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인의 아트설교 43] 독서는 흡수력을 증대시킨다
성경 연구나 하지!
“성경 연구나 하지!”
’설교와 글쓰기‘라는 주제로 쓴 글에 누군가 쓴 댓글이다.
이런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성경 연구만으로 된다는 생각은 조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지성주의와 감정주의, 성경 중심주의과 현대 사회 적용 중심주의에 관한 논쟁이 이미 있었다. 이런 논쟁을 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에도 논쟁이 있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문제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경만으로 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만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설교는 성경만으로 안 된다.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성경만 알고 있다면, 설교는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설명 중심의 것이 된다. 하지만 글을 쓸 줄 알면, 논증 중심의 설교를 통해 청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설교가 된다.
설교에서도 성경 연구가 중요하다. 어떤 것보다 1차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 연구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 연구는 단지 설교의 시작에 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 밖에 모르면 안 된다. 성경을 가장 잘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온전한 것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가 다르다
어떤 것이든 한 가지로는 부족하다. 둘이 있어야 가정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공동체란 한 명만으로 구성이 안 된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합쳐져야 한다.
세상에는 70억명 이상의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생김새부터 다르다. 하는 일이 다르고, 관심 분야도 다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 정상이다. 태어난 부모가 다르다. 살아온 지역도 다르다. 전공 분야가 다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이 다르다고 하셨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다. 결국 사람마다 다름이 정상이다. 같은 것만 있다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겠는가? 다르기에 세상이 살맛이 나는 것이다.
만약 세상에 빛만 있다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다. 어둠이 있어야 한다. 한국이 살기 좋은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베트남에 와 있다. 이곳 호치민 등은 사계절이 없고, 하나란다. 더운 날씨 하나뿐이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사람들은 눈이 오는 겨울이 있는 나라를 동경한단다.
각자 다름이 정상이다
나라마다 다르다. 사람도 각자 다르다. 출신 지역도 모두 다르다. 즉 다름이 정상이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동안 매일 다른 것을 창조하셨다. 이는 다름의 중요함을 역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다. 단일 민족이라 그런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자기와 다르면 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좌편향적인 사람들은 우편향적인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우편향적인 사람들은 좌편향적인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른다.
단일 민족이라면서도 서로를 적으로 간주한다. 평상시 한민족이라고 하던 말들이 무색할 정도다.
우리나라는 선조들의 당쟁도 극심했던 나라였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당쟁 때문이라고 배웠다.
21세기인데도, 정치가 당쟁으로 엮이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것에 한몫 하는 사람들이 정치가들이다.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들을 미혹한다. 국민들은 이들의 미혹에 놀아날 뿐이다.
교회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편가르기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매주 설교자들을 가르치러 경상도와 전라도를 동시에 다닌다. 화요일은 경상도에, 금요일은 전라도에 간다.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두 지역의 성향이 거의 정반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에서는 이미 선진국이다. 하지만 문화에서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이념 논쟁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에, 문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선진국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나라들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심한 것 같다. 페이스북을 보다 보면, 그리스도인 중에는 자신과 생각이 틀리다며 페친을 끊겠다는 사람도 있다. 놀랍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 자매라고 배웠는데, 이념 앞에서 다 무너져 내린다. 이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생각이 한 가지 든다. 자식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연을 끊을 것인가? 이는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다.
필자에게도 아들이 있다. 필자와 아들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다른 것이 정상이다.
필자와 아들은 다른 시대에서 태어났다. 살아온 환경과 처지가 확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많이 다른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다르지 않다면 이는 복제 인간이라 할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이 전혀 없는 똑같은 복제 인간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신학교에서 종말론을 배운다. 이 때 배운 종말론 사상이 다양했다. 당시 필자가 배운 학교는 전천년주의를 주장했다. 나중에 어떤 교수는 무천년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 때 배운 종말론 사상은 아래와 같다. ‘근본주의, 역사적 전천년주의,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이 각각 달랐다. 그렇지만 틀리다고 배우지 않았다. 시대와 학교 마다 종말론 학설이 다른 것이라고 배웠다.
다른 것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다른 것만 틀린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른 것은 소중한 것이다. 다름의 소중함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기독교여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이론이 있다. 그 이론들을 틀리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해석이나 이론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정상이다. 자신이 다닌 학교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고, 선생님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교회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된다.
교회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지금 이슬람 한 종파인 IS와 같은 광적 집단이 된다. 중세의 종교재판, 근대의 마녀사냥 같은 끔찍한 사건들은, 다름을 틀림이라고 단정함으로 발생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교회가 최악의 종교기관이 됐음을,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
한국은 ‘초갈등’ 사회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한국 사회가 ‘초갈등 사회’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초갈등의 사회가 되는데 기독교가 기여한 바 크다.
기독교는 “진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를 잘못 해석해 왔다. “우리의 교리만 맞고 다른 교리는 틀리다”며, 이를 사회에 주입하려 한다.
하나님 말씀은 온전히 맞다. 하지만 사람의 주장은 한 파편에 불과하다. 결국 수많은 주장들 중 하나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하나님 말씀 외에 자기 주장을 남에게 주입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 주장만을 옳다고 하면, 갈등만 생길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초갈등’을 겪고 있다. ‘초갈등 사회’ 생성에 기독교가 앞장서고 있다.
최근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총리 후보자가 되었다. 정 총리 후보자가 국민 미션 포럼에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교회가 어떤 주장을 하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청하고 상대방 주장을 수용하는, 경청과 수용의 미덕을 발휘할 필요가 있지 않냐.”
이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를 누군가 아래와 같다고 정리를 했다. “기독교가 평화와 화합을 위해 애쓴 적도 있지만, 가끔은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기독교인이 그런 입장에 있는 게 사실이다. 지금은 기독교가 사회 분열이 아닌 통합에 앞장서야 할 때다.”
교회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곳들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가 갈등의 주체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기독교는 관용의 종교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포용과 관용의 종교다. 죄인에게도 기회를 주는 종교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어도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거의 그러지 않는다. 교회 내에서도 갈등이 첨예하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십자가의 종교는 갈등을 일으키는 종교가 아니다.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하는 종교다. 그가 죄인일지라도 받아들이고 기회를 주는 종교다.
기독교는 결코 우리 주장만 맞다고 외치는 종교여선 안 된다. 다른 것의 가치도 인정하면서,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를 증명하는 최고 수준의 종교여야 한다. 증명하지 않고 주장만 하니 갈등이 난무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획일성을 주장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리어 사회를 포용하는 기독교의 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른 것도 존중하며 우리 것의 진짜 가치를 설명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가 될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할 때, 세상을 품어낼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을 품어낼 수 없다. 기독교가 다름을 품어낼 때 기독교는 세상에 대안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최악의 종교가 된다.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비결은 하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혼을 밥 먹듯 하게 되어 있다.
부부는 처음 서로의 다름에 끌린다. 그러나 결혼생활 후에는 다르기 때문에 싸운다. 나이가 들면 다름을 받아들임으로써 부부가 백년해로한다. 나이가 들어서야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의 꽃을 피운다. 결국 나이가 들어야 사람은 성숙할 수 있다는 반증이다.
이와 같이 다름을 받아들일 때 행복한 부부로 마침표를 찍는다. 갈등을 만드는 종교가 아니라,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성숙함을 교회가 보여줘야 한다. 그럴 때 ‘초갈등 사회’에서 교회가 답이 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기독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여야 한다. 다름을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럴 때 교회가 세상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독서가 다름을 흡수할 수 있게 한다
다양성과 다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와 다름을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이런 역량을 키우는 방법 중 한 가지가 독서다.
독서를 하되, 편중된 독서가 아니라 다양한 독서를 해야 한다. 저는 그리스도인은 인문학 독서를 많이 하길 바란다. 특히 설교자라면 신학과 함께 인문학 독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접할 때, 자신의 편협한 시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초갈등 사회’에 일조하는 요인으로, 편중된 독서 영향도 무척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는 편협한 생각을 깨뜨리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초갈등 사회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과 포용의 자세로 가려면, 신학은 물론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해야 한다.
다양한 독서는 우물 안의 개구리를 탈피하게 해준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넓은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들은 다양한 세상의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함으로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들이다.
이 우물 안 개구리는 반드시 우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흡수력을 길러야 한다. 흡수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흡수력을 기를 수 있는 독서가 뒤따라야 한다.
흡수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필수적이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흡수력이 남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흡수력이 남달라지면 그릇이 큰 사람이 된다.
‘사람의 그릇’과 ‘신앙의 그릇’ 두 가지 그릇을 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답을 줄 수 있으려면, 그릇을 키워야 한다. 그릇을 키울 때, 두 가지 그릇을 키워야 한다. 먼저 ‘신앙의 그릇’을 키워야 한다. 다음에 ‘사람의 그릇을 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그릇 키우기는 잘 한다. 신앙의 그릇 키우기는 다름 아닌 신앙 성장이다. 하지만 사람 그릇 키우기는 꽤 부족하다. 사람의 그릇 키우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즉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의 그릇 키우기다.
필자의 책 《이기는 독서》에서는 ’사람의 그릇 키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남의 생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절대화한다. 하지만 그릇이 커지면 남의 생각도 소중히 여긴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면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릇을 키우면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도약하게 된다.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임을 물론 인정해주고 존중하게 된다. 이와 같이 생각이 도약하려면 편협한 독서가 아니라 다양한 독서를 해야 한다.
한 분야에서 10년간 일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분야에만 갇혀버린다. 사람들은 이 분야에서 전문가이니, 다른 분야도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은 거의 그렇지 않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아니 세상에서도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자신은 성경과 세상을 넘어, 생각의 폭이 가장 넓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거의 그렇지 않았다. 생각의 폭이 좁아도 너무 좁았다.
한 진영의 논리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생각의 폭이 매우 좁다. 반대편 진영의 논리는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폭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생각은 무척 넓다고 생각한다. 이런 결과를 낳게 된 이유는 그가 독서를 거의 하지 않거나 편협한 독서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그릇이 커야 한다.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일 정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 정치인과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였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포용의 한계치가 무한대임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은 독서량이 많아야 한다. 독서의 폭이 넓어야 한다. 독서를 많이 하고 나서, 세상을 이해하려 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다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