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한국의 ‘반일 영화’ (下)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최근 매년 제작되고 있는 반일 또는 항일 영화들을 유해진(황해철), 류준열(이장하), 조우진 등의 출연으로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원신연 감독의 영화 <봉오동 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반일 영화들은 올해 <자전차왕 엄복동>과 <항거: 유관순 이야기>, 2017년 <군함도>, 2016년 <밀정>, 2015년 <암살>, 2014년 <명량> 등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역사와 미래: 완성을 위한 시간, 성취를 위한 시간
서구의 연대기적 시간관, 즉 크로노스적(Cronus) 시간 개념은 주전 4세기경 활약했던 고대 마케도니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만물의 변화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완성을 향한 운동(κίνησις, 키네시스)으로 보았다. 따라서 만물은 아직 그 완성이 현실화되지 않고 그 가능성만 갖고 있는 가능적인 상태, 즉 가능태(δύναμις, 듀나미스)에 속해 있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차 완성되고 온전해져 그 완성이 현실화된 상태인 현실태(ἐντελέχεια, 엔텔레케이아)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만물이 미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고는 훗날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사도들과 교부들이 보기에 타당한 시간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사도들, 특히 사도 바울은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 그리고 신앙의 훈련과 성숙을 통해 장성함, 자라감, 온전해짐에 이른다는 개념을 수시로 강조했으며, 교부들 역시 이런 ‘발전적’인, 온전함에 이르는 시간의 개념을 계승했다.
그들은 개인적 차원의 온전함과 장성함뿐 아니라, 세계 역사 전체도 하나님의 마지막 뜻의 성취를 향해, 즉 종말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보적 시간 개념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이런 선형적 시간 개념은, 20세기 초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의해, 그의 비선형적 시간성 개념에 의해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구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서구 역사가들은 과거 자체를 조명하는 데 급급하고 과거의 지헤를 숭상하는 데 그치는 복고적 역사 이해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향후 어떤 방향으로 새롭게 완성되어가는 미래가 다가올지를 살피는 데 주력한다.
이들에게 과거의 체험들이란 이처럼 예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방향의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해 보는 참고자료 정도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 자체를 단편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이유가 되는 사람의 삶의 본질, 사람의 심리적-정서적 본질을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물의 원리와 이치를 파고들어가려는 호기심과 인간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의 역학관계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그 사실들의 주인공인 인간들의 삶의 정황과 본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인간 이해는 당연하게도 기독교적 인간 이해 요소인 인간의 죄성과 우상숭배의 본성에 대해 수긍한다.
근대 영국의 경험주의 인식론자이자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죄성과 악의 심성을 지목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기술한 바 있다. 그는 이런 인간 규정이 영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아니면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칸트는 인간이 실천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에 의한 도덕적 실천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나 감각적인 감정인 쾌락을 따르는 존재라 규정했다. 근대적 인간 이해는, 비록 인간이 ‘가능적으로’ 선하고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현실적으로’ 선하고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긍했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역사와 그 속에서 수행되는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이해하려 하였다.
◈반일 정서와 미래: 한국 역사영화의 참신성 회복을 위하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작 <쉰들러 리스트>(1993)는 이런 서구적 역사관, 시간 개념, 그리고 인간 이해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쉰들러(리암 니슨 분)와 그의 동업자 스턴(벤 킹슬리 분)은 사회적 처지상 나치 이념을 따르는 독일인과 그 밑에서 압제받는(혹은 죽임을 당하는)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쉰들러는 당시 독일 점령지였던 크라쿠프의 유대인 학살 장면을 본 후, 자신에게 부여된 표면적-사회적 처지를 분쇄하고 자신이 고용한 유대인 1,200여명을 살리기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사회적 위협을 감내한다.
쉰들러는 우리가 흔히 영화적 표현으로 입체적 캐릭터라 말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는 돈과 술과 여자를 추구하고 즐기는 방탕한 사람이었지만, 학살 장면을 보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독일인-유대인의 민족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불의의 현장에서 그 불의와 함께하면서도 고뇌하는 인간의 진솔한 심정과 본성이 그려질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 자체를 깊이 들여다보려 할 때, 역사는 과거의 패턴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보다 완성된,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자유의 결단과 실천의 사례를 보여준다.
국내 여러 항일 영화들에 등장하는 캐릭터에는 이런 입체적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인간 본연의 양심과 자유의지를 따르기보다 ‘한국 민족’이라는 고착된 선을 따른다.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이나 <밀정>의 리정출(송강호 분)이 일제와 한국 민족 사이를 오가는 입체성을 보여주지만, 그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한국 민족’이라는 선결 기준을 놓고 고민하는 것일 뿐 스스로의 삶을 기준으로, 인간됨 자체를 기준으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유와 선의 기준이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프로파간다에 의해, 좌파 계열의 정치적 입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는 까닭에, 한국의 반일 영화들에서는 사실상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항일 독립운동에 들어선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이런저런 소소한 이유들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행동지침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일단 한국 민족을 위하면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는 단편적 이분법 논리가 감정적 호소력 때문에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갑갑한 상황이 매년 재현되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역사를 가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수하게 존재한다.
소위 대체 역사물이라고 하는 장르 소설들을 보면 우리 한국의 민족주의가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못지 않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영향력을 미치는 사상이자 정서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민족주의 일변도의 대체역사물들 가운데 특이한 작품이 존재한다. <대한제국 연대기>라는 작품인데, 장르소설로 분류되기에 순문학으로 인정되지도 못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대체역사물 중에서 수작으로 평가될 만큼 독창성과 진지함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만일 15세기의 조선이 일본과 중국 대신 동아시아의 헤게모니 국가로 발전했다면’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의 경로를 밟은 나라들의 역사를 참조해 가상의 한국 역사를 픽션으로 기술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강대국이 된 조선은, 마치 조선을 압박하던 청나라나 임진왜란기의 일본이 조선에게 그랬던 것처럼 침략과 식민화, 수탈을 자행한다. 아울러 세계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어 마치 19세기 당시의 미국인들과 같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화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도 한다.
이 소설은 한국 사람이기에 선하고, 일본인이기에 악하다는 민족주의적 이분법을 완전히 벗어나, 각각의 정치적 환경에 놓인 사람이 주로 따르게 될 역사적 경로를 예견해본다는 점에서 여타의 민족주의적 대체역사소설들과 구별된다.
최근 연달아 개봉되고 있는 반일 영화들이 민족주의적 정치 프로파간다의 프레임에 갇힌 데서 벗어나려면, 이렇게 한국 민족을 하나의 독보적이고 고유명사적인 이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역사를 다루는 한국 영화들이 보다 개연성 있는 서사, 입체감 있는 캐릭터를 선보이며 작품성과 흥행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반일 영화가 자주 식상함의 대명사로 지목되며 흥행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전히 한민족이라는 이념의 틀에 갇혀 우리 개개인의 현실적 삶을 되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제작자들이 현 집권층의 편향된 정치 이념에 편승해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성과를 얻으려 하는 태도 또한 주된 원인일 것이다.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으면서 정교한 역사물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과 역사를 복고적으로, 유교적으로, 민족주의적, 획일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미래적으로, 기독교적으로, 실존적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진정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역사 콘텐츠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