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서 기념사업회 회장 “잡초 헤치며 발견한 묘역... 기념비라도”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번역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2~1915)다. 그렇다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자는 누구일까.
2017년이 지나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늘날 한국교회 역사에서 잊혀진 '은인'은 바로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다. 한글 신약성경은 존 로스 목사에 의해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요한복음이 출판됐으며, 1887년 신약전서 예수셩교전서가 번역, 출판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한글 구약성경은 이보다 11년 후인 1898년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시편 일부를 번역한 '시편촬요'가 최초였다. 피터스 목사는 1900년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 구약성경 번역위원회 위원으로서 1910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최근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한 박준서 연세대학교 구약학 명예교수는 올해 초 미국 LA 패서디나의 풀러신학대에서 연구교수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피터스 목사가 여생을 보낸 패서디나에서 그의 무덤을 찾아 추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무덤은커녕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패서디나 지역의 공용묘지 '마운틴 뷰 묘지'에서 어렵게 찾아낸 피터스 목사의 묘지는 묘석 하나 없이 잔디와 잡초가 무성한 외진 곳에 있었다. 박준서 명예교수가 직접 손으로 잡초를 헤쳐가며 발견한 평지의 석판 위에는 목사 직함도, 구약성경의 최초 한글 번역자임을 알리는 공적도 없이 이름과 출생, 사망년도만 있었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를 묘소에 세우고 양화진에 안장된 피터스 목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 여사, 에바 필드 여사 묘역에도 피터스 목사의 공적비 설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피터스 목사 기념강좌'를 개최하고 '피터스 성경연구원' 개설을 준비 중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는 △회장=박준서 박사(연세대 구약학 명예교수) △총무=이사야 박사(남서울대학교) △서기=김종윤 박사(순복음대학원대학교) △회계=박인희 박사(이화여자대학교) △감사=정영호 박사(공인회계사) △자문위원=김중은 박사(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노세영 박사(서울신학대학교 총장), 김세윤 박사(풀러신학대학교), 박신배 박사(전 KC대학교 총장), 김은규 박사(성공회대학교), 조확기 박사(한세대학교) 등이 섬긴다. 크리스천투데이는 피터스 목사의 업적과 기념사업에 관한 박준서 회장의 기고를 두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준 분들은 우리들이 영원히 감사해야 할 '민족의 은인'들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1880년대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로스 기념관'을 건립해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구약성경의 경우는 어떤가? 누가 언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는가? 이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의 업적을 감사하는 기념사업은 고사하고,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해 준 '은인'은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목사이다. 한국명으로는 '피득'이라고 부른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시편촬요'를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알렉산더 피터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단했다.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를 붙잡으셨다. 양을 치던 아모스를 붙잡아 예언자가 되게 하시고, 다메섹을 향해 가던 바울을 붙잡아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터스 청년을 붙잡으신 것이다. 그곳에서 그를 세례받고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의 발길을 당시 미지의 땅 한국으로 인도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통파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 경우 그의 가족은 개종한 사람을 집안에서 추방하고, 일체의 혈연관계를 단절시켰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 청년은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파송한 권서(勸書, Colporteur)의 자격으로 한국으로 와서, 최초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피터스는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 났다. 히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 희랍어와 같은 고전어도 학습했다. 뿐만 아니라, 독어, 불어, 영어, 이디쉬어(Yiddish,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합성어)까지 구사하는 어학의 귀재였다. 여기에는 한국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서울에 온 후 3년만에 구약성경 중에서 번역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으로 알려진 '시편'을 번역했다. 그가 한국어 운율에 맞는 유려한 우리말로 시편을 번역했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잘 말해준다. 우리가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의 가사는 그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이다.
1900년 피터스는 미국으로 가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구성된 구약성경 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발휘해서 구약성경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1910년 마침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글성경 번역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출간된 한글성경을 가다듬어 손질하고 오류가 있는 곳은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개역된 구약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어보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업스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식히시고 자기 일홈을 위하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938년에 완성된 개역성경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을 비교하면, 맞춤법이나 고어체(古語體)만 조금 다를 뿐, 그 내용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1910년에 번역되고, 1938년에 개정된 구약성경은 대단히 잘된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소리내어 읽으면 우리말의 운율에 잘 들어맞아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1956년에는 한글 맞춤법에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한 '개역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공로자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만큼, 피터스 목사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의 신학교에 유학해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신혼의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피터스는 구약성경 번역사역에 전념했다. 그런데 서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폐결핵에 걸렸고, 결혼생활을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별세했다.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이나 가족들 중에는 폐결핵이나 풍토병으로 사망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그들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병사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한국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캠벨 여사는 서울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그는 먼저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를 추모해서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도 전개했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선교사로 와있던 여의사 에바 필드(Eva Field)와 재혼했다. 필드 여사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불치의 암으로 그가 환자를 돌보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1932년). 그도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캘리포니아주 LA근교 패서디나(Pasadena)시에 있는 은퇴선교사 주거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