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로 화제 모은 이영진 교수의 못 다한 이야기들
지난달 개봉한 영화 <곡성>은 관객을 650만 명 이상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개운치 않은 결말로 온라인상에서는 해석과 논쟁이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본지 리뷰 코너 '이영진의 기호와 해석'에 게재된 "기독교에 살(煞)을 날린 영화, '곡성'"도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본지는 그 리뷰의 필자인 이영진 교수(호서대)에게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더 들어 봤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영화 내용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리뷰를 읽고 영화를 봤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특히 '무명(천우희)'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일광(황정민)'의 정체가 그러한데요.
"의도적으로 상징화(encoding)를 투여한 캐릭터의 정체를 콕 집어 밝힌다는 게 무의미하지만, 셋 다 우리가 지닌 어떤 믿음의 '대상' 내지 '형식'이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믿음에 따라(믿는 만큼) 그 대상과 형식은 변하게 마련인 거죠."
-주인공 '종구(곽도원)'가 마지막에 '무명'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런 종류의 영화는 어떤 행위에 얽힌 결과보다, 그 행위의 과정 자체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내용 파악에 도움이 됩니다. '가면 다 죽는다'는 무명의 말이 과연 가지 않았다면 '다 살 수도 있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종구만 살 수 있었다'는 뜻인지 우리로선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소는 종구가 이미 선행된 모범 행위를-닭이 세 번 울기 전 베드로의 행위를-어떻게 반복했는지에 있다 하겠습니다. 종구는 베드로와 달리 현장에 뛰어드는 바람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전적으로 종구가 한 의심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모범을 답습합니다."
-감독은 '무명'이 '신(神)'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무명'의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감독이 말한 '신'이라 해 봐야 여장승 수호신 정도일 텐데, 큰 의미 부여를 하긴… 말씀드렸듯 '신'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신에 대한 반응'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인터뷰를 통해 영화 내용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개봉 이전의 인터뷰는 통상 홍보 내지 관객의 지나친 몰이해 방어를 위해 기본 의도 정도를 밝히는 것일 텐데, 제가 보기에도 좀 과한 설명이 개봉 전후 연속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이야기의 창작자는 '플롯'으로 말해야지, '설명'으로 하는 것만큼 작품에 대한 훼손은 없거든요."
-교수님의 리뷰와 달리 감독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는데요.
"일본인을 등장시켰는데 일본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겠죠?"
-이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고 있습니다. 개연성 없이 시체와 피가 난무하는 '오컬트' 영화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네,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단지 괴기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랬다기보다, 인간이 잔혹함 앞에 얼마나 태연한가 하는 이중적 태도를 고발하려는 의도도 상당히 엿보입니다. 살인 현장에 가기 전 밥을 먹는다든지, 살점과 피가 난무한 현장 조사를 마치고 곧바로 벌겋게 양념을 버무린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으로의 앵글 전환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잔혹한 장면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감독 자신에게도 좋겠죠?"
-감독의 주제의식 구현 또는 상업적 목적 성취를 위해 관객을 너무 불편하게, 또는 바보로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공포물과 살인극 등의 장르를 대단히 좋아하진 않는데요, 이런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 작품이 공포를 주는 것인지, 더러움 또는 놀라게 함의 혐오를 주는 것인지. 우리가 느낀 것은 혐오지만 공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두려움과 떨림은 나쁜 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의 미학을 이끌어내는 필연적인 요건입니다. 두려움 그 자체가 나쁜 요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저 영화가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가' 하는 상대적 평가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소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주제를 진지하게 다뤄 준 감독과 제작사에 감사하는 입장입니다."
-기독교 내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를 멀리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네,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자체는 '책'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 성서 자체가 각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듣고, 읽고, 추려서, 기록한 매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가 사는 동시대의 언어를 무조건 듣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태도는 비(非)성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이 시대에 우리 크리스천 젊은이에게 절대 필요한 눈은 진리를 직접 식별하고 추릴 수 있는 눈일 텐데, 자신의 시각만이 진리라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 시대에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언어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 언어도 잘 다루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성경 말씀이나 기독교의 상징들이 뒤죽박죽되어 나타납니다. 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농락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감독의 의도를 좋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리가 해체(destructionism)나 역설(paradox)과 같은 방법적 기획에 낯설면 그런 반응이 나타날 수 있는데, 사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뒤집어쓰는 잔혹한 도상도 대관식(coronation)이라 부르기도 하거든요. 우리의 성찰을 방해하는 뒤죽박죽이라면, 해체나 역설 그 자체보다 재능 없는 해체와 역설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시각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향유해야 할까요.
"저는 기독교인 여러분에게 이 시대의 영화를 '읽으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비단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면 읽을 가치가 없는 것들은 자연적으로 걸러질 것이라 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학이 아니면 믿지 않는 시대에 '주술과 무속'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공포영화들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에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크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과학 시대에는 주술과 무속이 사라졌다고 하는 '과학에 대한 맹신'입니다. 시대라는 옷은 갈아입었지만 사람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영화 <곡성>이 그것을 규명하는 데 주력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가 기독교에 함의하는 바가 있다면, 표제어 그대로 '현혹되지 말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기독교인 포함-현혹(의심)을 믿음으로 오인하는 주술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로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문제, 내 딸의 문제일 때."
-'의심을 믿음으로 오인한다'고 하셨는데, 이 영화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요.
"이를테면, 부사제 양이삼(도마)이 악마에게 '악마가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해 달라'고 믿음을 구걸하는 태도입니다. 또 경찰 종구(베드로)가 눈으로 보고 만지는 '무명'과 전화기 속 일광의 소리 가운데서 계속 현혹되는 태도입니다."
-리뷰에 못다 실은 생각이 있으시다면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리뷰의 가닥은 당초 두 가지가 잡혔습니다. 첫째는 일본(인)과의 관계,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리텔링함으로써 꾀하려는 믿음과 의심의 동선. 이 두 줄기가 가장 선 굵게 눈에 띄었으나, 분량을 감안할 때 둘 다 상세히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자는 약화하고 전자에 더 큰 비중을 할애한 것입니다만, 기독교인 독자만을 배려했다면 아마 후자를 한층 강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비기독교인이 이 같은 기독교 메시지를 접하는 대역폭은 훨씬 좁아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타난 '부활' 관련 기호와 해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기에 열거하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단, 이미 기존의 리뷰에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레이아웃은 나왔다고 봅니다."
-이 영화가 기독교인들 또는 신학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검증당하는지 그 '상황'을 제시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비겁한 기독교와 용감한 이단이 동시대를 살았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 성서신학자는 성서신학적으로, 실천신학자는 실천신학적으로, 조직신학자는 조직신학적으로....... 각자 무슨 대답들이 있겠죠?
-평론가나 영화감독을 꿈꾸는 기독교인들에게 조언이나 격려를 해 주신다면.
"성경을 사랑하시고 성경 독해에 많은 투자를 하시길 조언드립니다. 그것은 제 종교적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짧게는 2000년, 길게는 3500년의 텍스트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종교적 의미에서 생명처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담긴 기호와 해석에 대해선 대단히 과소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깊이의 기호화(encoding), 복호화(decoding)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을 원하는 분들에게, 성경을 강력 추천합니다. 이 책은 로고스 세계에서 직·간접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바이블(bible)'입니다."
-답변 중 '기호화'와 '복호화'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거스틴이 한 말 하나만 소개하지요(웃음). '모든 가르침은 사물들(things)과 사인(sign)에 관한 것이다. 사물들은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언급되지 않으며, 사인들은 그것 자체보다는 사물의 의미를 위해 논의된다.'"
-교수님의 리뷰가 많은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예상하셨는지요.
"해석에 복호화(decoding) 폭이 큰 경우에는 어느 정도 반응을 예상하지만, 저에게 딱히 통계가 없어 해당 리뷰가 얼마나 화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영화를 한 번 보시고 어떻게 이런 깊이까지 생각하실 수 있는지요.
"사실 해석학(heremeneutics)이라는 분야는 해당 작품에 종속된 분야라기보다, 원작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창작 분야에 더 가깝습니다.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별개의 행위로 규정하거든요. 따라서 해석을 할 때 작가의 제작 의도 안에 해석을 가두기보다, 그 작품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간주함으로써 대하는 편입니다. 그러면 가치를 머금고 있는 작품은 반드시 스스로 말을 하고, 아무런 말이 없는 경우는 대개 가치가 결여된 작품일 때입니다."
-본지에 총 7회 리뷰를 쓰셨는데, 내용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 제가 자주 듣는 말인데요(웃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화 <곡성>의 리뷰를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독자라면, 제 다른 글도 전혀 난해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난해함이 있다면 그것은 '관심'의 차이일 것입니다. 심리적 기제에 관심이 있는 분은 <아노말리사>가 읽힐 것이며, 마태복음 8장의 거라사 광인에 관심이 있는 분은 <검은 사제들>이 잘 읽힐 것입니다. 이 <곡성>의 리뷰가 그리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많은 분들에게 읽혔다면, 그것은 우리가(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그만큼 영적인 까닭일 것입니다."
-교수님을 알게 된 건 지난해 발간된 책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덕분입니다.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철학자와 신학자의 주요 사상들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셨는데요, 간략한 소개와 함께 '몽타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몽타주는 본래 영화의 화면들을 조립하여 어떤 의도된 리듬을 부여하는 행위를 정의한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평면 예술에서도 여러 다른 인물의 사진을 조합해 제3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법으로 전용되었는가 하면, 현대에 들어서는 영화 자체에서도 아예 자연스러운 흐름을 파괴함으로써 얻는 리듬을 몽타주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정의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조를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에서 마지막 장 해체와 연결짓고 있지만, 사실은 해체 이전 시대 전체를 다 몽타주로 소급해 내려고 시도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체라는 트렌드로서가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것 같지만(Nusquam) 어디에나 있는(Ubiquitas) 하나님의 본성 로고스를 규명하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롬 1:20).
왜냐하면 언어라고 불리는 이 로고스는 유대인이나 혹은 믿는 기독교인에게만 미치는 효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같은 세속적 영화 <곡성>에 해석학적이면서도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