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대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는 렘브란트 탄생 400주년을 맞아 지난 3일부터 8박 9일간 아들과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는 ‘새로운 미술의 지평을 연 장본인으로, 탈 많았던 종교미술을 생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전환해 발전시킨 위대한 화가’라는 평을 받는 개신교 최고의 화가다. 서 교수는 지난 2001년부터 본지에 ‘서성록의 렘브란트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렘브란트의 삶과 예술에 대해 30여 차례 기고한 바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도서출판 재원 「성서그림 이야기-렘브란트」). 본지는 서 교수의 네덜란드 탐방기를 6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암스테르담의 ‘미술관 광장’에는 대형 미술관이 사이 좋게 모여 있다. ‘미술관 광장’엘 가면 시립미술관과 릭스미술관, 그리고 고흐미술관 등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 중앙 광장은 푸른 잔디와 인공연못이 조성되어 있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인구가 밀집한 번화한 지역이니 미술관 입지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고흐미술관은 언제 가봐도 관람객들로 붐빈다. 하루에 입장객이 평균 5천명, 주말에는 7천명 가량 된다고 한다. 한해 평균 세계 각지에서 온 1백만명 이상이 미술관을 방문한다고 미술관 관계자가 자랑한다.
이 미술관에는 고흐 생전 10년간(1880-1890)의 주요 작품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다. 반 고흐 재단의 콜렉션은 세계 최대규모다. 회화 2백점, 소묘 5백점, 4권의 스케치북, 그리고 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낸 8백여통의 수기 편지를 각각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흐는 렘브란트, 몬드리안과 함께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3대 화가이자 온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열광하는 화가이니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명성에 비해 고흐만치 지난(至難)한 삶을 보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진 역경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파선하고 말았으나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후대 사람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미술관에는 고흐의 초기 작품부터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니 가슴이 아려왔다. 작품을 보는 순간 그의 삶의 비애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작은 한결같이 어둡고 칙칙하다. 화려하고 기발한 것에 익숙해진 감상자라면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이야말로 고흐의 진면목을 확인해볼 수 있는 명작들이다. 실제로 초기 작품을 보면 벨기에 보리나쥬(Borinage) 탄광에서의 사역을 마친 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긍휼한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감자가 든 바구니>, <옷 짜는 여인>, <움막집>, <감자먹은 사람들>, <여인 두상> 등은 어느 한밤의 풍경이나 어두움이 드리운 고달픈 인물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조형적으로 서툰 측면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작은 감상자를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대상과 대상 인물에 대한 짙은 애정이 그것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때문에 그림은 결국 화가 자신의 삶과 정신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낳는다. 정직한 농부의 삶을 사랑한 밀레(Jean-François Millet), 서민의 생활을 수수하게 전달한 죠셉 이스라엘스(Jozef Isräels)의 영향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하지만 고흐만의 굵은 선, 대담한 색채 처리, 힘있는 붓터치는 다른 화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들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무거움 때문인지 전시장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입구부터 장난을 치며 와글와글하던 남녀 고등학생들도 전시장에 들어오자 잠잠해졌다. 교사로부터 사전에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선지 아니면 작품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장내의 정숙함은 그의 작품에 시선을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흐, ‘성경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채, 1885
입구에 들어서서 몇 걸음 못 가 나는 <성경 있는 정물>(1885) 앞에 멈추어 섰다. 이 그림은 그의 신앙적 내용을 말해주는 작품으로 목사였던 부친 테오도루스(Theodorus Van Gogh)가 작고했을 무렵 제작한 것이다. 부친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고흐는 이 작품으로 불효에 대한 미안함을 전달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개혁교회의 신앙관을 갖고 있었던 부친과 인본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었던 아들 사이의 거리감은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릭스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작품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화면 중앙에 커다란 성경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우측에는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의 ‘삶의 기쁨’이란 소설이 놓여 있다. 성경은 구약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지시한다. 얼핏 보면 고난에 내재한 인생의 기쁨을 그리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삶의 기쁨’에 나오는 주인공 폴링을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려 했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폴링은 만민 구원을 위해 혼인하지 않은 자비의 천사같은 인물로 나온다. 만일 에밀 졸라의 폴링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취급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소설의 주인공 속에서 찾으려는 이런 시도는 무모할 뿐만 아니라 훗날 고흐 자신의 신앙생활이 오리무중의 혼미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예감하는 불미스런 단서가 된다.
그의 그림에서 성경을 비추는 촛불은 꺼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원작인 렘브란트의 작품에서는 촛불이 환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다. 꺼진 촛대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기쁨’을 넣은 의도는 무엇일까? 펼쳐진 성경의 글자는 왜 아무것도 안보이게 했을까? 렘브란트를 본받아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면서도 왜 고흐 자신은 탕자임을 고백하는 그림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을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고민하며 몸부림친 고흐, 대자연의 오묘한 생명에 흠뻑 도취된 고흐, 그의 작품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지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 기성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마저 버린 고흐의 말로(末路)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림에 있어서는 출중함을 한껏 뽐냈으나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너무나 소홀한 고흐였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고흐가 이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훨씬 더 나은 예술가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전시장을 조용히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