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엔도 슈사쿠, 유쾌함과 애정 가득한 ‘영성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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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음인(書淫人) 리뷰]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엔도 슈사쿠 | 안은미 역 | 정은문고 | 240쪽 | 11,800원

『침묵』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그가 지금까지 길러왔던 동물들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은 언제나 그의 말벗이자 친구였고 때로는 친구 이상의 특별한 짝궁이자 위로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인 엔도 준코는 이 책의 말미에서 “남편 엔도 슈사쿠에게 있어 동물은 전부 형제 같은 존재로, 그에게는 가축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짧은 글에서, 부모의 불화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 첫 친구이자 말벗이 되어주었던 만주견 ‘검둥이’로부터 시작해 개, 고양이, 원숭이, 너구리, 구관조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그가 키우거나 만나왔던 여러 동물들과의 이런저런 인연을 가식이나 과장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 책에는 습관적으로 여자의 속옷을 물어오고 색을 밝히다 성병에 걸리기까지 하는 시바견 ‘먹보’의 유쾌한 에피소드에서부터 첫 말동무였던 ‘검둥이’와의 슬픈 이별과 관련된 진지한 단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글에는 잘났건 못났건 잡종이건 순종이건 친절하건 무뚝뚝하건 그가 만나 왔던 모든 ‘있는 그대로’의 동물들, 더 나아가 식물까지를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이런 그가 인간이 자신을 위해 동물을 예쁘게 치장하거나 특별한 재주를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디즈니가 만들어낸 야성과 신비성이 사라진 ‘의인화된 동물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엔도 슈사쿠. ⓒ대한기독교서회

▲엔도 슈사쿠. ⓒ대한기독교서회

TV 쇼에 나와 글자를 쓰는 개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개는 글자를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개일지라도 아이들과 놀고 공터에서 잠자고 저녁이면 주인의 집에 아이와 함께 돌아올 여유를 갖고 싶을 터. 그런데 글자 쓰는 훈련을 시키다니!”

엔도 슈사쿠는 주인이 자살한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개의 눈과 병에 걸려 자신의 손 안에서 죽어가던 십자매의 눈을 바라보면서, 점차로 개나 작은 새는 그저 개나 작은 새가 아니며 그들의 슬픈 눈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배후에서 슬픈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고 멀리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존재 -저자는 “이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여러분의 자유다”라고 말한다- 의 투영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비록 입만 열면 하나님 예수님이 튀어나오거나 24시간 하나님만을 생각한다고 요란을 떨지는 않지만, 일생을 통해 사랑하고 교감했던 여러 동물들의 눈에서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해낸 엔도 슈사쿠야말로 진정한 영성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 색채나 경건함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 유쾌함과 애정으로 가득한 동물기야말로 참된 ‘영성일기’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정한욱 원장(고창우리안과, 비전케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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