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도상
▲카라바지오의 ‘성 도마의 의심’ (1601-2), 포츠담 박물관.

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은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라는 존재적 실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실존적 상태는 죽음에 종속되어 있기에, 죽음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을 예찬하는 현인들은 자신의 철학에 기초하여 ‘행복해지고 싶음’을 그저 외칠 뿐이다. 우리 안에 침투한 죽음의 바이러스가 결국 그 ‘행복해지고 싶음’을 집어삼켜 버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죽음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의 실존을 우리의 대표자로서 당신의 부활을 통해 극복하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집약체인 죽음이 인간에게 최대의 불행인데, 이것을 단번에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에 영광스러운 상처를 남기셨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행복이 무엇인지 상기시키는 의도를 가지신 걸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고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분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고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8일이 지났다. 첫 부활절(주일)이 지난 첫 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였고 도마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문들이 닫혀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찾아오셨다. 그러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26)!”라고 말씀하셨다. 첫 부활절 때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그 메시지이다(19절).

즉시 예수님은 도마를 지목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그런데 주님은 어째서 당신의 부활체에 상처를 남겨 두신 것일까? 부활의 몸은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던가? 지금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순전한 육체가 부활의 몸이 아니었던가?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부활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육체’는 아니었다. 부활 이전 로마 군인이 당신의 손에 못 박은 흔적과 당신의 옆구리에 창으로 찌른 끔찍한 상처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두려워 의심하던 제자들이 단번에 알아볼 정도였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묵상하다가, 갑자기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신의 인성(human nature)에 치명적인 상처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상처가 오히려 당신의 신성(divine nature)을 증거하는 최고의 영광스러움이다.

곧 이어지는 도마의 고백을 보라. 영광스러운 부활체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그 흉측한 상처를 보고 만진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도마의 이 짧은 고백은 신약 본문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구절이다. 놀랍게도 그 상처는 가장 의심 많던 도마로 하여금, 그분의 신성을 가장 확실하게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정황상 이 경우에 ‘주님’은 구약의 여호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극도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분이다.

도마는 사실상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참고로 칼뱅도 지적했듯, ‘여호와’라는 호칭은 문맥의 제한이 없는 한 삼위 하나님을 통칭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이제 영원히 계속되는 ‘상처’를 자신의 인성에 안고 계신다. 우리 눈에는 당신의 부활체에 치명타를 입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당신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최고의 영광스러움이다.

그런데 도마를 향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참 의미심장하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분의 손에 못 박힌 흔적과 그분의 옆구리에 창 찔린 상처를 본 적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 즉 행복자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을 보지 않고 믿기 때문이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면, 아마 도마보다 훨씬 더 깊은 경외감으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이 고백은 죄인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세상의 그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음’을 막연히 외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로 이미 행복해져 있기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환희의 외침이다. 우리의 존재는 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변화될 수 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때를 사모하며 어려운 시국에 더욱 소망을 가져보자.

권율
▲권율 목사.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선교지원 사역에 힘쓰고 있다. 『연애 신학』 저자로서 청년들을 위한 연애코칭과 상담도 자주 진행한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외래교수)로 섬기며, 김해 푸른숲교회 협동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A Theology of Dating: The Partial Shadow of Marriage(『연애 신학』 영문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