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은혜의 욥기 9] 우리 사이에 판결자가 없구나
욥기 9장 1-35절 강해
요절: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3절)
빌닷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욥이 죄 없이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그런 빌닷의 말을 듣고 답답했습니다. 무엇보다 공의의 하나님이 아무 죄 없는 자신에게 징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큰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해줄 중보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거리감
1-3절에 보면 욥은 빌닷의 말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고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도 동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義)의 수준에 결코 다다를 수 없습니다.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말을 잘 해도, 하나님이 천 마디 할 때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죄악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변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죄성을 가진 존재이나,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으로서 완전한 의에 거하십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감과 괴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욥
4-11절에 보면 욥은 사람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십니다. 어떤 악인도 하나님 앞에서 형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산과 땅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키시고 산이 갈라지게 하고 돌이 굴러떨어지게 하십니다. 폭풍우에 의해 산이 깎여 내리게 하십니다. 급류에 의해 산이 깎이고 주변의 암반이 무너져 내립니다.
하나님은 해와 별을 주관하십니다.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거두십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식은 천지를 순식간에 어둡게 합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먹구름, 모래를 동반한 폭풍 등은 하늘을 짙게 가려 해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바다 물결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늘을 펴시고 바다 물결을 밟으십니다. 격랑에 의해 마치 산더미처럼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하나님께서 밝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사람과 달리 창조주가 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깊고 오묘한 뜻을 갖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욥은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앞으로 지나시나 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움직이시나 깨닫지 못합니다.
욥은 가중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앙적 회의를 질문하며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욥의 문제의 핵심은 친구들과의 갈등도, 육체적 질병도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3. 심판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욥
12-18절에 보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빼앗아도, 그 주권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시나이까?’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욥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왜 그렇게 하느냐 물을 수 없습니다. 라합(사탄)과 같은 괴물을 돕는 자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였는데, 욥이 감히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뿐 아니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의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욥은 자신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욥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껏 하나님께 탄원과 질문을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의로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항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심판을 감하여 주시도록 간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을지라도, 그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자 하나 알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까닭 없이 상처가 깊어진 것입니다.
의인이 고난 받는다는 점에서 까닭없는 고통이지만 신뢰하는 자에게 연단으로 고난을 주신다는 점에서는 까닭 있는 고통입니다. 거기에는 높은 차원의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4.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욥
19-24절에 보면 하나님은 힘이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하나님을 소환하여 하나님께 잘못을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전권을 소유하고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인간은 그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 내지는 원고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재판을 번복할 권능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법정에 불러낼 권한도 없습니다.
욥은 의로워도, 그가 하는 말은 결국은 불평의 말, 원망의 말입니다. 그는 온전하여도 자신이 자신의 의로움을 온전히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질 수 없었습니다. 욥은 온전한 자로서 정죄받지만 그는 하나님께 따질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은 하나님처럼 보였습니다. 무죄한 자가 갑자기 죽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의 범죄 때문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22절)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욥은 이 세상의 공의와 질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이와같이 욥은 더욱 더 신랄하게 하나님께 재판관의 얼굴을 가리워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시고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5.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욥
25-31절에 보면 욥에게 인생은 허무한 인생입니다. 경주자와 같이, 빠른 배와 같이, 독수리같이 잠깐 가는 인생입니다. 욥은 육지(경주자), 바다(빠른 배), 공중(독수리)등에서 빠르다고 생각되는 것을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보잘 것 없고 짧은 자신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병고 가운데 보내는 참혹한 시일들이 빨리 흘러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34절).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종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던 심령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던 친구들의 불평을 잊고자하였습니다.
그는 불평을 잊고 기쁘게 하려 해도, 모든 고통으로 두려워서 기쁜 얼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항상 기뻐해야함을 알지만, 죄책감으로 불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으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즐겁게 살고자 하는 욥의 굳은 결의도 극도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내리기로 작정하신 고통을 피하려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죄로 판결하신 마당에 자신의 결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욥은 깨끗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개천에 빠뜨리셨다고 말합니다.
욥은 한편으로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자신이 흠많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더러워진 자신의 옷을 싫어합니다. 욥은 이런 죄악으로 불평하는 자신의 삶이 다만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6. 중보자를 구하는 욥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32-35절)”.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재판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변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변론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성을 보이기 위한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였습니다. 이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보해줄 판결자를 찾았습니다. 판결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키아흐는 야카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야카흐는 양자(兩者) 사이에 가로놓인 벽이나 문제 등을 해소하는 중재자들을 의미합니다. 변호사를 의미합니다.
욥은 지식, 능력, 거룩성 등에 있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을 통절히 인식하고, 그 간격을 연결시켜줄 대상을 마지막 희망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므로 우리를 변호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욥은 중보자가 오셔서 하나님의 막대기를 떠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엄을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욥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말하겠다고 합니다.
욥은 현재 자신의 판단력과 삶의 의지마저 흐리게 만드는 지독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욥은 중보자가 아니므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런 이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도 한 목자가 조현병이 걸린 것을 이해할 수 없어 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성숙을 주시기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 현실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