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니느웨를 향한 야훼의 마음을 증언한 자
이스라엘 예언 역사의 마지막 시기를 정리하면서 구약의 하나님 "야훼"를 가장 진실하고도 분명하게 증언한 예언 문학의 주인공으로 채택된 자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였다. 그러나, 이 인물이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나오는 기원 전 8세기(여로보암 2세 치하의 기원 전 787-746)의 그 동일 이름의 인물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다. 단지, 이 "요나"라는 인물은 아주 고대의 예언자 전승으로부터 그 이름 만! 빌려 왔을 뿐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줄 뿐이다. 즉 요나서의 내용과 비교할 때 요나라는 인물은 기원 전 8세기와는 전혀 연결이 안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요나서 3:3에 의하면, "니느웨"(앗수르의 수도)는 "하나님 앞에 큰 성읍"(하나님의 눈으로 보아도 큰 초인간적이고도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성읍)으로 그려져 있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직경이 4km 정도 밖에 안되는 규모의 성읍이어서, 비록 당시로서는 큰 성읍이기는 하여도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거국적인 회개(왕으로부터 마굿간의 가축에까지 모두 회개하는 그런 회개)를 한 적은 "결코"(!)없었던 악명 높은 침략제국이었기 때문에 요나가 기원전 8세기에 니느웨 선교에 나섰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겠다.
요나서 본문의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에 의하면, "요나"라는 인물은 에스라 개혁(기원 전 5세기)의 영향을 받아 이방 나라에 대하여서는 배타적 감정으로 굳어진 민족주의적 배타정신이 포로 후기 백성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때에 선민(選民) 유대민족의 정서를 대변(!) 또는 상징(!)하는 인물로 철저히 각색(脚色)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언급, 즉 아버지 "아밋대"에 대한 언급 이외에는 그의 캐릭터(character)를 설명해 줄 역사적 자료는 전혀 없는 인물이다.
"아밋대"라는 말은 "진리"("에멧"의 구문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요나"라는 인물의 각색성(脚色性)을 고려하면, 그는 이 이야기 전체에서 "진리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배타적(排他的) 선민의식의 소유자요 그런 소신이 남다르게 강한(니느웨 선교를 거부하고 니느웨 행이 아닌 다시스[스페인 동해안의 이방 땅]행 배를 탄) 자로서, 이 역할을 하기 위하여 특별히 선별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나"는 편협한 민족주의 신앙의 화신(化身)으로 분장하여 "자기를 바다에 내어 던지고"(욘 1:12, 15) "자기를 불사르는"(욘 4:3b,8b) 정신으로 자기 민족을 예언자적 비판정신에 의거하여 신랄히!(욘 4:9b) 비판한 바벨론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 최대의 엘리뜨 예언자라고 보는 옳을 것이다.
예언자 요나는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완곡하게 소명을 사양하는 형식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 "배역하는!!"(욘 1:3) 선민(選民)의 역할을 분담하기로 자청하였던 자였다. 그렇게 하여, 배타주의적 민족주의 신앙의 억센 굴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려 한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였고 진정한 의미의 엘리뜨 의식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요나는 야훼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은 요나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뜻을 끝내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욘 4:2). 그러므로, 요나는 흉용한 바다 풍랑을 예견하고 있었고(욘 1:12) 따라서 바다의 흉용함을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큰 바다 폭풍으로 배가 개어질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는 오히려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고 때가 임하였을 때는 냉정하고도 침착하게 자신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이방인들에게 증언하는 자라는 것을 밝히는 대담성도 보여 주었던 것이다.(욘 1:9) 그리고 풍랑을 잔잔하게 다스리실 분은 야훼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고서 조금도 자세를 흩어뜨리지 아니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 사공들도(!!) 요나가 흘릴 피를 "무죄한 피"("땀 나키"=innocent blood 욘 1:14)라고 감히!! 말한다. 아마도 이 말은, 많은 서양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방인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그 행위는 어디까지나 요나와 요나의 하나님 야훼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고의적 살해의 범죄행위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말이다. 아마도, 요나의 죽음은 감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비를 이룰만큼(마태 12:38-39; 눅 11:29-32) 요나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좁은 의미 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 신앙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심판이요 그 민족심판을 요나가 대신하여 받는 하나의 속죄적 희생물의 성격을 띌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 요나서 기자의 "신학적 고안(考案)" 또는 "신학적 의도"일 것이다.
이 일 직후에 일어난 사건, 즉 요나가 밤 낮 삼일을 고기 뱃속에 있었는데도 살아 나와 재(再) 소명(召命)을 받고 니느웨로 갔었다는 사건과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오진"(誤診)한 듯한 요나서 2장의 기도가 탄원 기도문이 아니라! 감사 기도문이라는 것, 그리고 니느웨가 회개하자 즉각 니느웨에 대한 용서를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독자들에게 집요하게 설득시키려 하셨다는 사실(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은혜와 긍휼/자비]가 크신 하나님[엘-한눈/엘-라훔]을 요나 이야기의 "결론"으로 선포한 사실) 등은 요나의 소명 거절과 요나 스스로 바다 속에 던지워지기를 요청한 일, 그리고 요나의 재선교(再宣敎) 사건 등등의 사건들이란 어디까지나 우리로 하여금 요나의 모든 행적을 하나의 "예언자적 상징"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하겠다.
"요나"를 통한 요나서 기자의 예언자적 증언이 말하려는 목적, 그 케리그마적 목적은, 그러므로, 오직 이것이다. 즉 야훼는 은혜의 신[엘-한눈]이요 긍휼의 신[엘-라훔]이시므로 심판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후회하셔서 그 뜻을 돌이키시는 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신(神)이시다(욘 4:2).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악명 높은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首)인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 백성도 회개만! 하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증언하는 그것이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증언을 위한 사자(使者:messenger)로 선택된 예언자가 "요나"이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 즉 "진리의 아들"일 뿐이다. 그 이외에는 "요나"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간에 "요나"라는 이름의 뜻이 "비둘기"라는 뜻이고 그리고 이 비둘기는 고대나 근대나 간에 "평화"를 상징하는 새라는 것은 요나서가 지닌 역설(逆說)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니느웨 사이의 증오는 하나님의 뜻과는 역행된다. 그 둘 사이의 문제는 정의의 칼날로 선악 간의 도덕적 판단을 결론 내리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회를 통한 용서와 화해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요나서가 말하려는 것이다. 요나는 예레미야가 조국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에 조국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심판을 하나님의 구원섭리라고 외치다가 순교(?)당할 수 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바벨론 포로 후기에 점층되든 배타적이고도 편협한 이교 배척의 민족주의 신앙의 사슬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 내려 하였던 기원 전 5-3세기 경의 이스라엘 최대의 신앙 지성인이요 예언자적 엘리뜨였던 것이다.
"요나"에 의하면, 야훼 하나님은 정의의 칼날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역사 심판의 주인이 아니시다. 야훼 하나님은 회개(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끌어내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엘-한눈/엘-라훔)이실 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시는 분이시다(사 1:18b). 그러므로, 악명 높은 앗수르의 니느웨라 할지라도(pace 나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사람 12만명과 많은 가축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아끼실 수 밖에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욘 4:11). 이것은 예수님의 요한복음 3장 17절의 증언,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그 아들의 속죄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증언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겠다.
악하고 음난한 세대가 표적(세메이온: sign)을 구하나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b; 눅 11:29b)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구약 종교는 "긍휼"의 종교다. 신약종교는 "사랑"의 종교다. 진리를 전하는 종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 긍휼, 그리고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그 길(the Way)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4:6). 히브리 종교 예언 역사 끝에 서 있었던 예언자 요나는 온 인류에게 "은혜와 긍휼의 신"이신 야훼의 생명 사랑의 정신을 통하여서만 인류역사에 구원의 희망이 있다 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