다.
배는 항해 도중 몇 마리의 고래를 거꾸러뜨려서 경유를 저장하고, 지나치는 배마다 백경의 소식을 물으면서 대서양부터 인도양, 일본 근해로까지 나아간다.
그동안 폭풍이나 뇌우를 만나 나침반이 고장나고 선체도 상처를 입었으나, 백경에 대한 증오에 모든 것을 건 에이허브의 언동에 이끌려 들어가듯, 마침내 사람도 배도 하나의 편집광으로 바뀌고 만다. 이제야 에이허브의 "내가 행한 것은 하고 싶었던 일, 하고 싶은 일을 나는 반드시 하고 만다"는 실행력, 그 이름에 얽힌 불길한 예언을 부정하고 신을 향해 비웃는 악마적인 자신감, 절대전제주의적인 폭군성, 이와 같은 마키아벨리즘이 배 전체를 지배한다. 백경에 접근했다는 예감이 든 에이허브는 스스로 작살을 손질한다.
바다 위에서 만난 레이첼호의 선장한테서 백경에게 습격당해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듣지만, 에이허브는 아들을 같이 찾아달라는 레이첼호 선장의 부탁도 듣지 않은 채 길을 재촉한다. 더욱이 시신을 수장하고 있는 폐선과도 같은 환희호를 만난다.
그 배로부터 백경이 접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동이, 마침내 갈매기가 소란스럽게 몰려서 우는 조용한 해상에서 의젓이 헤엄치고 있는 거대한 흰 고래를 발견한다.
이로부터 3주야에 걸쳐서 인간과 고래 사이의 숨막힐 듯한 사투가 전개된다. 추적 첫날, 에이허브 선장이 스스로 인솔한 보트는 백경한테 산산조각나고, 바닷물에 떨어진 에이허브는 위기일발로 목숨을 건진다. 제2일, 역습으로 전환한 백경의 맹렬한 공격에 보트는 뒤집히고, 에이허브는 의족마저 떼인다. 파타라의 모습도 사라지고 만다.
제3일, 스타벅의 만류를 뿌리치고 에이허브는 보트를 몰고 나간다. 백경의 등에는 파다라의 갈갈이 찢긴 시체가 작살에 달린 끈으로 친친 동여매어져 있었다. 에이허브는 고래 곁으로 다가가 겨우 창을 꽂긴 하나, 그 끄나풀 끝에 얽혀 물 위로 떨어진다. 피카드호도 미쳐 날뛰는 백경에게 떠받쳐 크게 망가져 침몰하고, 이스마엘만이 퀴퀘그가 만들어 둔 관통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더없이 단순한 이 줄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고래 및 포경업에 관한 박학한 고증과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무시한 독특한 스타일이다. 고래의 종류나 크기 및 습성, 고래잡이 작업이나 해체·제유의 과정을 설명하는가 하면, 극적인 독백이나 '내'가 말하는 1인칭 형식, 3인칭에 의한 기술 등이 뒤섞여, 그것을 전달하는 문장은 힘차며 때로는 해학까지 곁들여 박력이 넘친다. 그와 같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이는 속에서 백경의 리얼리티가 신비스러울 만큼 독자를 이끄는 것은 참으로 장관이며, 전체가 '바다의 서사시'라고 할 만하다.
<모비 딕> 창작과정 연구에 의하면, 이 소설에는 멜빌이 작품을 쓴 당시 정신적 방황의 깊이가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작품 전체가 갖는 신비적 의미, 소위 '상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비평사상 커다란 문제가 되어있다.
한 예로 모비 딕을 원죄로 보는 사람, 에이헤브와 백경과의 싸움을 선과 악 또는 인간악과 자연악으로 보는 사람, 백경의 추적을 백인들의 저주스런 숙명으로 보고, 거기서 정복욕에 사로잡힌 서구 문명의 비극을 보려고 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모비 딕을 우주적인 근원악, 에이허브를 유한한 육체로써 그것에 맞선 불굴의 인간정신의 표상으로 보고 배경이 된 바다를 인생 그 자체로 보는 입장이 우선 무난하다 하겠다.
윌리엄 서머넷 모옴의 말과 같이 '독자의 태도·흥미·개성에 따른 해석'이 있는 게 좋으나, 원래 이 작품에는 신화적이고 영웅시대적인 세계가 동시대적. 현실적인 세계와 동시에 병존하고 있다. 또 상징 자체의 막연함과 암시성으로 말미암아 획일적인 해석을 허락치 않는 점이 있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매우 평이 나빠서 기교를 가장한 글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멜빌 자신도 일생 동안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1920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멜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재차 멜빌에 대한 연구열이 고조됨에 따라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전기나 정확한 텍스트의 편집·출판도 행하여졌다.
이후 오늘날 세계문학에 있어 멜빌의 이름이 단테나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견되는 것도 <모비 딕>에 힘입은 바 크며, 모옴은 이 책을 '세계 10대 소설' 중의 하나로까지 들고 있다.
이 소설에는 미국의 개척정신이 담긴 서사시같은 성격이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웅장한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하늘과 별과 폭풍과 잔잔한 바다가 있고, 죽음과 운명과 악에 관한 명상이 어둡게 깔려 있는가 하면, 활기찬 유머와 풍자가 드러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모비 딕>은 19세기 미국의 작가 멜빌이 그의 체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구사해 쓴 해양소설이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