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뷰에서의 주장 비판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대표 주요셉 목사, 이하 반동연)가 동성애와 관련, 최근 뉴스앤조이와 인터뷰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저자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에 대해 “‘동성애 반대자’를 혐오하는 ‘동성애 옹호자’ 김근주 교수의 비성경적 주장 경계하라”고 비판했다.
반동연은 30일 성명을 발표하고 “인터뷰 기사를 읽고 두려움과 분노의 슬픔을 느꼈다. 두려움은 ‘성서해석학’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멋대로 해석해 하나님의 진노를 살지 모른다는 섬뜩함 때문이며, 분노의 슬픔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실족할 거라는 암울한 전망 때문”이라고 했다.
반동연은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를 자의적으로 구분해 동성애는 선천적인 성적지향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선 안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왜곡된 인식의 기반에서 그는 성경말씀을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망동(妄動)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전형적인 사이비와 이단의 행태”라며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가 어떻게 다른가. 동성애의 성행태가 동성 성행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기에 그렇게 멋대로 구분하고 면죄부를 부여한단 말인가. 이는 대단한 영적 교만이며 월권행위”라고 비난했다.
반동연은 “남성 간 동성애는 ‘배변기관’을 통해 이뤄지기에, 순리가 아닌 역리(逆理)에 의해 자행되는 ‘성적 일탈행위’다. 여성 간 동성애도 여성끼리 ‘인공 성기구’를 활용하기에 마찬가지로 역리다. 그럼에도 이를 동성 성행위와 다른 것처럼 교묘하게 말장난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는 교활한 전형적 용어전술”이라고 말했다.
이어 반동연은 “'동성애 독재’에 대한 경각심 없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와 삭발, 100만 명 서명운동을 서슴없이 폄하한다. 하지만 이는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이며,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때 겪을 심각한 역차별과 ‘독재입법의 위험성’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다. 만일 이를 알고 그랬다면 매우 지능적인 반동성애 활동 저격인 것”이라고 했다.
또 반동연은 “그의 논지에 현혹된 이들은 그 ‘특별한 존재’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고, 맹목적으로 강하게 비판하며 혐오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혐오를 비판하는 그들이 도리어 ‘극도의 혐오’를 양산하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거짓선지자의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서운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식 논리전개에 불과하며, 동성애자들을 인정함은 물론 ‘우상화’시키는 반성경적 작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동연은 “그는 결국 자신의 저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를 통해 동성애자는 이웃이고, 반동성애자는 이웃이 아닌 ‘이웃의 적’ 또는 ‘이웃의 혐오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반동성애자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고, 죄가 아니라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매우 ‘사악한 프레임’으로 규정하며,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한 ‘거짓 선지자의 만행’이라고 규탄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성명 전문.
‘동성애 반대자’를 혐오하는 ‘동성애 옹호자’ 김근주 교수의 비성경적 주장 경계해야!
우리는 지난 1월 17일자 뉴스앤조이에 기사화된 기독연구원느헤미야(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 김근주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두려움과 분노의 슬픔을 느꼈다. 두려움은 ‘성서해석학’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멋대로 해석해 하나님의 진노를 살지 모른다는 섬뜩함 때문이며, 분노의 슬픔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실족할 거라는 암울한 전망 때문이다.
그는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를 자의적으로 구분해 동성애는 선천적인 성적지향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선 안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망언(妄言)이다. 그러한 왜곡된 인식의 기반에서 그는 성경말씀을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망동(妄動)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전형적인 사이비와 이단의 행태다.
그렇다면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가 어떻게 다른가. 동성애의 성행태가 동성 성행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기에 그렇게 멋대로 구분하고 면죄부를 부여한단 말인가. 이는 대단한 영적 교만이며 월권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인정하셨다. 둘 사이의 성관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남녀생식기를 통해서만 이뤄지고, 그로 인해 인류가 대를 이어 번식해온 것이다.
그런데 남성 간 동성애는 ‘배변기관’을 통해 이뤄지기에, 순리가 아닌 역리(逆理)에 의해 자행되는 ‘성적 일탈행위’다. 여성 간 동성애도 여성끼리 ‘인공 성기구’를 활용하기에 마찬가지로 역리다. 그럼에도 이를 동성 성행위와 다른 것처럼 교묘하게 말장난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는 교활한 전형적 용어전술이다. 우리는 이를 배격하며 저들의 술수에 넘어가선 안 된다.
김 교수는 성경말씀을 자신이 믿는 ‘특정 성서해석학의 관점’으로만 해석한다. 그리고 동성애 반대 운동자를 폄하하고 혐오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과잉일반화하며 대척점에 선 이들을 교묘하게 투박한 교양어로 ‘헛소리’인 양 매도한다. 이는 매우 지능적인 책략이며, 교활한 ‘안티 기독교’ 선동인 것이다.
그는 '동성애 독재’에 대한 경각심 없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와 삭발, 100만 명 서명운동을 서슴없이 폄하한다. 하지만 이는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이며,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때 겪을 심각한 역차별과 ‘독재입법의 위험성’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다. 만일 이를 알고 그랬다면 매우 지능적인 반동성애 활동 저격인 것이다.
그는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유독 동성애 문제에만 극렬하게 저항하는 이유가 시대 상황과 문화 등 '맥락'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 ‘하타’와 ‘하마르티아’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대신 ‘관계 파괴’를 죄로 규정하며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동성애=죄' 등식을 오독의 결과라고 매도하면서, ‘동성애 반대’를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로 규정하고 '성서해석학'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창세기 19장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동성애 본문이 아니며, 확실히 ‘집단 성폭행’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사야는 소돔을 '정의의 실종', '약자 짓밟음'이라고 언급했고, 에스겔은 가난한 자를 짓밟는다는 차원에서 이해했기에 구약 속 사람들은 이 본문을 동성애가 아니라 '약자 짓밟기' 본문으로 해석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는 레위기 본문이 '욕망의 극대화'를 이야기하며, “지금 시대에 우리가 만나는 게이나 레즈비언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는 괴이한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과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결국에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성소수자들에게 이 본문을 적용할 수 없다. 레위기는 여성 동성애를 다루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그의 논리 전개를 보면, 동성애자들을 ‘특별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해선 어떤 윤리·도덕적 잣대나 율법적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된다고 높은 방어벽을 친다,
그의 논지에 현혹된 이들은 그 ‘특별한 존재’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고, 맹목적으로 강하게 비판하며 혐오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혐오를 비판하는 그들이 도리어 ‘극도의 혐오’를 양산하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거짓선지자의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서운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식 논리전개에 불과하며, 동성애자들을 인정함은 물론 ‘우상화’시키는 반성경적 작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로마서 1장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동성 성행위를 명백하게 금지한 본문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리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게이들은 못된 마음으로 '난 남자랑 성관계할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쩔 줄 몰라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사람들이며, 직접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하는 듯해서 '내가 죄인인 건가', '내가 틀린 건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로마서 1장은 우리 곁의 성소수자들과 상관없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한 해석이겠다 싶다.”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혈안이 돼 성경을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그의 신앙이 매우 비정상적이며, 이단과 사이비에 불과함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저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를 통해 동성애자는 이웃이고, 반동성애자는 이웃이 아닌 ‘이웃의 적’ 또는 ‘이웃의 혐오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반동성애자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고, 죄가 아니라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매우 ‘사악한 프레임’으로 규정하며,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한 ‘거짓 선지자의 만행’이라고 규탄한다.
그의 논지의 종착지는 반동성애 세력을 향한 조롱이다. 그는 “동성애는 죄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한다.”는 주장을 “목사님의 죄는 미워하지만, 목사님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단순 비교해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이는 ‘동일시의 오류’에 불과하며, 동성애 반대진영을 파괴시키려는 매우 ‘교묘한 말장난·덫’이다.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동성애자한테만 그 말을 하나. 헛소리다. 그런 명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를 다르게 취급하려는 것이다.”고 강변하며, 그 어느 누구도 동성애자들에 대해 헛소리하면 안 된다고 겁박(劫迫)하는 것이다.
동성애든 이혼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은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는 이혼을 예시하며 동성애도 마찬가지라고 물타기한다. 그는 더 나아가 교회가 이혼한 사람 천지라고 과장하며, 교회목회자들이 정말 조심스럽게 설교하듯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감안해 게이나 레즈비언이 교회 다니는 데 문제없도록 만들어야 하고, 함부로 ‘죄’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게이와 레즈비언 친화적인 시각이다. 이는 목회자들이 그들에 대해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회개’를 촉구해선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가 기독교인이며 교수라고 하니 너무나 기가 막히고 통탄(痛歎)스럽다.
그는 요한복음 8장의 예수님 말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까지도 악의적으로 곡해한다. 그는 이 본문을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새 출발’ 정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볍게 취급한다. 그리곤 “동성애는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게 이성이 아닌 거다. 동성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거다. '동성애는 죄'라고 정해 놓은 채,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를 주장하는 건 하나 마나 한 논리다. 죄는 관계의 파괴다.”면서 ‘동성애 죄’를 ‘관계의 파괴’와 뒤섞어 많은 영혼을 현혹시킨다. 그 결과 수많은 영혼들이 그의 세 치 혀에 놀아나 동성애자와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압박을 가한다.
이보다도 교묘하고 가증스런 논리가 어디 있을까. 그는 이웃사랑이 지나쳐 하나님 사랑을 망각한 비기독교인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웃사랑을 말하면서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도 아니라고 단정짓는다. 그는 성경의 맥락을 강조하면서 당시의 문화인류학적 맥락 속에서 성경을 해석해야만 올바른 해석이라고 강변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에 무지한 자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라고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위세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기세가 꺾여 숨죽일 모습, 동성애자들이 기고만장할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하다. 이는 오히려 동성애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잃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들 영혼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 파멸의 길로 내모는 매우 사악한 범죄인 것이다. 거짓 선지자 김근주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해야 하나님의 저주를 면할 것이다.
또한 그는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말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는 말로 다 끝났다”는 말씀이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읽는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말한다. 그리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 무슬림이 찾아왔을 때, 내가 가진 신앙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저 사람의 신앙도 존중해 주면 된다.”면서 ‘동성애 성적 지향’을 절대시한다.
그리곤 차별금지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동성애 반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까지 사실을 곡해한다. 독재입법인 차별금지법이 역차별을 불러오고, 모든 반대 및 비판 목소리에 대한 법적 처벌까지 가능하다는 건 그의 안중에 없다. 오직 이웃사랑이면 족하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배제한 인본주의적 시각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인간을 사랑하고 무한대로 포용해야 한다는 건 어떤 범죄자도 회개할 필요 없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게이 그리스도인을 초대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질문하는 것이다. 만나지도 않은 채 그 사람 인생을 죄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반쪽짜리 해법을 마치 대단한 해법인 양 제시한 꼴이다. 게이 그리스도인들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 있는가.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마귀의 교회파괴 공작’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며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김근주 교수의 거짓되고 과장되며 왜곡된 주장에 현혹되지 않길 간곡히 호소하는 바이다.
2020년 1월 30일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