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에 이유가 되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본문: 열왕기상 12장 25-33절
인생은 모래시계다
100주년기념교회를 은퇴하고 거창으로 내려가신 후, 기자가 이재철 목사님을 찾아가 인터뷰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 목사님은 ‘인생은 모래시계’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날로그 시계는 초침과 분침, 시침이 동일한 시계판 위를 무한 반복합니다. 디지털시계는 0부터 59까지 숫자가 무한 반복합니다. 그 속에서는 나의 지나간 날이 안 보입니다. 내 나이와 상관없이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모래시계는 다릅니다. 생김새부터 다릅니다. 삼각형 모양의 두 유리병이 역방향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나는 1949년 4월에 태어났습니다. 한국 나이로 71세, 날수로 따지면 69년 11개월을 살았습니다.
내 눈에는 보입니다. 내 유리병에 69년 11개월이 텅 비어 있습니다. 유리병의 윗부분에 남 있는 모래의 양보다 빈 공간이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 블라인드를 올려서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감격할 것입니다. ‘내 모래시계의 윗부분에 또 하루의 모래가 남아있구나.’
시편 8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찬 아름다움과 주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생각하시며’라고 묵상했습니다. 나는 ‘재철이가 무엇이기에 재철이를 생각하시며’라고 묵상합니다. 그러니 폭풍이 친다고 문제 되겠습니까? 비가 내린다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거대한 자연이 내게 삶에 대한 겸손과 삶에 대한 감격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맞지 못했을 날들, 상상하지 못했을 날들을 나는 오늘 하루도 맞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잘 살아야 한다
저는 이재철 목사님께서 우리 인생을 모래시계로 비유한 것에 대해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모래시계에 윗부분 유리병에는 모래의 양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래시계 윗부분의 유리병에는 아래에 떨어질 모래의 양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드신 분들은 유리병에 있는 모래의 양보다 빈공간이 더 많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빈공간보다 남아 있는 모래의 양이 더 많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래의 양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주어진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가 나에게 남은 마지막 모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재철 목사님처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 모래시계의 윗부분에 또 하루의 모래가 남아있구나” 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하루의 삶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은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을 ‘이생’이라고 하지 않고 ‘일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우리는 정말 잘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하면, 위치가 아니라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위치란 성공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꿈과 성공은 가치의 자리에 까지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있습니다. 꿈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일까요? 그 꿈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직업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의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축구선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화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선생님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꿈은 실제로 꿈이 아니라 어떤 직업입니다. 그 직업을 갖는 것이 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꿈은 그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 직업을 갖겠다는 것은 하나의 성취이지 꿈은 아닙니다.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이룬 다음에 그 성공을 통해서 무엇을 위해 살겠다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직업을 갖고 성공을 이루는 것은 어떤 위치에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가치의 문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
사사 시대가 끝나고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고 그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난 이후 나라가 쪼개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고,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삼고 요새화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부느엘도 건축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나라에 필요한 적절한 도읍지와 군사적인 요충지도 마련하게 되어 어느 정도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습니다.
여로보암의 고민거리
그러나 여로보암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의 절기인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야 여로보암이 강제로 못 가게 한다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신앙이 강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절기를 지켜려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다 보면, 결국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로보암은 크게 세 가지 일을 실행하게 됩니다. 그가 실행한 첫 번째 일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이 두 곳에 다가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에게 이 금송아지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경배케 하였습니다.
특히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이 두 곳이 전통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지역이고, 단은 북방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북이스라엘의 전 백성들에게 거리상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여로보암은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원래 북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지파 가운데 레위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 왕이 되면서 레위인들은 더 이상 북이스라엘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 돌아갔습니다. 레위인이 없으니 여로보암은 산당을 짓고 보통사람들로 제사장을 삼아 제사의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셋째, 초막절 절기를 7월 15일에서 8월 15일로, 임의 변경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의 조치는 모두 종교적 변절을 가져왔고, 우상 숭배라는 크나큰 죄악을 불러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다윗의 집만이 아닌, 하나님조차 배반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렇게 한 것은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왕권을 유지해서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치가 아닌 위치를 위해 살아간 여로보암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솔로몬의 손에서 열지파를 빼앗아서 여로보암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 11:38)”.
여로보암은 지금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윗이 행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견고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망각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잘못 갔던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솔로몬에게 열지파를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준 것입니까? 이방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그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왕의 자리에 올라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서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방법대로 왕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곧 여로보암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씀의 가치를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들마저 잃게 되고 악행을 저지른 대표적인 왕으로 그 이름이 거론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서를 자세히 보십시오. 악을 행했던 왕 앞에서 붙는 수식어가 이렇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여로보암의 길로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치가 아니라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목적은 위치가 아니라 가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에,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주님께 있습니다. 곧 우리의 삶의 가치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성공과 꿈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치는 한순간에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떨어뜨리면 그냥 떨어져야 합니다.
위치를 위해 산 사람은 위치에서 떨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가치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가치를 위해 살지 못했던 전직 대통령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을 보십시오. 모든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존경받는 분이 있으십니까?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자살을 한 전직 대통령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상상도 못해보았을 것입니다. 그 권력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살았고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살았지, 가치를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위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고 행복하지 않다면 위치를 위해 산 것이다
JYP 대표인 박진영씨는 25살에 20억을 버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25살에 25억을 넘게 벌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을 이루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허무하더라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박진영씨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허무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달려왔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었는데 행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가치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위치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위해 산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은 시대적으로 나라가 힘을 잃은 어려운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젊은 청년시절, 고민 끝에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외세가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은 덕이 있고 지식이 있고 애국심이 있는 국민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우선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그런 사람이 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 선생이 마주한 장면은 수십 명 되지 않는 한인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생활하면서 서로 돕지 않고 분쟁을 일삼으며 미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안창호 선생은 교민들의 생활을 개선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안창호 선생이 교민들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솔선수범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교포들의 생활환경의 문제점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한인이 사는 집은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더럽다. 둘째, 집 바깥이 지저분하고 화초나 잔디를 가꾸지 않아 볼품이 없다. 셋째, 집 안이 정돈되지 않고 불결하고 불쾌한 냄새가 많이 난다. 넷째, 너무 소란스럽게 떠들어서 이웃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안창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교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어주고, 커튼을 만들어서 창에 달아주었습니다. 심지어 주방과 화장실까지 청소했습니다.
처음에는 안창호 선생의 도움을 거부하고 불편해 하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모양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포의 삶이 달라지자, 미국인들에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 가운데는 안창호 선생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건물을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건물은 한인 사회의 최초의 회관이자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로스앤젤레스 동쪽에 위치한 리버사이드라는 지역 오렌지 농장의 노동자로도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함께 일하는 교포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오렌지 하나를 정성스럽게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큰일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임을 알았기에, 교포들이 작고 사소한 것부터 제대로 하는 좋은 습관을 만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선인 노동자를 농장주들은 더 많이 고용하게 되었고, 이들은 번 돈의 10-20%를 떼어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임시정부에 보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삶은 위치를 쫓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신앙인으로써 좋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우리도 안창호 선생님처럼 위치가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대가를 지불한다
물론 위치가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특히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하지만 가치의 중요성을 안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삶의 가치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와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마땅한 대가를 지불합니다.
마13장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소작농이 주인의 밭을 열심히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합니다. 당시는 은행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종종 부자들은 보물을 밭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거나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 그 밭에 감춘 보화를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 보물을 소작농이 발견한 것입니다.
이 보화는 원래 누구의 것입니까? 밭주인의 것입니다. 지금 밭주인은 진짜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주인은 밭에 보화가 감추어진지를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소작농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이 밭을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밭을 사는데,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은 그 밭의 가치를 알기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가치의 중요성을 알고,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가 가치의 중요성을 알고 계속해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그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됐지, 과정이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과정까지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주님께도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도둑질해서 1,000억을 헌금하더라도,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1천원이라도 내가 땀 흘려서 번 돈을 기뻐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
또한 가치 있는 삶을 계속해서 살고자 하면, 올바른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짐 윌리스는 분이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좋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잘못된 물음에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답을 얻어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짐 윌리스는 세계 경제가 어려웠던 2009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해마다 세계의 경제, 정치 분야 엘리트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이 행사 기간 중, 미국 CNN 방송에서는 아침마다 대기업 회장들을 인터뷰를 했습니다.
언제나 기자들은 대기업 회장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위기가 언제 끝나겠습니까?” 짐 윌리스는 다보스 포럼 전체 회의에서 이런 CNN 기자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모인 모든 기업 회장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향해 “이 위기가 언제 끝나느냐?”의 질문보다, “이 위기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곧 짐 윌리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다 보면 생각 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여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유행을 따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을까?”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질문을 받아야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을 해야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끊임없이 내 삶의 가치를 주님께 두고 살아가고 있는 지를 질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가 되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가치를 두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떤 위치에 올라가고자, 곧 성공과 꿈만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한 번 사는 인생 우리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에 이유가 되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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