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학을 만나다 29] 성경과 인문학
인문학을 하나님께
한재욱 | 규장 | 304쪽 | 15,000원
책은 필히 책을 말하게 돼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 책을 낸다는 것은 고도의 정신력과 더불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글을 쓴다 해도, 아무 것 없이 쓸 순 없습니다. 전에 읽은 책이 지금 쓰는 글에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음악이나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작가 괴테도 “남에게 빌린 것을 빼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아주 조금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니 모든 책은 그것이 책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더라도 정치서든 경제서든, 신학서나 역사서, 소설이든 뭐든 간에, 책 속에서 다른 책을 언급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인문학을 하나님께>는 인문학을 통해 성경을 조명한 책입니다. 저자는 인문학의 여러 책을 언급하며, 성경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성경도 인문학의 한 도서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경전이기에, 엄격한 분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강점은 책 한 권에서 수많은 책을 읽은 듯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문학 도서를 가지고 성경을 말하고 있기에, 여러 인문학 도서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 끝부분 ‘후주’에 기재된 도서만 61권이고, 책 속에서 언급한 자잘한 도서와 글귀까지 합치면 100권에 가까운 책이 15,000원이라는 가격의 책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읽고 나면 뿌듯해지고, 남들에게 “어느 책에서 그 작가는 이런 말을 했어!” 하며 자랑하고 싶어지게 합니다.
여러 책의 좋은 글귀가 즐비하여 글귀만 따로 엮거나 외워두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사실 신앙도서라는 틀과 별개로, 이런 점때문이라도 이 책은 책값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자의 다독에 부러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저자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는 하루에 한 권 이상을 읽는다고 하니, 책은 좋아하지만 고된 일을 하면서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독서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저자도 처음엔 인문학 도서와 성경과의 접촉점을 확신하고 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냥 책이 좋아 많은 책을 읽게 됐고, 읽다 보니 인문학 도서와 성경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발견해 이런 책을 낼 수 있는 저자가 되었습니다.
또 여기에 무게를 실리게 한 점은 저자가 목사라는 겁니다. 신학적 기반을 통해 인문학 도서를 설명하니, 신뢰감이 들게 합니다.
한때 인문학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문학의 핵심은 ‘사람(人)’입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탐구하고, 사람의 원리를 파헤치는 분야입니다.
사람을 알아야 사람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방법을 알고,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 이념을 세우며,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걸 내밀게 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신(神)’,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첫 구절에서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등장하고 끝 구절에서도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사람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을 아는 것보다 중요하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언급했듯 인문학 안에 성경을 넣는 일반적인 분류는 잘못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다른 출발점의 성경과 인문학 도서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의 모든 책은 성경의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상의 모든 책은 성경을 제하고 쓸 수조차 없습니다. 성경엔 역사와 도덕, 삶의 지혜와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이든 31,173절로 된 성경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을 저자가 잘 포착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썩 좋게 읽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많으나 깊이가 얕고, 시야를 넓게 하나 볼 수 있는 거리가 짧습니다. 소개한 모든 책을 병렬식으로 늘어놓아, 아무리 성경적인 시각으로 인문학 도서를 얘기한다 해도 ‘자신의 지식 자랑, 독서량 자랑’으로 여기게 됩니다.
또 억지가 너무 많습니다. 인문학 도서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주장에 모든 책과 성경 구절을 찾아서 넣으려 하거나 이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노인과 바다>처럼 상어 떼가 우글거리는 바다에 던져진 존재, 이 ‘내던져짐(Geworfenheit)’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운명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고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현존재’는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이다(76쪽).”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잘못된 선택을 한다. ‘선택’이라는 뜻의 영어 choice에는 ‘얼음’이라는 의미의 ice가 들어가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후에 얼음처럼 냉철하게 선택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107쪽).”
“별과 꽃을 보라. 별과 꽃이 자기 자랑만 하려고 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 별은 비추어 주기에 별이고, 꽃은 웃어 주기에 꽃이다. ‘꽃’이라는 영어 ‘flower’를 보면 ‘낮은’이라는 의미의 ‘low’가 들어 있다. 꽃은 자신을 낮추며 웃어 줄 때 참 꽃이다(291쪽).”
하나하나만 보면 다 맞는 말입니다. 정말 choice에는 얼음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고, flower에는 낮다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택을 할 때 냉철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우리도 꽃처럼 낮은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거나 이런 내용을 계속 읽다 보면, 억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책의 분량 때문인지 소개한 책은 100권에 가깝지만, 너무 짧게 넘어간다는 점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을 더 짙게 합니다.
가령 광고인 박웅현이 쓴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보면, 14명의 저자의 23권의 도서를 320쪽에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이동진, 김중혁의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이란 책에선 7권의 책을 332쪽에 담아서 소개하고 있고, 이후 나온 <질문하는 책들>이라는 책은 9권의 책을 392쪽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굳이 쪽수를 언급한 이유는 깊이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 책 <인문학을 하나님께>에서 소개한 책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보조 수단으로 삼으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듯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참고로 소개한 3권의 책을 읽으면 소개한 책들을 다 사서 읽게 만들지만(실제로 저는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서 소개한 책을 바로 사서 읽었습니다), <인문학을 하나님께>는 그냥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만 들 뿐, 소개한 책들을 사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띠지의 “인문학이 명답이라면, 성경은 정답이다!”는 글도 와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정답은 맞지만 인문학이 명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인문학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넣은 문구가 아닌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나온 기독 문학 도서들 중에서 이 책을 아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그건 긴 시간을 들여 읽지 않으면서 지식이 쌓이고 쉽게 포만감이 들게 할 뿐더러, 규장 출판사 특유의 가독성 있는 편집으로 빠르게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읽게 하고 구미를 당기게 한다는 점에선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해 막연하게 ‘어렵다’고 여기는 독자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2018년 4월 나온 이 책이 문학 장르가 홀대받는 기독 출판 시장에서 오래 사랑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겁니다.
다만 다음에도 이런 류의 책을 기획한다면, 이 책과 같은 편집에 더해 깊이를 보강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