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
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에 이어,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의 설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사무엘상 15장 17-23절
제노비스 신드롬
심리학 용어가 가운데 ‘제노비스 신드롬’ 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통해 만들어 졌습니다.
1964년 3월13일 새벽 3시 20분, 미국 뉴욕 어느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캐서린 제노비스가 늦은 시간에 귀가하던 중에 괴한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소리쳤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괴한에게 찔렸어요!”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은 아파트 주민들이 그 새벽에 불을 켜고 밖을 내다보자 괴한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아파트의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괴한이 다시 돌아와 그녀를 찔렀습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괴한은 다시 계단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괴한과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주민 38명이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한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고, 범인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만들어진 심리학 용어가 바로 ‘제노비스 신드롬’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은 목격자가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이 적어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방관하게 되는 심리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노비스 신드롬’을 ‘방관자 효과’ 또는 ‘구경꾼 효과’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노비스가 괴한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주민들에게 ‘왜 그냥 지켜보고 도와주지 않았냐?’ 고 물으면, 그들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왜 경찰에게 신고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신고할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제노비스 신드롬’은 오늘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도 하지 않을 이유를 찾다 때를 놓친다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예찬했던 인도의 타고르 시인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있어도 하지 않을 이유를 찾다 때를 놓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사고에만 머물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고 싶다’와 ‘한다’ 사이에서 고민하다 때를 놓친다. 그 이유는 이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아서다.”
타고르가 이 글을 쓸 때, 인도는 전쟁 중이었다고 합니다. 전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이 많은 부자와 교육받은 지식인은 그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타고르는 사람들이 입으로만 떠드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타고르가 쓴 글의 첫 부분이 정말 크게 공감이 갑니다.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있어도 하지 않을 이유를 찾다 때를 놓친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그것이 하기 싫어서 변명을 늘어놓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때를 놓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변명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외적인 장애물도 만나고, 내적인 장애물도 만나게 됩니다.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힘겨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장애물 가운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변명’이라는 장애물입니다. 이것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장애물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더 극복하기 힘든 것입니다.
변명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명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변명을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변명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자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종일 토끼 사냥을 하던 사냥꾼이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산을 내려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냥꾼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까?”
사냥꾼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토끼란 녀석은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가랑잎 소리만 나면 벌써 도망을 갑니다. 촉각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조그마한 발자국 진동에도 적을 알아차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 언덕을 오르는데 명수입니다.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을의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은 토끼를 못 잡는데 대한 구실과 논리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논리와 신념이 전혀 없군요. 당신이 토끼를 잡기 전에 당신의 논리와 핑계를 버리고 새로운 신념을 가지십시오.”
사냥꾼이 토끼를 못 잡을 수밖에 없는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결국 자기가 위로 받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냥꾼인데 토끼가 너무 예민하고 빨라서 못 잡았다고 해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둘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변명을 할 때도 많습니다.
한 부자가 하인과 함께 여행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흙이 묻은 신발이 다음 날에도 여전히 더러워져 있자, 하인을 불러 앞으로는 신발을 잘 닦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어차피 신발을 닦아 봤자 주인님께서 나들이 하시게 되면 다시 더러워질 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오후, 부자와 하인은 어느 식당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식당 주인에게 1인분의 식사만 주문했습니다. 하인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주인이 자기 것만 시키고 자신의 것을 시키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인은 주인에게 “주인님을 모시고 다니려면 자기도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배가 무척 고픈 시늉을 하였습니다. 주인은 하인의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저녁은 먹어 무엇 하려고?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파질텐데….”
하인은 주인의 이 말을 듣고 아침에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변명은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그 변명이 상대로 하여금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변명을 하는 진짜 이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2가지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이고, 우리가 변명을 늘어놓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를 그것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했다면,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그 일을 했으면, 대부분 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변명이 무서운 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혹 주위 분들 가운데 늘 변명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변명이 습관이 되어 그렇습니다. 변명하는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좀 더 귀하게 쓰임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변명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 사전에 변명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왕은 변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특명을 내리십니다. 그 특명은 아멜렉 족속을 치라는 것입니다. 치되, 완전히 진멸 시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곧 그들의 소유를 비롯한 동물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심지어 젖 먹는 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젖 먹는 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너무 잔인하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멜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을 너무 미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미워하시게 된 이유를 출애굽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이끌림을 받아서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으로 싸움을 걸어온 족속이 바로 아멜렉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변변한 무기도 하나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아말렉 족속은 전쟁에 능한 족속이었습니다.
전쟁에 능한 아멜렉 족속이 전쟁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치겠다고 하니 하나님은 그들이 너무나 미우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아멜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음으로 인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 17:14)”.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사울왕은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변명하는 사울왕
사무엘은 사울왕을 찾아가 남겨져 있는 짐승을 보면서,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하였냐고 물었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20-21)”.
사울왕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순종했다고 합니다. 다만 백성들이 다 죽여 버려야 할 짐승 중에서 하나님께서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사울왕의 말이 맞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울왕의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왕이 다 진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짐승을 남겨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울왕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변명을 하면 통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변명하는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조지 허버트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지옥은 훌륭한 변명과 핑계와 소원으로 가득한 곳이다.” 사람들한테는 가끔씩 변명이 통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도 변명이 통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날에 주님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이들이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주님께 기대하는 대답이 어떤 것일까요? “내 사랑하는 종들아 수고 많았다. 잘했다.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하여라.”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는 주님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고 하는 저들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당연히 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고 하는 이들의 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들은 주님 앞에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실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변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된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의 이름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헐크’ 였습니다. 이 드라마의 기본 설정은 방사능을 연구하던 브루스 배너 박사가 감마선에 노출된 후 분노할 때마다 괴력의 녹색 거인인 헐크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되게 나가야 합니다.
변명이 아니라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쿨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지적하시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제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으면 쿨하게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한국 천주교가 ‘내 탓이오’운동을 벌여 좋은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차에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녔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기도할 때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오!”라며 기도문을 암송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기도라면 너무나 좋은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통하여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영향력을 미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범하고 힘들게 변명하는 것보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쪽이 더 낫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어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고백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하나님 앞에 똑같이 범죄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범죄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고 다윗은 변명하지 않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 했습니다.
사울도 사무엘이 죄에 대한 지적을 했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것은 하나의 연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삼상 15:30)”.
사울은 자기가 범죄했지만,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는 나를 높여 달라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결국 이런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맙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이 제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기꺼이 지겠습니다. 그 대신 짐꾼을 사서 대신 지도록 해주십시오. 제게 정직하게 살라고 하셨지요. 단 장사할 때만은 예외로 해주세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대신 원수의 항복부터 받아내고 용서하겠습니다. 주님이 물질을 바치라고 하면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헌금을 드릴테니 주보에 꼭 이름을 넣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변명하거나 포장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넘어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변명하지 않고, 잘못을 했을 때 인정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다음 해야 할 일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행할 수 없는 말씀을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있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문제가 없는 분이십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가 보기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삶 가운데 어떤 시험이 오던 감당해내는 것입니다. 핑계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조미하가 쓴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없다’ 책 중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심장이 뜁니까? 열정이 남았습니까? 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라며 포기하고 있습니까? 핑계를 대지 마세요.
심장이 뛰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열정이 있는 한 꿈은 이룰 수 있습니다. 힘내서 다시 시작하세요. 두 손 불끈 쥐고 다시 시작하세요. 세상은 도전하는 사람 것입니다.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없습니다.”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예” 뿐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예”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인간이지라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시 해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출저: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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