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
▲휠체어를 타고 있는 류한승 목사. ⓒ크투 DB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지난 편에 이어 계속되는 글입니다. 이번부터는 성경이 말하는 장애에 대한 인식과 죄의 연관성을 살펴보려 합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성경을 먼저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를 보기 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난 편에서 나눈 것처럼 장애에 대한 인식 중 시혜자 논리가 왜 문제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고자료는 성경이지만, 그래서 성경을 무기로 휘두를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장애는 인간의 죄 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모델로 등장시켜, 하나님이 치료해 주셔야 하는 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성경에서는 장애를 다룰 때 죄와 연관지어서 다루고 있을까요? 또 성경에서는 장애를 왜 등장시키며,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모두 죄인입니다. 영적으로 죄인이 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따라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죄를 범한 사람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마음으로 짓는 것도 동일한 죄라고 판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올바로 판단하고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 피조물인 사람은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타인의 죄를 근본적으로 들춰낼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죄도 소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그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고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죄의 상징이 아니라, 그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2. 거룩은 사랑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판결 짓는다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을 자칭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은혜를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구별이 아닙니다. 구별은 본디 거룩한 것입니다. 구별은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신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도 거룩하다”며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죄된 속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부름받은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거룩으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이란 고요한 산 속, 아무도 없는 광야 가운데 무릎 꿇은 자의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 도피하고 등돌린 이들까지도 품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모습을 보고 죄인과 의인을 차별하면서, 구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서로를 차별하게 만들까요? 역설적으로 우리의 죄 된 속성입니다.

에덴에서부터 근원한 아담의 죄 된 속성은 ‘보이는 것에 이끌리고’, ‘남이 죄인이라고 가리키며’, ‘말씀의 뒤에 숨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뒤에 숨어서, 보이는 것으로 남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거룩의 반대편에 있는 죄 된 속성입니다. 그 모습으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자로 사람을 죽이는 데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했습니다(고후 3:6).

3. 예수의 거룩: 서로 사랑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즉 보이는 형태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이들을 위해 보이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남의 죄만 따지며 자기 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만인이 죄성을 갖추었으나 하나님께서 만인을 구원하기 원한다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부터 지켜왔던 제도 가운데 의미가 사라진 제도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타자를 위해 나의 바쁨을 멈출 수 있기를 바라는 안식의 의미와 달리, 안식일 제도를 지키는 것 때문에 생명조차 경시하는 풍조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 죄인으로 판정받은 사람들과 이야기하시고, 식사하시며,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같은 죄인끼리 서로 죄인이라 규정지으며 살아왔던 일상의 균형을 회복시키면서, 자기 자신이 더 큰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도 직접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아낌없이 준 사랑을 되돌려받지 않겠다는 각오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들 간에 무너진 사랑의 수평성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한 만큼 반 정도는 돌려다오”라는 메시지를 하더라도 죄송할 텐데,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 하시며 가시적 존재에서 비가시적 존재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는 여전히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우리기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 이후에는 보이는 존재들을 차별없이 사랑하기 위한 ‘자기 소멸’입니다.

보이는 자기로서의 완전한 ‘자기 소멸’만이 그를 따르던 이들의 시야를 서로를 향해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원수같은 놈”이라 생각했던 이를 볼 때마다 “원수같은 나”를 마주하며, 세상 어디에도 그놈이 있지만 그놈이나 이놈이나 매한가지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원수를 창조해내는 원수 생성형 인간인 나와 싸우는 것입니다.

내 기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아무리 예수라 해도 등 돌려 버리는 우리, 각진 십자가 네 귀퉁이 같은 성품들로 가득찬 세상과 맞섰던 예수님은 언제나 혼자인 듯 했지만, 그 곁에 끝까지 남아있던 이들은 2천 년 전 마이너리티였습니다.

성전 미문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며 예배당 앞에 허공을 응시하는 삶을 거룩인 줄 알았던 이들이, 이제 보이는 서로를 마주하며 미문 밖에 뒀던 이들을 응시하고, 사역 때문에 바쁘다며 발견하지 못했던 이들을 두 눈으로 발견하고 주목하는 사도행전 3장의 삶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4. 당사자에게서 주변인들을 향한 가르침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경 속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장애 문제를 들춰내 치료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죄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여지는 이들의 모습만으로 판단하고 정죄해 분리시키며 살아가는 주변인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장애 이야기가 성경 속에 등장할 때는 언제나 주변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배경 중 가장 중요한 사도행전 3장 이야기에는 성전의 공간이 분리된 이야기, 지체장애인의 회복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 등이 있고, 베데스다 연못 이야기에는 빠른 사람 한 명만 치료받는 속도와 경쟁 이야기에 파묻힌 존재가 있습니다.

장애인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와 사회적 결핍에 대한 지적이 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의 문제에 접근하는 듯 싶지만,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고 손가락질하는 주변인들이 울리던 요란한 북소리를 잠재우는 파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난 장애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분이 창조해 내는 것은 존엄한 파동입니다. 거대한 호수처럼 보이는 곳, 누구라도 감히 들어가 발을 담그기에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바위덩어리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바위가 맞닿는 수면이 목적이 아니라, 주변에 파동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고요하고 아무 문제 없어보이지만, 실은 적막해 물결과 물결이 만나지 못한 지 오래 돼 호수가 된 그곳에 물결이 일렁입니다.

바위덩이가 만들어낸 파동은, 어쩌면 그곳은 바다여야 했던 것은 아니냐 묻고 있는것이지요. 어느덧 그곳은 누구라도 들어가 물장구를 치는 곳, 누군가가 만들어낸 파도를 타고 일렁이는 곳이 됩니다.

형제요 이웃이요, 가족이요 연인이요, 하나님 자녀로 협주해야 할 우리 관계는 더덕더덕 끊어진 줄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처럼 엉망이 되었습니다.

관현악단의 기준음이 되어야 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줄이 끊긴 이상, 아무리 많은 수가, 아무리 많은 전문가가 연주한다 한들 아름다운 화음이 될 리 없습니다.

둘 이상의 음을 이어주는 레가토 표시를 무시한 채 연주하는 굳은 떡처럼, 딱딱한 저마다의 목소리를 들어야하는 피조 세계는 연일 고통스럽다 아우성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해 눈 밖 존재를 두고선 바벨탑 위에서 치료해주겠다는 목소리, 그 예배당 미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뜨겁게 찬양하면서 주변인들은 사라진 흑암 같은 공간, 날줄에 덧입혀진 씨줄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날금들이 빗금이 된 세계, 서로 기대어 살아야하는 인간 세계, 그러나 사이의 존재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여전히 꽹과리 소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명목하에 목회라는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으로, 성도라는 자격으로 죄인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만든, 갈라지고 메마른 땅에 날금과 씨금을 그어 십자가를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보이지 않는 몸을 대신하여 나와 너 사이에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이음줄이어야 하는 존재를 성경 속에서 다시 발견하라고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장애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보다 자세히 성경 속 장애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