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본문: 욥기 23장 1-10절
불황 가운데 호황을 누리는 사행사업
우리나라는 지금 계속 경기불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기 불황에도 호황을 누리고 있는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사행산업입니다.
경마, 카지노, 복권 같은 사행사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06년 사행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이 12조 865억원입니다. 2016년에는 꾸준히 증가를 해서 20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사행사업의 경우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법 사행 사업은 이것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불법 사행사업은 온라인 PC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합법적이지 않은 경로로 운영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16년 불법 사행산업 매출 규모는 약 84조 원이었습니다. 2012년 75조원이었는데 4년 만에 9조원이나 급증했습니다. 이것은 합법사업에 비해 4배가 넘는 액수입니다.
사람들이 합법보다 불법 도박에 더 잘 빠지는 이유는 합법 도박에는 제약이 많고, 불법은 제약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진다
황현탁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원장은 실제로 도박을 해서 돈을 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조 자체가 100명이 도박을 한다고 할 때, 1명 정도 돈을 딸 확률이 있고 나머지 99명은 다 돈을 잃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권 같은 경우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50만분의 1이라고 합니다. 850만명 중에 한 사람밖에 당첨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마나 다른 카지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사행사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미래가 불안전하니, 요즘 용어로 소위 한 번 대박을 쳐서 인생 한 번 바꾸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탕주의요 요행심리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살아가려 합니다. 쉽게 무엇인가를 이루려 합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그냥 되는 것은 없습니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행심리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한탕주의와 요행심리는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요행심리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 기도 잘해서 대박을 치려고 합니다. 한 번 헌금 잘해서 대박을 치려고 합니다. 한 번 예배 잘 드리고 대박을 치려고 합니다.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기적만을 보려고 합니다.
이런 요행심리는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쓰임받기 위해 견딤의 과정이 필요하다
2018년 2월 21일, 20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께서 99세의 일기로 천국에 가셨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1918년 11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6세에 회심한 그는 1940년 플로리다 성경대학을 졸업하고 남침례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1950년에 빌리 그레이엄전도협회를 창설하면서 세계적인 부흥사가 됩니다.
그는 185개국을 누비며 2억 명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TV와 라디오를 포함하면 22억 명이 넘습니다. 그는 공산권 복음화에도 매진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2년 12월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와서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전쟁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전도 집회에서는 5일간 1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정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로 하나님께 쓰임받다가 이제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은 마음이 다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쓰임 받고 싶다고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쓰시기 위해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과정이 바로 견딤의 과정입니다. 이 견딤의 과정을 얼마나 잘 이기고 나오느냐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집니다.
견딤은 인생의 나이테입니다
일본 나라 현에 가면 호류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호류사는 천 년 된 소나무로 지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호류사도 ‘궁목수’인 니시오카 가문이 1,400여년 동안 대대로 지켜왔다고 합니다.
니오사카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
이는 나무의 자연적 생명으로서의 수명과 목재로 사용된 뒤부터의 생명 연수가 같다는 뜻입니다. 곧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천년을 견딘 나무니까 천 년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의 강도를 나타내는 인생의 나이테입니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를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잘 견디어낸 김은정 선수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신드롬을 일으킨 팀은 한국 국가대표 여자컬링팀입니다. 많은 유행어들을 내면서 컬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의성 마늘 처자들이 일을 냈습니다.
컬링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습니다. 의성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친구와 동생들과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한 컬링팀이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둘 줄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컬링대표팀 가운데 ‘안경 선배’라고 불리는 김은정 선수에게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자컬링팀은 2014년 소치 올림픽에 처음 참석을 하였습니다.
소치 올림픽 선발전에서 김은정 선수는 당시 상대 선수가 넘어지면서 스톤을 건드려, 멘탈이 완전 깨졌습니다. 그 이후 실수를 연발하여 김은정 팀은 결국 소치 올림픽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은정 선수는 컬링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컬링을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트도 아니고, 의성 시골에서 스포츠클럽으로 시작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성적을 내는데, 국제무대에 나가서 뛰어난 선수들과 겨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특히 대구대 은사님을 통해 멘탈 코칭까지 받으면서 김은정 선수는 그 힘든 과정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 견딤의 과정 속에, 김은정 선수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컬링이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결국엔 김은정이란 사람이 더 중요하다. 김은정이 멋져야 잘 된다. 이겨내자.” 만일 김은정 선수가 이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다면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을 것입니다.
욥의 고난
견딤을 통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성경은 욥에 대해 ‘온전한 사람이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갑작스러운 고난이 닥쳐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10명의 자녀들을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다 잃었습니다. 건강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내마저 고통 받는 욥을 보면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의 친구들도 욥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욥을 비난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욥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고난을 견뎌낸 욥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알 수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이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정당함을 변론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백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연단시키는 과정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단의 과정을 잘 견디면 반드시 순금같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백한 대로 모든 아픔과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아내의 비난도, 친구들의 비난도 견디어 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하나님의 침묵마저 견뎌내고, 더 귀하게 쓰임받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견딤의 과정을 통해 쓰임 받은 사람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다 견딤의 과정을 거쳤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있다가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서 십보라와 결혼해서 자신의 양도 없이 장인의 양을 치며 목동으로 40년을 견뎠습니다.
대제국 애굽의 왕자로 있다가 목동의 신세로 전락해서 40년을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려서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10년 넘는 시간을 억울하게 쫓기는 신세로 지내지만, 다윗은 그것을 잘 견뎌냅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고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요셉도 17세의 나이에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종의 신세로 10년 이상을 보내고 보디발 장군의 가정총무가 되지만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2년 동안을 갇히게 됩니다.
요셉은 그 모든 것을 잘 견뎌냈고, 결국 30세가 되었을 때 바로의 꿈을 해몽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잘 견뎌야 합니다. 견딤의 터널을 다 통과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견딤 속에 만들어짐이 있다
왜 견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결정할까요? 견딤 속에, 만들어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 견딤의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쓰시기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견딘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지고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져감을 의미합니다.
이는 토기장이가 마치 물레에서 진흙 한 덩어리를 그릇으로 만들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진흙덩어리를 손으로 빚습니다.
토기장이를 하나님이라고, 진흙 덩어리를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난 부분들이 깎여나갈 때는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픔의 과정을 견딜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어집니다.
한겨울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높은 나뭇가지에 자리잡은 새 둥지를 본적이 있으십니까? 저희 교회 공원에도 큰 나무 위에 새 둥지가 지어져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둥지가 커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도 거센 겨울바람이 나무를 뒤흔들어도 새들이 지은 둥지는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그 흔들림을 버텨가며 지어진 둥지이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일부러 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둥지를 만들기 위해, 바람이 부는 날 둥지를 만듭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가 저항할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소설가 故 박완서 선생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넉 달 뒤에는 사랑하는 스물여섯 살 아들을 사고로 또 잃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한 번은 잡지사 기자가 박완서 선생님에게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그것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대해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잘 견뎌 하나님께서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견뎌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 그것이 계속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려움뿐 아니라, 권력도 인기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계속되던가요? 권력이 계속 지속되던가요? 인기가 속되던가요? 고통도 지속되던가요? 어느 순간이 되면 이 또한 지나갑니다.
이 땅의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겨울이 얼마나 춥습니까? 이 추운 겨울이 가겠나 싶은데, 겨울도 지나갑니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나무마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봄이 찾아옵니다.
요즘도 군대에서 유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군대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돌려놓아도 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군대 있는 시간이 안 갈 것 같지만, 결국 시간이 가서 제대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잘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늘 함께 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참 은혜롭습니다.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주의 뜻을 알게 하소서”.
고단하고 힘겨운 인생길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눈을 들어 주를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난의 시간도 지나가게 될 것이라는 고백의 찬송입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그 고난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나갈 때까지 견뎌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대신해주시지 않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려도 버티고 견뎌내야 합니다.
고난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동굴은 들어가는 입구가 있지만, 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하지만 터널을 들어가는 입구도 있고 나오는 출구가 반드시 있습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출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고난의 터널을 견디고 통과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생각하라
둘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고통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것을 견뎌내셨습니다.
로마의 학자였던 키케로는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 소름을 끼치게 하는 사형 방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본래 십자가형은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식민 통치의 방법으로 광범위한 규모로 십자가형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고통을 주는 체벌이었습니다. 기원 후 1세기부터는 로마 제국에 대항해 폭동이나 반란을 선동한 자들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기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림을 보시면, 팬티를 걸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를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음으로써 인간적인 수치심과 조소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느끼면서 죽어가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몸이 처지면서 근육 경련과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 하였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면, 나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제 목양실에 가면 책상 정면 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진을 프린트해 붙여 놓았습니다.
그 사진을 붙여놓은 이유는 힘들 때마다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힘들 때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 고통과 주님이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면 비교가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래 이까짓 고통 이겨내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고통을 견뎌내게 됩니다. 고통을 견뎌내면 또 내가 성장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스러울 때,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못 박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뎌내게 될 것입니다.
헨리에트 앤 클라우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빠르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총명하고, 가장 부유한 사람에게 큰 승리는 오지 않는다. 큰 승리는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견디는 사람입니다. 결국 견디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승리하게 됩니다. 견뎌 낸 만큼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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