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서평] 생존의 전쟁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야근하는 당신에게
이정규 | 좋은씨앗 | 232쪽 | 11,000원
들어가면서
생경한 제목에 끌렸다. 일반 서적인줄 알았는데, 기독교 서적이라 호기심은 배가 되었다. 살아가기 위해 야근에 내몰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특이하지만 너무나 필요한 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읽고 싶었다.
2017년 2월 말에 출간되었으니 거의 1년 하고도 10개월이 지나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젊지만 다부진 저자는 무슨 말로 야근하는 ‘당신’들을 다독일까?
저자는 목사이지만, 신학을 하기 전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야근하는 직장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과 성경이 말하는 바를 풀어낸 것이다.
몸소 직장생활을 한 경험은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이것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집필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저는 사랑하는 양무리에게 무언가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위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 전체의 상황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즉 목양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는 의미다. 2014년 야근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다섯 편의 설교를 전했고, 다시 1년 10개월의 성경 묵상을 통해 내용을 보강한 것이라고 밝힌다(16쪽). 개론적인 훑어 읽기와 총평을 내려 보기로 한다.
모두 3부로 나누었다. 1부 ‘우리가 처한 비참함’에서는 4장을 할애하여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야근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상황을 실제적인 예를 들어 차분히 그려 간다.
그런데 2-4장까지는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점에서 큰 주제와 약간 엇갈린다. 2부는 4장으로 나누어 ‘안식 누리기’가 무엇인지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마지막 3부 ‘그러나 너는!’은 결론에 해당하며, 현실 속에 어떻게 안식해야 하는가를 말하면서, 성경적 안식법을 제안한다.
야근, 무엇이 문제인가?
야근 없는 직장 생활, 어쩌면 그것은 꿈의 직장일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몇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한국 사회는 야근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대안은 결국 돈일까? 많은 돈을 소유하면 평안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필자가 방금 다녀온 서점에서도, 홀로 사는 여성이 걱정 없는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마련해야 할 것, 준비해야 할 것들을 소개한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지만 핵심은 ‘돈’이다.
저자는 1장을 마치면서 모든 것을 소유해도 안식할 수 없으며, 인정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데 있다(41쪽)’고 말한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안식의 전제이자 방법인 것이다.
저자는 특이하게 안식의 문제를 ‘하나님의 생각’으로 끌고 간다.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과 마태복음 19장 16-22절을 통해 ‘탐심’의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35-136문을 소개하고, ‘야근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와 문화는 6계명을 위반하는 셈(48쪽)’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뿐 아니라 야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건강을 위협하고, 생산성도 하락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삶도 파괴한다(49쪽)’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영적 생명까지 빼앗아간다(50쪽)’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확장하여 설명해 나간다.
4장은 1부를 마무리하며 이러한 야근을 강조하는 사회 구조는 ‘인간의 타락, 즉 우리 안에 있는 죄(90쪽)’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이 필요하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남편이 야근으로 인해 영적으로 가족들을 채워주지 못하면, 가족들은 영적 외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곳에서 의미심장한 도전을 한다.
만약 남편이 경건한 삶에서 멀어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살 수 없(68쪽)’을 수 있다.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시대는 사랑하며 섬길 수 없게 만든다.
안식 누리기는 가능할까?
필자가 파악하기에 2부는 본론이자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담고 있다. 노동의 문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최초로 언급된다.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소명’이다. 특히 창세기 2장 15절은 범죄하기 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노동을 명하고 계신다.
경작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이며, 노동하다는 뜻이다. 보존하고(샤마르), 경작하는(아바드) 일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소명의 방식이다. 저자는 이것을 ‘창조적인 하나님을 반영한 즐거운 창조 활동(100쪽)’이라고 추측하는데, 이것은 매우 정확하고 바른 해석이다.
문제는 타락 이후 동일한 용어가 하나님의 저주 속에서 형벌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노동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을 하다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을 하게(101쪽)’ 된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안식할 수 있을까?
안식은 믿음을 요구한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먹이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신뢰할 때(109쪽)’ 안식이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을 만족하는 것,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사귀는 것, 이것만이 우리를 쉬게 한다(119쪽)’고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안식이 가능하다. 아삽도 ‘성소에 들어갈 때(124쪽, 시 73:17)’ 평안을 얻었다. 종말을 안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임을 아는 것 아닌가. 저자는 종말을 히브리서 4장 13절과 연계시켜, ‘악한 사회적 구조를 형성하거나 그것을 방관했던 모든 사람들의 탐욕과 음란함(125쪽)’이 만 천하에 드러날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삽이 하나님의 심판을 묵상하다가 안식을 누렸는지 알게 됩니다. 아삽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신 것 같았기 때문에 일어났고, 그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결국 언젠가는 행동하실 것, 즉 악인을 정죄하시고 의인에게 상 주실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127쪽)”.
안식은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심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방관자가 아니다.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저자는 일상의 안식 문제를 논하고 있다. 이는 또 종말을 현재화시킨다. 7장에서는 여러 시편들을 통해 ‘기도하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땅에서 육신적 안식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엔샬롬의 땅, 샬롬의 삶
탁월한 신학적 통찰이 안식을 주지는 못한다. 저자의 결론이 궁금해졌다. 저자는 9장에서 사회적 문제를 안식으로 바라본다. 신명기 5장 14절에서 모세는 일곱째 날의 안식을 언급하며, 주인들에게 ‘너같이’ 안식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구절을 주목하라고 요청한다. 즉 주인만이 안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는 데에서 배제될 수 없어야 한다(189쪽)’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해석은 무리하게 야근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안식이 올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땅은 엔샬롬의 땅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친다(199쪽).
순교하는 삶으로의 초대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부름은 죽음으로 인도한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부름은 곧 자기 부인이며, 그것은 ‘죽음’으로의 초대다. 어떤 면에서 저자의 결론은 회의적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야근을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은 요원한 것인가?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고난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난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탁하라.
필자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라(214쪽)’는 권면은 순교로의 초대이다. 아니,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선교사적 소명을 가져야 한다는 일침이 아닐까?
나가면서
술술 읽힌다. 꽤나 난해한 주제인데, 균형을 잃지 않고 올곧게 서술해 나간다. 야근의 문제를 십계명의 탐욕으로 재해석한 부분은 의외이면서 신선했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결론이었다. 과연 난해한 주제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식상한 위로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아니면 파격적인 어떤 대안을 내놓을까? 호기심은 많았지만, 차분히 읽어 나갔다. 성경적 위로와 더불어 사회적 대안으로서의 충고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식상할 수 있는 저자의 결론은, 생존을 위해 야근을 피할 수 없는 남루한 인생들에게 위로를 준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