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서평] 부재로 임재를 드러내시는 분
무대 뒤에 계신 하나님: 에스더
웨인 바크후이젠 | 송동민 역 | 이레서원 | 144쪽 | 8,000원
"신의 자비는 너무나 커서 숨어 계실 때에도 우리를 유익하게 가르치신다면, 모습을 드러내실 때 신에게서 우리가 기대하지 말아야 할 빛이 뭐가 있겠는가?"
블레이즈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이다. 파스칼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다. 하나는 하나님은 언제나 가르치신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며, 임재를 통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시니 누가 그 가르침을 마다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당한 처사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하나님은 정말 부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부재를 통해 임재를 드러내시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느낄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성경은 곳곳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동풍을 바다에 던지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기적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함정처럼 앞길에 놓여 있다. 철야 기도를 마치고 나와도 회사는 부도 직전이고, 40일 금식이 끝나도 집 나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때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라고 중얼거린다. 성경의 세계와 우리의 실존은 너무나 다르다. 나는 이 갈등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숨어 계시는 것 같다.
'무대 뒤에 계신 하나님'이란 책의 제목을 읽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에스더를 모르기 때문도 아니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헷갈려서도 아니다. 제목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계시다'고 말한다. 그렇다. '계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불행하게 하나님은 '무대 뒤에' 계신다. 분명 하나님의 계심을 알지만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오감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나는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장까지는 개요 부분으로 에스더의 서론과 신학적 논쟁, 그리고 내러티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4장부터 9장까지는 에스더를 샅샅이 탐색하며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10장은 제목 그대로 결론이다.
저자는 제목에서 의도한 대로, 숨어 있지만 계시는 하나님, 통치하시는 하나님, 섭리와 은혜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이미 에스더서가 유대인들이 기념하는 부림절의 기원이며, 역사적 사건을 제공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결론이 아닌 과정, 즉 그들이 구원받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역사하시고, 부재 속에서 어떻게 임재하는가를 알고 싶었다.
아니, 저자는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는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루라도 하나님이 은혜가 채워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위기 속에 있는 나에게 '하나님의 부재'는 저주처럼 들린다. 그러니 더 간절함으로 읽히지 않을까?
한 왕이 있다. 그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다.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왕인 것이다. 그 이름은 아하수에로 왕이다. 그가 왕이 된지 삼 년째, 큰 잔치를 베푼다. 왕후를 잔치에 초대했으나 거절한다. 왕은 회의를 하여 왕후를 폐위시키고 새 왕후를 선출한다.
그런데 왜 왕후가 왕의 초대를 거절했을까? 성경은 왕후를 침묵과 비밀 속에 내던지고 곧바로 새로운 왕후 선출 이야기로 끌고 간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이미 하나님이 무대 뒤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일까(50쪽)?'라고 자문한다.
대체될 왕후는 현재의 왕후 와스디보다 '나은(1:19)' 사람이어야 한다. 나은 사람은 '왕의 절대적인 권위에 거역하지 않을 이(51쪽)'를 가리킨다. 하지만 에스더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어쩌면 에스더는 와스디보다 '나은' 왕후가 아니다. 어쨌든 에스더는 왕궁 속에 숨겨진다.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유배된 상태다. 그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저편으로 도망가 버린 듯하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시 137:1)'다. 그들의 삶은 유린되었고,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그럭저럭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성의 문지기가 된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게 된다.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고, 사건을 처리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르드개의 공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치하(致賀)받지 못한다. 그의 업적도 역사의 이면(裏面)으로 숨겨진다.
반면 유대인들의 원수인 아각의 후손인 하만이 인정을 받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교만하고 악하다. 아부를 즐긴다. 그러나 유일하게 모르드개만이 그에게 절하지 않는다. 그는 분개하고,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알고 유대인 모두를 죽이려는 음모를 계획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금식과 기도를 주문한다. 하만의 음모로 인해 숨겨진 에스더는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것은 '하만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음모가 집행될 왕의 조서가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바벨탑 사건(창 11)의 재현이며, 오순절 사건을 통해 역전될 것이다.
저자는 '그 칙령의 표현방식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오래 전에 하나님이 내리셨던 명령을 대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이 드러난다(70쪽)'고 말한다. 악의 세력과 선한 세력은 창조 때부터 종말까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칙령은 내려졌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고통의 골은 깊어진다. 하나님은 왜 악을 내버려 두실까? 악은 왜 흥왕할까?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찾아가 왕에게 호소하라고 강청한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모르드개의 말속에서 의미심장한 주제가 끌려 나온다. 그것은 에스더가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에스더는 드디어 결단한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4:16)'라고 왕 앞에 나아간다.
에스더는 그냥 나가지 않는다. 모르드개에게 사흘 동안 밤낮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에스더가 요청한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이 사건에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81쪽)'는 의미 아닌가. 숨겨진 익명의 존재인 에스더, 그녀는 이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숨겨진 하나님의 존재를 사건 속에 끌어 들인다.
마침내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을 처단하는 묘안을 짜내어 사건을 해결한다. 에스더서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10:3)."
에스더의 마지막은 욥기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인다. 욥기의 마지막은 욥이 다시 회복하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야고보서는 욥의 인내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낸다고 선언한다(약 5:11).
욥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었다. 욥에게 고난이 닥칠 때 침묵하셨고, 친구들의 고소에 고통당할 때 변호하지 않으셨다. 욥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이 고통당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얻지 못한 점이다. 마지막에도 하나님은 욥에게 답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물으신다. 하나님의 물음은 '네가 이런 것을 알 수 있느냐?'였다. 욥은 모른다고 답한다.
실제로 에스더서는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 와스디의 거절도, 모르드개의 업적이 잊힌 것도, 왕이 갑자기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읽기를 읽는 것도 그렇고, 펼쳐진 부분이 하필이면 모르드개가 고발한 부분인지 모른다. 수많은 우연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이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로 여길 일이 아니다. 이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새로운 변화의 장을 열어 가시는 듯하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의 주관자이시지 않은가(94쪽)?"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해석할 때,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우연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옳음을 입증하실 것이며, 악은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100쪽)'임을 믿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상황에 함몰되어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면, 절망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즉 끝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다.
우리가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과 일치되어 함께 마음이 매장되어 죽는 것이다. 상황 너머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단은 현실에 우리를 옭아매어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뢰를 무너뜨려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는 데 있다(101쪽)'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에스더서를 읽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유대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질까? 그것은 과거를 회상함으로 하나님을 인지하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저자에게 '어떻게'를 물었다. 저자는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과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섭리를 다라 역사하고 계시기(134쪽)' 때문이다.
다만 유대인들은 확신했고, 기도했으며, 결단하며 실행했다. 그것이 전부다. 방법이 아닌 믿음이 문제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만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하나님은 부재를 통해 임재를 드러내신다. 왕은 광대한 제국을 다스린다. 그 왕을 다스리는 또 한 분의 왕이 계신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잠시 생각을 했다. 너무 상황에 휩쓸려가고 있지 않은지, 상황이 너무 힘들어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결국 믿음이 있다면 삶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