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침묵의 우둔함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인면조'가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 같다. 인면조란 무엇인가.
인면조(人面鳥),
말 그대로 사람 얼굴을 한 새의 형상이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있다 하는데 이런 하이브리드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도 사람 머리를 한 새가 나오며(사이렌), 인간 존재의 한 원천으로 소개하는 이집트의 바(Ba)도 역시 사람 머리를 가진 새의 형상이며, 아시리아의 쉐드(Shed)도 기원전 800년에 등장하는 사람 머리를 한 조류이다.
아시리아의 쉐드는 어근이 히브리어 사드(שד)와 같다. 사드의 모음이 솨드(שָׁד)가 되면 유방이며, 쉐드(שֵׁד)가 되면 악마이다. 이는 인간이 죽으면 죽은 뒤에도 육체에 여전히 남아 있는 바(Ba)라는 존재성과 통한다. 카(Ka)는 영혼, 아크(Akh)는 정신성인 동안에 바(Ba)는 육체와 이어진 일종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다 내세/영혼과 관련 있다.
이는 신화적 내세관만이 아니라 실제 원시시대 매장 데코레이션에도 발견되는 도상이다. 일종의 동물 토템과 샤머니즘이 결합된 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인간과 동물의 특징을 결합함으로써 다양한 동물의 힘이나 속성을 통해 내세를 꾀하는 미개한 인간의 종교성이라 할 수 있다.
이집트 내세관에 있어 사람이란 카(Ka)·바(Ba)·아크(Akh)의 결합체를 일컫는 존재인데, 사람이 죽었을 때 부활이란 이 '카'가 '바'와 다시 합칠 때 '아크'로 부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남아있는)육체성과 결합할 때 정신성이 된다는 것. 이때 바(Ba)라는 인면조/ 새(의 힘)가 작용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것이다. 바가 없으면 부활을 못한다. 그래서 이 바는 파라오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을 통과하기 위해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의 몸은 돛에 묶으라 시키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풀어주지 말라 명령한다.
"내 노래를 들으면 너를 고향에 데려다 주겠노라~"고 유혹하는 인면조(人面鳥) 사이렌에게 속아 많은 배가 난파한 터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왜 딴 사람더러는 귀를 막으라고 했으면서, 자기는 귀를 안 막고 몸을 묶은 것일까?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이르기를, 사이렌은 이때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구태의연한 (노래를 들려주는) 전법을 바꾸어 침묵으로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걸 갈파했다는 것.
미개한 인간은 대개 자기 귀를 막고 거기서 나오는 침묵으로 위기를 건너려 하지만, 오직 이성에 뛰어난 자만이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위기를 건넌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고통보다, 자기 귀를 틀어막은 침묵의 우둔함을 더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귀를 틀어막은 자들은 고상한 것 같은데 미개인이며, 오직 들을 수 있는 자만이 이성과 지각을 갖춘 자라는 것이다.
이집트, 아시리아, 이스라엘, 고구려.... 무덤에 분칠을 할 정도로 융성했던 그 모든 나라가 듣지를 못하는 우둔함이 창궐할 때 나라를 잃었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