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호(의료윤리연구회 운영위원/명이비인후과 원장)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낙태죄는 사실상의 위헌이 되었다. 내년 말 개정안을 내기까지 치열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이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주제는 생명의 시작점에 대한 확고한 인지다.
현대생물학이 얘기해주듯 자기복제와 단백질 합성이 가능한 상태를 생명으로 본다. 인간 생명의 시작 역시 바로 그러하다. 임신의 시작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신체적, 정신적으로 취약한 생명이기에 낙태 논쟁에서 태아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태 중의 생명을 중단하는 시기를 어설픈 숫자로 정할 때에 태 밖에 있는 생명 역시 머지않아 그 경계선에 포함될 것이다. 넓게는 장성한 생명이라도 취약성을 보인다면 강제적인 생명 중단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경사 길에서는 멈춰서기 어렵다.
언덕 위에 멈춰 있는 자동차의 앞 바퀴가 약간이라도 경사 길로 접어들어 구르는 순간 그 차는 멈추지 않고 언덕 밑까지 굴러 내려간다는 것이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이다.
이 논증은 네덜란드의 안락사와 조력 자살의 사례를 통해 잘 드러났다. 네덜란드의 안락사는 극히 엄격한 통제와 제한된 조건하에서만 허용하기로 하며 시작되었다. 확대적용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임종직전 환자가, 견디기 어렵고 회복이 불가능한 신체적 고통이 있을 때'에만 엄격히 제한해 안락사를 허용키로 했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면에서 신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신체적인'이라는 말은 누락되었다. 정신적 고통이 포함되자 이번에는 '질병이 아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안락사가 만일 고통을 종결시켜 주는 좋은 일이라면 이제는 임종 직전의 환자들에게만 이 의료 혜택을 제한할 이유가 없어졌다. 임종 직전이 아닌 질병으로 수년간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기 위해 '임종 직전'이라는 문구도 삭제되었다.
급기야 자기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치매나 혼수상태, 유아나 신생아들이 불공정하게 혜택을 못 받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의사를 표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안락사를 확대하여 허용하게 되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판결을 심히 우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재판 직후 사회경제적 사유로 '독자적 생존이 어려운' 태생 22주 아기까지는 낙태를 허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자 같은 이유라면 22주 이후의 낙태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단체에서 즉시 나오고 있다.
생명을 중단시키는 엄중한 결정 앞에 '사회경제적 사유'라는 모호성과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구를 넣었다. 합법적인 낙태의 요건이 확대 적용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장차 독자적 생존 능력이 안 된다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히면, 중한 질병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들은 가능한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갈 수도 있다. 이를 영아살해라고 부른다.
이번에 개정안을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사회인지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우리 사회는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고 사회경제적으로 약한 자를 도와주는 데에 가치를 집중시키고 있다. 신체적으로 어려운 장애인을 위한 시설, 경제활동이 어려운 이들을 돕는 수당, 미혼모와 고아들을 돌보는 제도들이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다.
아무쪼록 생명의 시작인 태아를 지키는 일에 이 사회가 더욱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산모 혼자 고통받지 않도록 남성의 책임을 강화시키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피임교육만이 아닌,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과 발달에 대해 알려주고 성과 생명에 대한 책임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
편안함과 안락함만이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울지라도 생명을 지키고 키워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 땅에서 호흡하는 우리 모두는 부모님이 생명을 선택해 주었기에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살아있는 우리가 책임을 가지고 생명을 선택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아기들이 빛도 못보고 미끄러운 길에서 굴러 떨어져 죽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