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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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논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재성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재성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머리말

지금 시급히 한국 교회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교회의 부흥이요 소생이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절실한 제목은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무너진 도덕과 혼돈에 빠진 가치관을 바로 세우도록 진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일이다. 변화의 원동력을 불어넣어야만 한국사회와 세계역사가 회복될 수 있기에 이러한 기여를 해야만 한다. 매스컴에 화려하게 홍보를 한다거나, 겉으로 보여주는 대형행사나 무슨 운동이나 대형 집회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치유할 수 없다. 부패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며 윤리적인 재정립을 하는 길은 기독교 복음이라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기독교가 제공해야할 진리와 생명은 세력을 과시하는 대형 행사나 거대한 집회가 아니다. 혹자는 여의도에 백 만 명이 운집하던 "엑스폴로 75"와 같은 행사를 다시 시도하려고 하는데,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제발 그렇게 관행처럼 굳어져온 일련의 기독교 연합 단체들의 소모적인 모임은 과감하게 폐지하기를 제안한다. 마틴 루터가 내던지라고 외쳤던 "면죄부"와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은 더 이상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공허하게 바람이나 일으키고 그칠 일들은 이제 더 이상은 없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절실하게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해답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서 철저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별하면서 칭의론의 기초로 삼았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차지하는 두 가지 순종의 특징들을 잘 이해하고 따라갈 때에, 한국 교회는 건강한 모습으로 빛을 밝혀주는 세상의 등불이 될 것이다.

1. 윤리상실과 열매부재

기독교의 기본구조는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서 가장 선명하게 밝혀진다. 기독교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증거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의 기본구조는 부패한 인간 사회의 회복을 위한 복음이다.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도 썩고 부패한 인간의 죄악들로 넘쳐나고 있으며, 타락한 인생들이 뿌려놓은 죄악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매일 언론에 비쳐진 사회가 다시 회복되려면, 기독교의 신앙윤리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최근에 세계를 슬프게 한 사건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Me Too"("나도 역시"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발의 물결이 연일 언론 보도를 통해서 확산되었던 일이다. 지난 날, 비윤리적인 열매와 부도덕한 행태들이 이제 와서야 낱낱이 고발을 당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 그리고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무시되어왔던 여성들의 인권이 다시금 존중을 받는 과정인데, 그 과정은 실로 고통스럽기만 하다.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전반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 안에도 추악한 세속화의 물결이 확산되어져 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세계, 쾌락지상주의가 은밀하게 어두운 세력을 확산시켰음이 드러나는 중이다.2) 한국사회는 1990년대 이후로, 컴퓨터 시대가 도래 했는데, 민주화된 국가체제를 구축하고자 권위주의적인 군사문화와 사회구조를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라는 헌법과 국가의 틀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제도화하는데 다소 성공했을 뿐이다. 진실과 정직, 겸손과 사랑, 이해와 공존의 구현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급속한 민주주의에의 열망은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을 양산하였고,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의 의식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초고령화 되어가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인구절벽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몰려오고 말았다. 치열한 입시경쟁에 이어지는 취업전쟁 속에서 출산율 감소, 결혼지연, 대량 실업자 문제가 갖가지 사회적 갈등 구조를 양산하고 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급격히 감소했는데, 그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대비책도 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급속한 고령화로 대책 없이 물러나는 장년층과 노년층이 교회의 주류인데도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도시, 대형교회들만 살아남았는데도, 그러한 처지와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한국교회의 침몰을 자초하는 폐해를 양산하고 있다. 일부 지도자들이지만 세상적으로 알려진 대형교회의 각종 스캔들과 성추문, 목회자의 세습, 권위적인 개척설립자의 목회행태, 재정집행의 불투명성, 등등 날개 없이 추락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열매 없는 나무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경계를 기억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 기록된 가르침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핵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질타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양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늑대와 여우처럼 속이는 자들인 것이다. 가짜 복음을 전하는 거짓 목자는 양떼를 미혹에 빠뜨려서 망하게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부터 오백년이 흘러왔다. 개혁신학으로 근간을 삼아서 교회를 조직하고 예배를 드리며 섬겨온 지난 오백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 7:17). 좋은 열매의 요람으로서, 참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종교 개혁자들이 잘 보여주었다.

세속화와 극도의 개인주의, 물질적인 쾌락주의가 범람한 가운데 교회마저도 분열과 경쟁에 내몰리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쓸모없다고 저주하셨다 (마 21:18-18). 겉으로는 화려하게 정통처럼 포장하고, 속에는 아무런 결실이 없다면, 대형 교단도, 큰 교회도 역시 로마 바티칸 베드로 성당이나, 고딕 예배당들처럼 관광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1510년, 루터는 바티칸을 방문하고 도둑들의 소굴이라고 로마 교황청을 비판했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임재, 권능, 약속은 전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발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3)

루터는 1513년부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가르치면서, 부족한 죄인들이 아무리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충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절마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물가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시 1, 23편). 복음에 신실하고 미래의 전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교훈과 유산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은혜를 받는 길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만이 자기만족과 오만에 빠진 사람들의 오류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요, 진리이며, 길이다.

다른 종교와 철학과 교과서에서는 결코 순수한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은 지성적인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의 가르침들이 과연 진실했느냐의 여부는 반드시 그 구성원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서 영적인 결과와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져 있다. 어떤 종교와 철학이든지, 지금 나타나는 적나라한 현상들과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지닌 궁극적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리를 해체하였고,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밀어내려 했지만, 인간세계에는 그저 더럽고 추한 부도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인류구속의 사역들과 가르침들만이 참된 진리이다. 공허한 이론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참되다는 여부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에서 열매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서는 한 점 부끄러움을 발견할 수 없다. 그토록 고상한 진리와 참된 가치를 전달받아서 성장해온 오늘의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더 성장하도록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2. 아담 V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아담의 행동과 긴밀히 연계성을 갖고 있다. 히브리서 2장 6-9절에 이를 명확히 밝혀주었다. 모든 인간의 부조리와 불행한 죄악의 참상은 아담과 이브에 게서 시작되었고, 인류사회에 계승되고 있으며, 문화와 문명을 담아나가는 세계사의 적나라한 실재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아담의 실패와 그 후손들의 죄악이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복음을 받게 하여 새언약을 맺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는 아담의 죄악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기 밝혀졌다. 아담은 실패했으나 그리스도는 승리를 쟁취하셨다.4) 아담은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된다. 이와 같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자 머리가 되신다. 이 땅위에 오셔서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것들을 완전히 다시 성취를 하셨고, 믿음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의로움을 전가시켰다.

2.1.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음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생각, 믿음, 지식에 있어서 우선권과 주권을 갖고 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며, 원래 생육하고 번영하면서 우주 안에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창 1:28).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란 이 땅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임무와 밀접하게 연관성을 맺고 있다.5)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었기에, 그가 수행할 최고의 임무로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져 있었다. 아담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과 매우 유사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이에 도덕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었다.6) 아담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스리고 경장하는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이 첫 번째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일들이라는 것들이 시간적으로 무한정하다거나, 무작정 제멋대로 수행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두 번 째 명령을 내렸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창 2:16-17). 여기에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엘로힘"인데, 하나님이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사용하셨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책임을 어기고, 불순종하였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계시와 함께 주어졌다. 아담의 원죄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의미하며, 오염되며 부패한 도덕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어졌다.7) 에덴에서 아담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 오경에서만 85회나 반복되어진다. 아담은 타락 후에 930년을 살면서 후손들의 번성을 목격했었고 죽음을 맞이했다(창 5:5).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사탄에게 현혹당하여 불순종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임재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고, 파멸했다.8)

아담의 모든 행위들은 놀라운 종말론적인 의미와 구원론적인 목표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아담의 순종은 그가 대표하는 모든 후손들에게까지도 주어질 종말적인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과 실패가 초래한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었다(고전 15:22, 롬 5:14).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첫 아담과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생애 기간 동안에 모든 율법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고, 온전히 첫 아담의 실수를 회복했다. 신약복음서는 인류의 구원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 생애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다루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중요하지만,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들 중에서 마지막에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전생애를 통해서 이뤄진 일들을 모두 다 담아냈다.9) 로마서 5장 12-21절에 보면,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와서, 아담 자신만이 아니라 결국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왔음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와 대조를 시키고 있다.10)

죤 머레이 교수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과 후손들의 것으로 간주되어졌다는 전가의 내용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11)

1)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죽음과의 긴밀한 연합 (롬5:12,15,17)

2)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정죄와의 밀접한 연합(롬 5:16,18)

3)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죄가 긴밀히 결합됨(롬 5:12,19)

4)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본질적인 대조(롬 5장 전체)

로마서 5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속죄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모두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의 성취로 제시되는 구원의 객관적 준비와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주관적 수용이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의가 완전히 실현되어서 영생과 생명이 왔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두 갈림길에서 아담의 길로 따라가는 데서 빚어진다. 어서 빨리, 아담의 길에서 돌이켜서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만 한다.12) 로마서 1:18-2:16에 보면,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였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신성과 정의의 요구를 드러내셨다(롬 1:19).

창세기 2:16-17에, 순종의 요구는 명백한 기준으로 제시되어졌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코 죽으리라" 하나님의 법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 한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롬 2:6). 이것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육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완전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 법을 어긴 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그래서 율법을 단순히 듣는 자기 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라가 되라고 권고 하신다(롬 2:13).

"저는 율법을 들은 적이 없나이다."라고 그 어떤 사람도 핑계하지 못하도록 양심에다가 일반적인 계시로서 새겨놓았다(롬 2:15). 모든 인류는 동일한 한 가지 법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양심에 새겨진 법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진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하지만, 제대로 실행이 되지 않고 있기에,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이 다시 특별계시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덕적인 율법의 특성을 분명하게 제정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율법 중에서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거나, 버리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될 것이고,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율법은 반드시 사람에 의해서 성취되어지고, 완성되며, 이뤄져야 한다. 물론, 예수님만이 이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자칭 의롭다하는 율법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묻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반문했다. 레위기 19:18, 신명기 6:5절에 나온 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 10:28).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고, 이것은 "새 계명"이라고 강조했다. 요한 칼빈은 "새 계명"이란 이전의 옛 명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강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13)

2.3. 의로움과 율법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를 실천하였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장 5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하였다. 야고보서 1장 22-27절에서도, 율법을 그저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구절들은 신명기 27장 26절,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를 인용하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의를 "실행한다" (doing)는 헬라어는 "포에이사이" (poiesai )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갖도록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그의 법을 따라서 완벽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요구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죄에 대한 징벌까지도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는 긍정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3:10절에서,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다.

의를 실천하는 기준이 율법 안에서 제시되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율법의 기능들을 강조하였다. 멜랑히톤은 루터가 제시한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첫째로 죄를 비쳐주는 거울의 용도, 둘째로 세상에서 악을 억제하는 용도가 있음을 강조했다. 율법의 기능이 매우 부정적으로 비쳐지는데, 멜랑히톤은 이외에도 현재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주장했다.14) 칼빈은 이것을 받아들여서 구약의 율법들이 감당해온 기능들 중에서 "제 3용법"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고 해석했다.

율법의 제3 용법이란, 감사의 규범, 혹은 복음에 대한 반응의 용도이다. 성령이 율법을 사용해서 죄인들에게 율법을 선포하게 되면, 중생케 하고, 회개하게 만든다. 기독신자의 생활 속에서 율법은 지속적으로 죄악 된 욕망들에 대한 권징을 받도록 하며, 매일 회개를 촉구하되, 죄악 된 미혹과 함께 날마다 씨름할 때에 교훈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루터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기능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칼빈은 매우 다르게 긍정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2.4. 그리스도의 비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행할 사명으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다른 곳에서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가르쳤다(마 3:15). 의는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었다. 제자들이 배가고파서 힘들어 할 때에도,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고 선포하였다(요 4:34). 예수님은 그냥 혼자서 일방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실체 모든 분야에서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모든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초능력자,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갖난 아이로 낮은 자들 가운데서 출생하였고, "율법 아래 낳으신 분"으로 오셔서, "초등학문"(stoixeia ) 아래서 "종노릇 하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구해주셨다(갈 4:3-5).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인간의 모든 단계에서 율법의 요구를 을 완전히 성취하고자 함이었다(요 6:38-40, 17:3-6).

빌립보서 2장에 설명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되, 적어도 다섯 가지 용어들로 풀이되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한 다섯 가지 내용들을 간추리자면, 자기 비움, 사람의 모습, 종의 형태, 겸손함, 죽음의 순종 등이다. 특히 순종에 대해서는 따로 단락을 나눠서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대조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 자기 비움 (케노시스)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시오, 동등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며,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분이시다.15)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이해는 초월적인 영역이라서 완전히 다 알 수는 없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모르페"인데, 영어로는 "형태" (form)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지위를 가졌으나, 자신의 영광과 존귀함을 부인하고 죄인된 사람의 형태를 취하였다. 원래는 하늘의 통치자이기에, 신적인 본성에 속한 권능과 특권을 모두 다 가지고 누릴 수 있으신 분이시다.

칼빈은 "자기를 비워"라는 본문을 풀이하면서, 여기서 사용된 "케노시스"(kenosis)라는 용어가 가져오는 혼돈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성을 비우신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추셨다고 해야만 한다. 성자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 자체를 전혀 비우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으로 신성을 숨기셨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신성마저도 "케노시스"의 상태에 포함시키려고 하는데, 이것은 본문에 대한 왜곡이다.16) 빌립보서 2:7에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 "케노시스"는 단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본성에 관련지어서 스스로 성자께서 낮아지심을 지적한다. 성자는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시고자 진정 사람과 똑같은 몸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이다. 자기 비움이란 용어는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의 극치이자, 자기의 특권과 권능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이런 개념들은 상호 교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신적 위엄을 포기하시고, 비하를 통해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나. 사람으로 몸을 입고 오신 분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취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비하"(humiliation)와 승귀(exaltation)라는 두 가지 신분으로 풀이했다. 두 가지 상태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비하의 마지막인데, 동시에 그의 승귀를 향한 길이기도 하다"고 아름답게 연계됨을 강조했다.17) 승귀의 신분은 부활과 함께 시작해서, 승천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정좌하시다가, 재림과 최후 심판으로 장차 드러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자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성육신으로만 좁게 해석하지 않았다. 비하의 신분에 계시는 동안에는 신적인 전능하심을 완전히 다 발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특권과 지위와 권능을 포기하고, 곧 하나님의 본체가 누리는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율법에 복종해야만 하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빌 2:7). 이것은 복음서에 서술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그대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신성을 가진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을 몰고 왔다. 육체를 가졌기에 율법을 지켜나가야 할 대상이고,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그 누구도 나사렛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들에는 유일하신 중보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삼중직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다.18) 중보자의 사역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성자 하나님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결정적으로 거룩하심과 권능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19)

다. 종의 형체를 입으심

그리스도는 종이 주인을 받들고 높여 주듯이,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 원래 예 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으로서 모든 것에 통치자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군왕들처럼 호령하고, 압박하며, 군림하는 나라를 세우지 아니하셨다. 도리어 요한복음 13장 4-5절에 상세하게 소개된 바와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신분상 자발적인 비하를 의미한다.

종이라는 용어는 로마제국 시대의 수직관계라는 사회적인 상황이 반영되어지는 단어이다. 종이 되었다는 것은 지위의 박탈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종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되어지는 수치를 감당해야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야만할 인간다운 지위와 대우를 상실한 종으로 오셨다. 그분에게 인간적인 특권이나 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의 종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평범한 종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비천한 자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대신 지불하는 처절함을 심화시켰다. 그분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욕과 형벌을 당하기까지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았다. 십자가의 처형 이후에는 가장 처절하게 음부에까지 던져져서, 모든 인간의 처절한 고난을 다 맛보았다.20)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불순종"의 영이었다(벧전 3:19).

라. 자기를 낮추심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가난하게 되셨다(빌 2:8; 고후 8: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겸손함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님은 가난한 인간의 삶으로 인류의 고통에 참여하셨다. 성육신의 전 과정은 인류를 품으시되, 소외된 곳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들까지도 모두 포용하시는 사건들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서 자신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빌 3:8-9). 바울 사도의 겸손은 사역의 동기이자, 목적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깨닫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빌 3:14).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라는 헬라어 "타페이노스"는 겸손(humbleness)이라는 보다는, 수치 (insult, shame) 혹은 굴욕 (indignity)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일반적으로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고, 오만이다. 로마제국에서나, 헬라 문화에서는 "타페이노스"를 단순히 겸손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이 이사야서 53장 8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겸손한 용기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0-12).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는 데에 필요한 것은 겸손한 용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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