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서평] 더 깊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성경 읽기
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 읽기
로이스 티어베르그 | 손현선 역 | 국제제자훈련원 | 300쪽 | 14,000원
들어가면서
언젠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교수님께 물었다. “좋은 번역본이 많은데 왜 굳이 히브리어를 배워야 합니까?” 교수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는 목사라면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를 배워야 마땅하고, 두 번째는 히브리어를 알면 흑백으로 보이던 성경이 칼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직신학에 흠뻑 빠져있던 나에게 성경원어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성경 원어를 ‘무척’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교리와 교회사를 강조한다. 그렇다고 성경 원어가 갖는 무게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당시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성경 원어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 원어를 안다는 것은 성경 시대의 ‘삶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았다.
원어에의 갈망은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삶’을 알고 싶었던 것임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것은 흑백과 칼라의 차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였던 것이다.
지난 3월 출간된 <랍비 예수>는 매력이면서 도전적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보와 지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경 읽기 방식에 함몰돼 있었다. 수단으로서의 성경 읽기는 종교개혁 이후 일어난 성경 읽기의 한 방법이며, 시대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성경 읽기 방식이다.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잡고 바른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이성적이며 수단으로서의 성경 읽기를 집요하게 추구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리와 정보들을 문답서와 교리 교육 안에 담았다. 16-18세기가 교리의 전성시대가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가 들어서면서 교리는 진부해졌고, 사실과 정보가 사람들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절박감이 감돌았다. 마침내 두 번의 세계대전은 근대적 성경 읽기 방식에 심각한 의문을 던졌고, 권위에 대해 극히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성경을 난도질했던 비평적 접근법 역시, 권위적이며 수단적인 성경 읽기 방식이라는 점은 기이할 정도다. 그럼, 성경의 권위가 추락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작은 질문은 다시 ‘성경은 무엇이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착됐다.
성서비평 운동이 무례하고 비겁한 면도 있지만, 결국 ‘성경이 무엇인가?’로 돌아가게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B. S. 차일즈 이후 성경 읽기는 비평이 아닌 ‘정경학적 성경 읽기’로 선회했다. 왜일까? 그동안 성경을 뜯고, 찢고, 가위질하고, 난도질했지만, 아무도 원본도 발견하지 못했고, 진짜 예수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일즈는 물증 없는 심증(心證)을 접고, 성경이 가진 본래의 의도, 즉 경전(經典)으로서의 성경(聖經) 읽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일즈의 주장은 합당한 것이며, 시대적으로도 바른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성경이 갖는 고유한 속성과 목적에 합하도록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다시 성경의 시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즉 유대인이고 랍비였던 예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랍비 예수>의 개정판인 줄 알았다. 제목부터 표지까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물론 내용도 닮아 있다. 그러나 <랍비 예수>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그린다. <랍비 예수>가 개론서에 해당된다면, 이 책은 성경 해석의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실전 편에 속한다.
전체 3부 13장으로 구분했다. 1부는 ‘새로운 눈으로 성경 읽을 준비’라는 제목으로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2부는 ‘예수님의 진리 소통 방식’이 무엇인지 4장에 걸쳐 다룬다. 마지막 3부는 ‘그분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는 제목이지만, 부록과 같은 느낌이다.
거기 있는 법 배우기
세월호 사건은 우리나라의 민낯을 보여주는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현실이었다. 세월호 사건과 함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은 답답함과 분노를 일으킨다. 침몰해 가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성경 안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른다. 행동하고, 움직이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시간을 낭비하라는 뜻이 아니다. 때를 기다리는 말이다.
봄에 씨앗을 뿌렸다면, 기다려야 한다. 가을이 와야 추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는 말은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가만히’는 찾고 구하라는 뜻이며, 끊임없이 갈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성경에 ‘가만히’ 천착(穿鑿)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다리지 않는 성경 공부를 저자는 ‘전자렌지식 성경공부’라고 말한다. 맛도 있고, 먹을 만 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산화되고 부패된다. 영양분도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된다. 그러나 편리하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저지르는 성경공부 방식이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지식으로 판단하고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살짝 데우기만 하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이러한 성경공부는 영혼을 더욱 핍절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는 ‘중동식 성경공부’ 또는 ‘유대적 맥락 속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17쪽)’고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패스트 푸드’가 아니라 ‘슬로우 푸드’식 성경 공부인 것이다.
‘거기’는 성경이다. 오랫동안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생각해야 한다. 급하게 읽고 생각하는 성경 읽기는 염수(?水)처럼 더 깊은 갈증을 일으킨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성경조차 급하게 읽어간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성경을 대충 읽고 ‘써먹을 거리’를 찾는다.
저자는 패스트푸드식 성경 읽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랍비 예수와 함께 우리만의 엠마오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24쪽)?” 하고 묻는다. 다시 2천년 전의 상황과 환경, 유대인의 입장이 돼 길을 걸으며 예수님과 이야기해 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급하게 읽어 나가는 성경 읽기보다는 월등한 효과를 가져 오지 않을까?
성경에 오래 머무는 성경 읽기란 무엇인가? 저자는 4장 ‘히브리어로 색칠하기’에서 몇 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하나의 번역에 매달리지 말고 둘 이상의 역본을 비교하며 읽는 것(66쪽)’이다. 좋다! 한 번 참고해 보자. 시편 1편 1절의 상반 절이다.
복 있는 사람은(개정개역)
행복한 사람은(쉬운성경)
그런데 공동번역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
그럼 영어 번역본들은 어떨까? 네 가지 역본을 비교해 보자. 놀라운 정도로 다르다.
Blessed is the one(NIV)
O the happiness of that one(YLT)
Blessed is the man(ASV)
How blessed is the person(ISV)
그럼 마소라 사본은 어떨까?
앞부분을 직역해 보면 “복되도다(감탄사) 사람이여, 그는… ”으로 이어진다. 문장의 서두에 사용된 ‘복되도다(아쉬레이)’는 감탄사다. 그렇다면 ‘오 복된 사람이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감성적인 특징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동사와 감성 중심의 표현법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일반 성도들이 히브리어까지 공부하기에는 벅차다. 그렇지만 다양한 번역본들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든 다양한 번역본이든 읽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성경에 천착하지 않으면 우리의 편견이나 경험들로 인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적 성경 읽기
저자는 2부에서 예수님의 소통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자가 아닌 이미지로 읽을 필요가 있으며,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성경 읽기를 추천한다.
필자는 6장을 읽으면서 섬뜩한 생각을 했다. 서구적 개인주의는 분주하고 경쟁 체제의 현대인들에게 매우 적합한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가? 기이하게도 현대는 개인주의적 성경 읽기와 묵상에 빠져있다. 특히 개인 묵상의 경우 성경을 왜곡할 위험성이 다분히 많다.
성경이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다. 심지어 개인에게 보낸 신약의 많은 편지도 개인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돌려보는 ‘회람서신(回覽書信)’이다. 즉 개인에게 준 편지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은 개인이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 성경 읽기 방식을 ‘개인주의의 사이렌’이라고 경고한다. 저자는 말을 직접 들어보자.
“상사도 없고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다. 난 나만의 유쾌한 작은 세상의 여왕이다. 게다가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개인주의의 사이렌 소리에 미혹된 경험도 많다. 어찌 보면 내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며 여러 경로를 발견하는 바는, 이런 개인주의적인 접근으로는 본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119쪽).”
개인이 아닌 ‘우리로 생각하기(123쪽)’, ‘공동체적 계명들(129쪽)’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원래 성경이 말하는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그동안 계시해 왔던 전통적인 방법이다.
8장에서는 구술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구술이란 무엇인가? 혼자가 아닌 것이다. 함께 말하고, 여럿이 듣는 것이다.
“구약이 저술된 시대는 구술 중심의 사회였고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법을 쓰며 후대의 사건을 선대의 사건에 비추어 묘사함으로써 상호 연결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구술 문화에서 의미를 암호화하는 방식이었다(161쪽).”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혹자 책을 읽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낭독이 아니라 묵독(默讀)으로 말이다. 성경은 눈으로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었다.
밥상머리 성경 공부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을 부활한 예수님은 찾아가셨다. 가만히 듣기만 하시다가, 어느 순간 함께 이야기했다. 그러다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이유는 바로 그 ‘뜨거움’ 때문이다(눅 25:32).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눅 2:28-34)”.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사용된 ‘디아노이고(διανο?γω)’는 ‘완전히 열다’란 뜻이다. 숨겨진 것을 밝히 드러내 보인다는 말이며, 실제로 ‘계시’라는 말과 뜻이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자들이 눈이 뜨일 때는 다른 때가 아니라, ‘떡을 떼실 때’이다.
저자는 10장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대인들이 교육 방식은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것이다. 밥상머리 교육은 식사를 하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함께 대화함으로 부모의 언어와 사유 방식이 자녀들에게 교육되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이 되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며 안식을 준비한다. 이 때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물론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다.
유대인의 공부법에 조금이라도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떠드는 도서관 ‘예시바(Yeshiva)’를 알 것이다.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한다. 그것도 도서관에서 말이다. 그들은 모임을 통해 끊임없이 성경을 토론하고 성경을 주제로 이야기하며 공부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나가면서
이 책은 성경이 말하는 시대와 방식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한다. 유대인을 신격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시대에서 사용된 언어와 문화, 삶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2천년 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몸부림은 필요하다. 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성경의 원의(原意)를 찾아가려는 결심이 아닐까?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원 청중의 관점을 파악해 더 많은 통찰과 영감을 구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 … 유대인이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고, 그리하여 대체로 가려져 왔던 지혜를 재발견하며,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읽어 오늘날 우리 삶을 위한 통찰을 건져 올릴 것이다(25쪽).”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라는 책에서 케네스 E. 베일리는 예수님이 태어난 마구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다음, 성탄절 연극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마구간은 소외가 아니라 환대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태어난 구유는 ‘차갑고 쓸쓸한 가축우리가 아니라 따뜻하고 살가운 집안에(58쪽)’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바라본 마구간과 성경 시대의 마구간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 이제 삶의 맥락을 놓쳐버린 교리적 성경 해석을 잠깐 내려놓고, 성경의 시대 속으로 되돌아가 천천히 그리고 깊이, 다시 성경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경이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을까?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