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학기 홍성강좌 ‘무교회주의가 던지는 질문’
‘신앙과 삶과 역사’ 하나 되는 삼위일체 신앙
기독교 신앙, 각 개인과 신의 살아있는 교제
그의 신앙 담아내는 형태로 선택한 ‘무교회’
2020년 봄학기 홍성강좌가 ‘무교회주의가 던지는 질문’을 주제로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13일 오후 7시부터 개최됐다.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는 첫 강좌에서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무교회주의’ 하면 떠오르는 김교신의 ‘일상성’에 주목한 것이다.
양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종교적 쇄신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이 나오게 하고, 하나라도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자기 쇄신 운동일 것”이라며 “이러한 때 우리가 김교신을 기억하고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김교신에 대해 “그는 신앙과 삶과 역사가 하나 되는 삼위일체적 신앙을 주장했고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에게 ‘참 좋은 신앙인’은 ‘참 사람’이었고, 나타나엘처럼 어떠한 거짓도 없는 ‘참 한국인’이었다”며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그 이상이었지 절대 그 이하일 수는 없었다”고 전했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흥 유학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한학(漢學)을 배웠고, 19세 학생 때인 1919년 함흥에서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이후 교육을 통해 동포를 각성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현 츠쿠바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해 기독교의 도덕률을 접하고, 유교를 능가하는 기독교 도덕의 깊이에 매료된다.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주체성을 형성하고자 했다. ‘초월적 신에 의거한 독립’을 동포들과 나누는 소명을 품고 귀국한 그는 1927년 7월부터 함석헌·송두용 등과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 발행을 시작한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조선’에 ‘성서’라는 최고의 선물을 줌으로써, 조선을 성서에 기초한 존재로 변화시켜 조선 독립의 주체가 될 참 조선인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김교신에게 <성서조선>은 단순히 기독교의 진리를 표명하기 위한 종교 잡지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민족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기독교적 사회 평론지였다. 그래서 교사일을 하면서 잡지를 간행하며 검열과 삭제, 발행금지 처분 등에도 버텼지만, 출옥 후 함흥 질소비료 공장에서 회사 내 발진티푸스 환자를 간호하다 해방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25일 병사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일상성 속의 신앙’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이란 신과의 살아있는 교제라고 보았다. 신앙은 신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여 그가 자기의 정신과 인격을 지배하게 하는 활동 원리였다”며 “따라서 신앙은 김교신에게 생활과 분리돼 생각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산 신앙에 의해 증명되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이었다”는 말로 그의 ‘일상성 속의 신앙’을 소개했다.
양 교수는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이해한 그는, 기독교인은 중개자 없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살아있는 관계를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교회 계급주의에 반대했다”며 “그래서 신앙을 고정된 제도나 형식에 가두고,교파적 신조와 관행이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나 종교적 배타주의, 불관용주의와 율법주의적 성례전주의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교신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해 일상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증명하는 산 신앙을 사는 것이 중요했다”며 “이러한 신앙을 담아내는 교회 형태로 선택한 것이 ‘무교회’였다. 성직자, 성례전, 조직이라는 매개 없이 성서 강해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성서 공부라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집회를 운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여 기성 교회를 거부한 것은 교회 부패에도 원인이 있으나, 본질적 이유는 신앙에서 교회는 비본질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기성 교회의 오류는 생활 속 그리스도와 결합이라는 본질을 버린 채, 기관과 부수 조직, 교의, 예배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무교회’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증거하는 것이었다”고 풀이했다.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이 신앙과 생활을 치열하게 결합시켰던 정신적 중심과 그 힘은, 성서 연구에 있었다. 무교회주의 운동에서는 성서가 기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며 “김교신은 성서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과 대화하는 일대 일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의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성서의 권위를 대단히 중시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나 축자영감적 해석과는 달랐다. 그는 “김교신은 진보적·역사문헌학적 성서 연구나 래디컬한 비판의 성과도 받아들였다”며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 ‘사실’과 ‘실존적 진실’을 구별할 것을 주장한 우치무라의 방법을 따른 것이었다. 사실 성서의 경전성은 무오류성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서의 증언 능력에 있다”고 했다.
양 교수는 “김교신은 과도한 열광주의나 맹신적 축자주의를 배격하면서 성서 해석의 객관성 확보를 주장하는 한편, 말씀에 주체적인 투신을 요구했다”며 “성서를 통해 기독교인은 신 앞에 서서 일상의 지침과 그것을 실천할 힘을 얻고, 성서의 진리에 자신의 삶 전체를 투신할 주체적·실존적 결단에 직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사는 책’이었다. 이러한 성서 해석에서 ‘주체성과 객관성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전했다.
김교신과 예언자적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희망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신앙’에서 사회·정치적 영역을 신앙적 책임 영역으로 적극 받아들였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양 교수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전 삶의 영역 안에서 관철시키려 할 때, 삶에서 특별히 종교적-비종교적 영역을 구별할 수 없다”며 “모든 일상성이 종교적 영역이고, 바로 그 안에서 신앙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교신은 성서 말씀이 인류 역사의 지향점과 일치한다는 확신 아래, 말씀에 현실 역사를 조응시켜 분석하고 대응했던 예언자적 실천을 대단히 중시했다”며 “그는 기독교 복음은 예언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보았다. 따라서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예언자적 비판과 대안 제시는 양보할 수 없는 신앙적 실천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은 당대를 ‘모든 기독교인들의 정의로운 순교가 요구되는 시대’라 보고, 신사참배는 물론 황민화 정책 일환인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며 “최후까지 ‘김교신’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1940년 10년간 가르쳤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사임해야 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시대의 어둠은 이렇게 깊어갔지만, 김교신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속에 고요히 안식할 수 있었다. 절대자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믿음 안에 머물렀던 것”이라며 “그는 우주적 화해의 공동체가 완성되는 종말의 시점에서, 오늘을 보고 살아가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 살고자 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에 삶을 정초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더불어 “김교신의 이러한 ‘일상성 속의 신앙’과 종말론적 희망에 근거한 예언자적 역사 의식은, 탈세속과 세속으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그의 정치적 실천 철학이기도 했다”며 “이 세상을 초월한 종말론적 희망으로 세상을 섬긴 그의 사랑은 지치지 않았고, 그의 희망은 결코 다함이 없었다. 자유와 사랑과 희망의 사람인 그는 무엇보다 종말론적 희망의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교신, ‘조선산 기독교’를 모색하다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의 사상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조선산 기독교’의 모색이다. 김교신에게 당대의 기독교계 현실은 서구에 종속돼 기독교가 오히려 조선인 됨을 혐오와 열등으로 간주하며 스스로를 비주체화하는 것이었다”며 “이에 외국 선교사에 대한 의지나 종속 없이, 신을 직접 만나고 그러한 눈으로 스스로를 보고 형성해 가는 ‘주체적 기독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러한 존재로 변화된 조선인에 의해 선교돼, 그 정신세계를 심화시키고 역사를 변혁하는 ‘조선산 기독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이 점은 그가 자신의 신앙 잡지를 ‘성서조선’이라 명명한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에서, 서구 우월주의에 빠진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을 비판하고,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당시 조선 기독교의 경향도 비판했다”며 “그는 어설피 기독교를 믿고 미국풍이 들어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을 잃어버린 ‘주체 상실의 기독교인’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조선혼을 가진 사람’이 보다 건강하고 기독교적일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그가 주창한 ‘조선산 기독교’는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세상의 모든 비진리와 싸우며 세상을 섬기는 지극히 ‘전투적 기독교’이기도 했다. 문화적 주체성과 함께 하늘나라를 대망하며, 역사를 변혁해 가는 창조력을 갖고, 조선 역사에 대해 책임적으로 응답해 가려고 하는 ‘정신’이었다”며 “그의 ‘조선산 기독교’는 기독교의 조선적 토착화를 위한 형식 제시라기보다, 그것이 지향해야 하는 정신적 좌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끝으로 그는 “김교신의 기독교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과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 신 앞에서 책임지려는 주체적 종교였다”며 “동시에 이러한 뜻에 공감하는 모든 종교에게 열린 ‘개방적 기독교’였다. 이제 세계 교회의 진보는 교회 자체 구조와 사회적 실천의 전환이라는 두 가지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김교신의 종교적 사유 실험과 실천은 이 두 가지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