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지도자들 솔선, 애국심을 신앙으로 승화
민족대표 33인 자수한 후 교사·학생들이 이끌어
일제의 회유책동 전략, 친일파 양성해 민족 분열
학살의 상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으로 꽃피워
독립운동 국외 확산, 선교사들의 수고 기억해야

일본교회의 속죄의 제안, 관계 회복 모범 삼아야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3·1운동은 해외에서 준비하고 국내에서 위대한 결실을 맺은 독립운동”이라며 “일본 교회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제안을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 회복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샬롬나비는 28일 논평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조선 백성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독립 의식을 일깨울 때, 해외에서 독립운동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의 활동과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결정,’ ‘2.8독립선언’ 등이 그것”이라며 “상해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담에 김규식 파견을 결정하고 조선, 일본, 만주와 노령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도 이승만과 정한경 등을 파리강화회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의 소식을 들은 일본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도쿄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반포한다. YMCA 회관에 재일 조선 유학생 400~600여 명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후에 친일론자로 변절하는) 이광수가 선언서를 작성하고 백관수가 낭독했다. 이는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 삼천리 반도에서 당시 인구(1,678만 8천 명) 12% 200만여 명이 참여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누가 시켜서도 조직을 가동한 것도 아니었다. 일제가 잔인하게 학살한 사망자는 7천 5백 명에 이르렀고, 투옥자는 5만 명이 넘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칫 태화관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몰랐던 독립선언문은 정재용에 의해 선포되었다”며 “독립의 염원은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단결과 응집으로 시작되었다. 학생을 비롯 상인과 농민 등 수많은 운동가들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당하며 전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고 했다.

이어 “3.1만세독립운동 이후 삼천리 반도에는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수없이 일어났다. 일본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조선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유일한 소망이었음을 깊이 명시해야 한다”고 했다.

또 “3.1독립운동은 애국애족의 염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실천한 비폭력 운동이었다”며 “3.1독립운동 국외 확산은 조선과 교회를 사랑한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의 수고였음을 기억하자”고 했다. 아울러 “일본 교회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제안을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 회복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3·1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해외에서 준비하고 국내에서 결실한 거국적 독립 운동이다.
제암리교회 학살 50주기 1969년 일본교회의 참회 행위, 1970년 제암리에 사죄교회당건립은 한일관계 회복의 본(本)이 되어야 한다.

2024년 3월 1일은 1919년 기미 대한독립만세운동 105주년 3·1절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백성들이 일제의 폭압에 비폭력 만세 운동으로 조선독립을 선언한 운동이다.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 삼천리 반도에서 당시 인구(1678만8천명) 12% 200여만 명이 참여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누가 시켜서도 조직을 가동한 것도 아니었다. 일제가 잔인하게 학살한 사망자는 7천 5백 명에 이르렀고 투옥자는 5만 명이 넘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1920년까지 일제는 육군대장을 총독으로 임명해 조선의 무단(武斷)으로 통치했다. 이러한 치욕과 울분의 폭발의 계기는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 사건이었다. 일제의 독살설이 무성한 가운데 수많은 백성들이 고종 장례일 3월 3일에 맞춰 경성에 운집했다. 이때 조선태형령에 모멸감에 분노하던 백성들과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과 소작권을 강탈당한 농민들의 분노가 끓고 있었다. 이 분노가 독립운동으로 응집되었다. 샬롬나비는 105주년 3·1절을 맞아 일제에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응전한 기미년 만세독립운동의 숭고한 역사와 현재의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였던 모습. ⓒ독립기념관
1. 3·1독립선언은 해외에서 준비하고 국내에서 위대한 결실을 맺은 독립운동이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조선 백성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독립 의식을 일깨울 때 해외에서 독립운동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의 활동과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결정,’ ‘2.8독립선언’ 등이 그것이다. 상해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담에 김규식 파견을 결정하고 조선, 일본, 만주와 노령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도 이승만과 정한경 등을 파리강화회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의 소식을 들은 일본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도쿄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반포한다. YMCA 회관에 재일 조선 유학생 400~600여 명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후에 친일론자로 변절하는) 이광수가 선언서를 작성하고 백관수가 낭독했다. 이는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3·1독립선언은 국내외 비폭력 저항 운동의 위대한 결실이 낳은 운동이다.

2. 3·1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애국심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운동이다

3·1독립선언은 동학의 이념을 계승한 천도교 창시자 손병희 선생의 주도로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의 동참을 이끌어냈고 불교계도 함께 했다. 기독교계는 이승훈 장로를 비롯 16명, 천도교계 15명, 불교계 2명 총 33명이 민족을 대표했다. 독립선언문 작성은 후에 친일론자로 변절한 육당 최남선이 맡았으며 ‘공약 3장’은 한용운 선생이 썼다. 그런데 거사 당일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바뀌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운동의 확산과 참가자 희생을 우려 본래 선언문 낭독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으로 가지 않고 요리집 주점 태화관에 모인다. 4명의 목사가 빠진 29명이 모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한다. 그리고 일본 헌병에 자수했다. 폭력 시위와 희생자를 우려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처사는 반드시 되돌아 볼 문제다. 하지만 독립의 염원은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단결과 응집으로 시작되었다.

3. 기미년 독립운동의 신호탄은 민족의식에 투철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쏘아올렸음을 명심하자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모인 동포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교회 전도사이며 민족학교 교감 선생님이었던 정재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자칫 태화관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몰랐던 독립선언문은 정재용에 의해 선포되었다. ‘조선 독립선언서’, 약 10분 간 38자 46행 8소절 본문과 공약 3장을 일사천리로 낭독한 후 그는 ‘조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조선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기미독립선언 만세운동이다. 민족대표 33인이 일본에 자수하고 물러난 이후 학생을 비롯 상인과 농민 등 수많은 운동가들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당하며 전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자수한 민족대표들은 3년 정도 복역하고 대부분 풀려났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수많은 백성들은 현장의 살상과 고문과 구타를 견디며 5년, 10년, 15년을 복역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 3·1만세운동은 조선독립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의 본격적 신호탄이었다

3.1만세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먼저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과 소작권을 상실한 농민들이 무장투쟁으로 봉기했다. 그리고 범민족적 차원에서 행적 조직의 성격 띤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생겼다. 가장 큰 단체는 민주·대의정치체제의 정부수립을 천명했던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무오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한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흡수 통합한 ‘상해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창설하여 현대전에 최적화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농민의 무장투쟁과 연계하여 무장독립전쟁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0년 독립전쟁의 상징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그 결실이었다.

5.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회유책동 전략은 친일파 양성으로 민족을 분열시켰음을 명심하자

조선총독부는 3·1 운동 이후 조선에 대한 통치정책을 바꾼다. 헌병경찰에 의한 강압적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하고 조선인을 회유하는 책동을 꾀하고 명목상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책략을 꾸민다.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을 허가했지만 실제로 이름만 바꾼 것으로 삼천리 반도를 친일파 양성소로 전환했고 한민족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해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악질 기관 ‘고등 경찰제’를 도입했다. 자신을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양성하여 조선인을 이간하고 분열시켰다. 민족의식 배양의 뿌리까지 뽑고자 모든 교육은 초급 학문에 머물게 하고 오직 기술 교육만을 강요해 조선인을 오직 식민 지배를 위한 대량의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6. 일제의 학살로 절망한 기독교인들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으로 꽃피웠음을 꼭 기억하자

3.1만세독립운동 이후 삼천리 반도에는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수없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6일 평안북도 곽산의 학살 사건이다. 곽산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수천 명이 동참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을 체포 직후 타살하였으며 체포한 시위 군중 100여명 중 50여 명을 잔인한 고문으로 죽인다. 이후 비무장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은 물론 광견(狂犬) 도살용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 명을 참살했다. 곽산의 참살(郭山一慘殺)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3·1운동 개시 한 달 보름 지난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서 헌병 중위가 학살 사건을 저지른다. 교회당 안에 가둔 후 29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채를 불태웠다. 잠긴 문을 열지 못하자 벽을 부수고 탈출하는 신자들도 모두 사살했으며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도 사살한다. 일본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조선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유일한 소망이었음을 깊이 명시해야 한다.

7. 3.1독립운동은 애국애족의 염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실천한 비폭력 운동이었다

1919년 4월 4일 전북 이리 장날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문용기 선생이 독립운동을 주동했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 거사를 거행하기로 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1천여 명이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일본 헌병대는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까지 동원하고 총칼과 총검, 곤봉과 쇠갈고리를 휘두르며 잔인하게 진압했다. 문용기 선생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선생은 군중을 이끌고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격분한 일본 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했다. 독립만세, 힘찬 함성과 함께 선생님은 순국했다. 애국애족의 절개를 끝까지 비폭력 운동으로 고귀한 희생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한결같이 보여준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비폭력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8. 3.1독립운동 국외 확산은 조선과 교회를 사랑한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의 수고였음을 기억하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알렸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5일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은 역사 속에 사라질 뻔했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선교사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한국명 석호필)였다.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 그 상황을 세상에 알린다. 스코필드 교수는 지속적으로 조선인을 돕다가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다. 그는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리고 제암리학살사건을 알린 일본인이 있다.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던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1982)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무도함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弔儀)를 담은 『어느 살육사건』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지에 발표했다.

9. 일본 교회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제안을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 회복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제암리학살사건은 일본에서 거의 잊혀질 무렵 1965년 일본 개신교계 인사들이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당시 일본해외선교회 소속 목회자가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제암교회 소타(焼打)사건 속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의 속죄 헌금을 모금하여 교회당 재건 및 추모시설 건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일부 유족들은‘'일본인 돈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 교인들은 거듭거듭 간곡한 속죄를 청했고 제암교회 측도 1968년 2월에 이를 수락했다. 그래서 사건 발생 50주기인 1969년 4월 15일 기공식을 시작으로 1970년 9월 22일 사죄의 교회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일본은 일본 개신교계의 양심어린 반성과 사죄 노력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2024년 2월 28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