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500년간 외면해 온 종교개혁의 진실 혹은 신화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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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서평] 로드니 스타크의 『Reformation Myths』

▲연극 ‘루터’. 면죄부에 열광하는 시민들. ⓒ김신의 기자

▲연극 ‘루터’. 면죄부에 열광하는 시민들. ⓒ김신의 기자

마르틴 루터의 501년 전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아 로드니 스타크의 『Reformation Myths: Five Centuries Of Misconceptions And (Some) Misfortunes』에 대한 진규선 목사님의 서평을 연재합니다. 이 책은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 온 종교개혁의 진실(헤르몬)>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번역 출간됐다고 합니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은 언제인가?

1517년 10월 31일, 바로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어느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날, 그 날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라 여겨지며, 오늘날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켜진다.

하지만, 사실 정말로 루터가 그 날에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못박아 게시했는지, 아니 실제로 그렇게 공개적으로 게시했는지조차 우리는 역사적으로 확신할 길이 없다. 기껏 해야 1517년으로부터 수십 년 지난,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에는 비텐베르크에 있지도 않았던 루터의 비서 게오르그 뢰러(Georg Rörer)가 휘갈겨 남긴 라틴어 메모 한 장이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의 전부일 뿐이다.

우리에게 역사적 증거가 없지만, 다수에 의해 실제라고 믿어지는 일을 ‘신화’라고 굳이 표현한다면, 종교개혁과 관련해 몇 가지 신화가 있다고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과감하게 말한다.

그는 일부러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추어, 책 한 권을 출판했다. 그 책 제목은 과감하면서도 도발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종교개혁 신화들: 오해와 (몇 가지) 불운의 지난 5세기>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종교개혁에 대한 책들과는 사뭇 달리 신학 논쟁에 크게 관여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역사 서술 그 자체에도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지난 세월 동안 종교개혁 서술에 있어 만연해 있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에 앞서 로드니 스타크가 염두에 두는 종교개혁‘들’은 크게 셋이다.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 칼빈의 스위스 종교개혁 그리고 헨리 8세의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유럽 등의 국가 교회들을 추적한다.

그가 이렇게 종교개혁’들’로 보는 이유는, 교황의 권위 부정 외에는(예수의 신성 포함) 별다른 공통점을 종교개혁 운동 참여자들에게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드니 스타크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종교개혁 운동 참여자들은 가톨릭뿐 아니라, 동일하게 종교개혁에 참여하고 있는 상대를 이단으로 여기고 권력을 가졌을 때는 무력행사를 서슴치 않았다.

예를 들어, 루터교 국가 교회들은 칼빈주의자들을 찾아내어, 색소니 같은 경우 1580년대에 칼빈주의자들을 화형시켰다. 칼빈주의자들도 소위 그들이 정한 ‘이단’에는 가톨릭 외에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도 포함됐고, 역시 사형을 당했다. 헨리 8세 역시 가톨릭 교인들뿐 아니라 루터교, 칼빈주의자, 재세례파 등 소위 다른 종교개혁 운동에 속한 사람들을 참수형시켰다.

종교개혁이 단일한 운동이고 일치 단결하여 가톨릭에 저항하고 개혁하려 했다는 오해는 그래도 크지 않다. 구체적으로 로드니 스타크가 다루는 종교개혁에 대한 신화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그는 유럽 세계가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 세계)이라는 시각 자체가 신화라고 뼈아프게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경건한 소작농으로 가득 찬 중세 시대의 교회당이라는 이미지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유럽 전체의 모든 교회는 애초부터 텅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 언어를 라틴어에서 자국어로 바꾼 다음, 열정적인 개혁 이후는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교회는 텅텅 빈 채였다!

흔히 종교개혁은 라틴어 미사가 아닌 자국어 예배를 제공했기에, 민중들에게 호소력을 얻어냈다는 식으로 서술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6세기, 1525년부터 다음 세기 동안 루터교 조사관들이 독일 루터교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보고서가 미국 역사가 Gerald Strauss에 의해 출판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Nassau 지역: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술 취한 채였으며, 설교 내내 잠을 잤다. 예외가 있다면 자다가 예배당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쿠당탕 소리를 낸다거나 계단에서 애를 돌보는 여자들 뿐이었다.”

대다수 지역이 위와 비슷했다. 참석자들은 대다수가 (자국어로 된) 찬양을 따라 부르지 않았고, 예배 도중 싸우기도 하고, 축복기도하던 중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독일의 루터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 유럽이, 개신교회나 가톨릭 교회나 할 것 없이 다 비슷했다.

따라서 심지어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개혁 이후 성직자들조차 기독교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 교회에서 글로셔스터 주교가 1511년에 전국 교회 목사 311명을 데려다놓고 시험을 쳤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인 171명은 십계명을 몰랐고, 심지어 그 중 27명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을 최초로 가르쳐준 사람이 예수라는 걸 몰랐다.

그렇다면 유럽 세계는 전체적으로 비종교적이었을까? 아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유럽이 종교로 뒤덮혀 있었지만, 그 실체는 기독교가 아니라 단지 고대 종교의 관습들, 민간 미신들이 뒤섞인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예수님, 마리아님, 그리고 온갖 성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교도의 신들, 여신들을 부르며 기도했고, 소위 ‘구원’이라는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건강, 풍작과 같은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원서 『Reformation Myths』와 최근 나온 번역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원서 『Reformation Myths』와 최근 나온 번역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한 마디로 말해, 유럽의 주류 종교의 내용은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매직이었고, 이것은 성직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마저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꽉 채우지도 못했다.

따라서 경건한 왕과 같은 것도 허상이다. 헨리 8세는 다들 기회주의자로 여긴다. 하지만 헨리 8세뿐 아니라 당시 모든 왕들이 그랬다. 개신교로 개종하건 가톨릭으로 남아있건, 그 동기는 오로지 자기 이익에 있었지 종교에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유럽의 왕들 중, 가톨릭 교회의 교황보다 자국 교회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은 굳이 개신교로 개종하지 않았으나, 교황보다 자국 교회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왕은 개신교로 개종했다.

전자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포르투갈이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사람이 바로 스페인을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으로 삼은 카를 5세이다.

그리고 개신교로 개종할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겨울에 무릎을 꿇은, 소위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아니었으나, 권력 관계는 비슷했다. 단 하나의 교회 밖에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선제후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또 다른 신화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신앙의 자유와 관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은 또다른 브랜드의 독재와 다름 없었다.

종교개혁 국가들은 경건을 촉진시키겠다는 의욕으로 불타서, 개인의 신앙 양심보다는 구속력을 지닌 법률적 제제를 강화했고, 이것은 가톨릭 시대보다 더욱 극심한 수준이었다. 로드니 스타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제공한다.

루터교 국가 교회들의 경우, 예외 없이 모두가 법률에 따라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17세기 카를 9세는 심지어 주일, 하나님의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도록 거리마다 군인들을 배치했다.

스웨덴에서 모든 국민은 1년에 세 차례 성찬을 참여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거나 경우에 따라 이동 금지뿐 아니라 심할 땐 화형을 당했다. 1726년에는 더 나아가 비밀집회령이 내려져, 루터교 성직자 없이 세 명이상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금지됐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당시 하나의 왕국이었는데, 루터란이 돼야만 그곳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1735년 이 왕국에서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오락을 즐기면 벌금을 내야 했다.

▲제네바 빠스띠옹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pixabay.com

▲제네바 빠스띠옹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pixabay.com

칼빈의 제네바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주일 아침 예배 참석은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게다가 주중에 설교가 있다면(보통 여러 번 있었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도 법에 의해 요구됐다. 교회에 늦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칼빈이나 성직자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는 것도 투옥되거나 추방될 수 있는 범죄였다.

의복의 색깔이나 양도 법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식사를 위해 허용되는 접시의 갯수를 제한하는 법률도 있었다. 도박, 카드놀이, 술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실제로 술집도 없었지만), 외설적이거나 비/반종교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 모두 금지였다. ‘천박하게’ 옷 입는 것도 법률 위반이었다. ‘부덕한 길이로’ 머리를 하는 여성도 감옥에 갔다.

자녀들의 이름은 구약의 인물에 따라서만 지어질 수 있었다. 음행(Fornication)은 경우에 따라 추방형 혹은 익사형을 당했다. 간음(Adultery)은 사형이었고, 칼빈의 의붓딸과 사위가 이 혐의로 처형당했다. 신성모독과 우상숭배는 사형이었다. 어떤 사건에서, 한 아이가 부모를 때렸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의 경우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일치령을 내렸고, 소위 성공회 기도서와 성례 집례서(adminstrations of sacraments)를 작성하여 모든 잉글랜드 성직자들이 그것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이 책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판한다면 벌금형이나 투옥형이 내려졌다. 당연히 교회 출석도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기독교를 넘어선 신앙의 자유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의 태도는 참으로 사악했다. 대다수 유럽에서, 특히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나라에서도 유대인들은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칼빈은 비교적 유대인에 대한 표현을 아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위스 제네바에 오기도 전에 이미 1491년 유대인들은 다 추방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같은 경우, 유대인들은 1829년에야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고, 심지어 1800년대 후반에야 겨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 대학에 입학이 가능했다.

하지만 루터는 더욱 심했다. 루터의 유대인들에 대한 입장은 침묵하거나 혹은 너무 많이 변호됐다. 그러나 결코 변호할 수 없다. 많은 역사가들, 특별히 독일의 역사가나 혹은 종교적인 대다수 서양 교회사가들은 그를 변호하려 노력했지만(노년에 늙어서, 아내를 잃어서, 루터의 유대인 혐오는 유럽 전반적 현상이었고 근대의 나치와는 다르다는 등), 루터는 유대인을 혐오하고 박해했으며, 그의 저작은 나치들에 의해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럴 때 독일 루터교인들은 나치의 그러한 루터 저작을 환영했다.

루터는 1523년, 비교적 젊을 땐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논문을 써가면서까지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으나, 그들이 개종하지 않자 점점 그들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루터의 바로 그 유명한 논문, ‘Von den Juden und ihren Lügen(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를 썼다. 종종 인용되는, 해당 논문에 있는 루터의 유대인을 향한 일곱 가지 실천 사항은 경악할 만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들의 회당을 불태워라.
둘째, 유대인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하라.
셋째, 유대인들의 종교서적, 기도서나 탈무드를 빼앗으라.
넷째, 유대인들의 랍비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다섯째, 유대인들의 통행 보호를 폐지하라.
여섯째,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시키고 그들의 모든 돈과 은이나 금과 같은 보석을 뺏으라.
일곱째, 젋고 강한 남녀 유대인들에게 손에 도리깨, 도끼, 곡괭이, 삽, 실패, 물레를 쥐게 하고, 코가 땀에 젖을 때에야 비로소 빵을 얻게 하라.

나치는 자신들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는데 루터를 이용했다. 나치들은 1933년 루터 탄생 450주년을 루터 교회에서 기념하며 축하했다. 그리고 나치들은 루터의 바로 그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를 재프린트하여 대중에게 뿌렸다.

루터교 성직자들도 상당수가 히틀러의 지지자였고, 그의 반(反)셈족주의를 옹호했다. 루터교 신학자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도 나치의 승리를 하나님의 선물이자 기적이라고 축하했다. 볼프 마이어 에얼라흐(Wolf Meyer-Erlach)라는 또 다른 루터교 신학자는 『유대인, 수도사들, 루터(Juden, Mönche und Luther)』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은 악마의 쉴새없는 군대라고 하며, 나치 당을 찬양하며, 그들을 유대인들에 대한 루터의 계획의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실제로 디아메이드 맥클로흐(Diarmaid MacCulloch)라는 영국의 역사가는, 루터의 1543년 바로 그 논문이 1938년 나치의 크리슈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의 밤 사건을 두고, 루터교 성직자였던 마르틴 자쎄(Martin Sasse)는 루터의 생일, 11월 10일에 회당이 불타는 일이 일어났다며 축하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안타깝게도 종교나 신앙 등의 자유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전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베일러대학교에서 강의중인 저자 로드니 스타크. ⓒ유튜브

▲베일러대학교에서 강의중인 저자 로드니 스타크. ⓒ유튜브

인쇄술과 번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는 루터가 1538년 라틴어 성경을 민중의 언어로 번역한 종교개혁자라고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그 전에도 덴마크어 신약 번역이 1524년에 있었고, 1526년에는 화란어로 전체가 번역되어 있었고, 프랑스어 번역은 1530년에 있었다.

루터 번역 직후 1541년에도 스웨덴어로, 1549년에는 체코어로, 1536년에는 폴란드어로, 1569년에는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었다. 다시 말해 1600년대는 번역의 시대였고, 전 유럽이 종교개혁과는 무관하게, 교파를 초월하여 번역 성경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책 시장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즉 성경 번역도 종교개혁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한편 자본주의 발전에 개신교 윤리가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일까? 이 주장의 근원은 막스 베버의 그 유명한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이 책은 소위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특별히 칼빈의 예정 교리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칼빈 혹은 칼빈주의는 루터의 이신칭의보다 한 걸음 나아가 예정 교리,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따라 영원에 이미 결정돼 있으며, 그 숫자는 제한적이라는 것을 주장했고, 그렇다면 현실에서 그것을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는 믿음의 확신이며 둘째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심지어 신학적으로도) 틀렸다. 산업자본주의 발흥을 지정학적으로 추적하면, 초기 가톨릭 도시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일찍이 발달한 반면, 개신교의 스칸디나비아 도시들은 상당히 늦게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는 독일 종교개혁 훨씬 이전 남유럽에서 기원했으며, 그것은 특별히 북부에서는 가톨릭 은행을 통해 그러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인 R. H. 토니(Tawney)는, 초창기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의 기업에 대한 태도와 부의 축적을 형성하게 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고 못박는다.

과학 혹은 학문에 대한 발전과 관련해서도 살펴보자. 유럽에서는 13세기 이미 대학이 발명돼 그때부터 지식은 점점 더 쌓이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갑자기 기독교가 세속 지식에서도 발전을 보인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전후 가톨릭의 지적 자유가 상대적으로 개신교보다 못했다는 이미지도 옳지 않다. 로드니 스타크는 코페르니쿠스의 과학 혁명, 1543년부터 1680년 사이의 유럽 전역에 걸친 과학계 스타 52인의 종교와 교파를 살폈다. 결론만 보자면 개신교 24명, 가톨릭 28명이다.

‘개인’은 언제 발명 혹은 발견되었을까? 로드니 스타크는 또 다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탓하고, 또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탓한다. ‘개인’의 발명 이후 부정적 발전이 이기주의와 자살인데, 뒤르켐은 가톨릭보다 개신교인이 더 자살을 많이 한다고 함으로써 이런 오해가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 로드니 스타크의 분석이고, 동시에 이러한 주장들에는 아무런 물질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또한 스타크의 비판이다.

그 외에도 미처 다 언급하지 못한 로드니 스타크의 신화 깨기나, 더 나아가 종교개혁이 가져온 비극들도 남아있다. 로드니 스타크는 도대체 왜 이런 신화가 장장 5세기에 걸쳐 사라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한 마디로 일축한다.

“대답은 괴로우리만큼 간단하다. 영어권 세계가 여전히 종교개혁들로 인한 종교 전쟁들 중 발생한 지독한 반-가톨릭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편견이 개신교의 미덕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The answer is as simple as it is distressing: the English-speaking world remains in the grip of the bitter anti-Catholicism that arose during the religious wars produced by the Reformations. And that prejudice acts to certify Protestant virtues)

로드니 스타크의 이 책의 주장들 역시, 역사가들에 의해 교차 검증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지나치게 왜곡되고 지나치게 미화되고, 심지어 역사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은 서술들에 의한 것이라면, 20세기 히틀러의 나치와 당대 루터교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로드니 스타크의 책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읽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종교개혁의 빛만이 아니라 어두움도 정직하게 마주하고 반성할 때, 이 땅의 교회들이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성화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진규선 목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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