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16) 지혜의 완성
“기도가 지혜의 시작이라면, 순종은 지혜의 완성이다.”
침묵은 곧 지혜의 시작이다. 그리고, 침묵은 기도이다.”
“순종은 영원한 진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삶의 지혜를 원한다. 지혜가 삶을 더욱 윤택하게, 더욱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이런 지혜에 관련된 서적들도 많이 읽을 것이다. 대표적인 책이 있다면, 탈무드이다.
이뿐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갖 지혜를 담은 명언집들이 출간되어 쏟아진다. ‘삶의 지혜’라는 단어를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에 검색해 보라. 이렇게도 삶의 지혜를 다루는 책이 많은지 놀라게 될 것이다!
많은 책들이 지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심지어는 기독교에서도 지혜를 다루는 책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지혜의 덕목으로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이 서글픈 일이다. 순종이야말로 ‘지혜의 완성’인데도 제대로 소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 순종이 지혜의 완성이라면, 순종을 말하지 않는 지혜서들은 모두 가짜다. 지혜를 다루고 있지만 지혜 없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들이다.
언제까지 지혜 없는 지혜의 바다에서 헤엄칠 것인가? 지혜가 그렇게도 복잡했단 말인가? 아니,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지혜는 단순하다. 순종은 지혜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혜의 완성인 순종은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고난의 학교에 입문하지 않는 한, 지혜의 완성은 불가능하다.
어째서 순종이 지혜의 완성인가? 그것은 완전하신 주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을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묵상해 보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
이런 점에서, 너무 싼 티 나는 지혜서들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 지혜서라는 책들이 순종을 가르치기는커녕, 고난을 회피하는 법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치 삶의 고난을 제거하는 것이 참된 행복인 양, 그래서 고난을 빠르게 회피하는 것이 지혜인 양 가르치기 때문에 그런 지혜서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여러 지혜서들이 순종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집중해서 살피라.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다? 고난을 회피하는 법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 책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은 필경 사망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지혜가 될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 문제는 이렇다. 헤겔의 기본 철학으로, “의심은 지혜의 시작이다.” 이 부분은 데카르트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아마 이 유명한 그의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 역시 생각하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 모든 학문의 근본적 출발점은 의심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지점에서, 바로 이것을 전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 잠언 9장 10절을 강조한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지 않는 지혜서는 다 가짜다. 그것은 지혜일 수 없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의 시작은 침묵이다.” 키에르케고어는 그의 강화집에서 침묵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거룩함에, 그 어마어마함에 입이 떡 벌어져 말을 잃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 줄 아는 자, 그는 말부터 상실한다. 그래서 침묵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이것을 결론지으면 이렇다. 침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의 시작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지혜의 시작이라면, “침묵은 곧 지혜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침묵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다.
원래 기도하는 자는 처음에 많은 말을 갖고 하나님께 간다. 게다가, 수많은 말을 쏟아낸다. 온갖 불평부터 삶의 수많은 고통의 문제까지! 그러나 기도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하면 말이 줄어들기 시작하다, 결국 정점에서 그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 그의 기도는 단 한 마디로 줄어든다. “주여, 속히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그때, 그는 기도가 수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침묵일 게다.
다시 전체를 요약해 보자. “기도가 지혜의 시작이라면, 순종은 지혜의 완성이다.” 동의하는가? 순종은 언제 배우는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그렇다면, 이쯤 해서 주님의 고난의 기도를 묵상해 보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따라서 주님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 바로 순종의 첫 번째 부분이기도 하다. 그분이 쓴 잔을 비워야 하는 것,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 이것은 순종의 두 번째 부분이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자 않고 쓴 잔을 비웠다면, 완전해지지 않았으리라.
순종의 핵심 부분, 첫 번째 부분은 역시 기도하는 질문과 질문하는 기도이다. 곧 아버지의 뜻인지, 다른 길은 가능한지. 그러므로 그의 삶은 순종이었고 죽음에 이르는 순종이었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었던 그분이, 아무 것도 배울 필요가 없었던 그분이, 그럼에도 여전히 한 가지를 배웠다. 그분은 순종을 배웠다. 순종은 영원한 진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진리인 자는 순종을 배운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다른 지혜로 물들지 않도록 이런 생각을 갖고 지혜서를 판단하라.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처세술을 배울 수도 있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들을 읽고 성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혜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배가 결국 산으로 간다면, 그 최후는 어떻게 되겠는가! 수많은 명성과 명예를 얻었다 해도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경계하라. 성공, 명예? 그것은 수의일 수 있다. 옛날에 대관식 예복 대신 수의를 입은 왕이 있었다. 마치 저 왕처럼, 세상의 지혜를 통해 얻는 저 복장이 더 반짝거릴수록, 더 빛날수록, 더욱 비참해질 수 있다. 그것은 지옥으로 여행하는 수의일 수 있다. 거기에서 이것은 고문 예복이 될 것이다. 형벌로, 그는 계속해서 그 옷을 입어야 한다. 계속해서. 고로 감추어진 지혜를 배우라.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이미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